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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한국독립운동 인재 배양의 요람, 신흥무관학교와 만나다
글쓴이 tntv 등록일 [2019.08.25]

한국독립운동 인재 배양의 요람, 신흥무관학교와 만나다 역사는 기록의 학문이자 기억을 소환하는 학문이기도 하다. 2011년 신흥무관학교 100년을 기념하는 학술행사가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한 지도 벌써 8년이 지났다. 한국독립운동 인재 배출의 요람이며 만주와 중국 대륙에서 활동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 역시 신흥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01. 한국광복군 성립 전례식 기념사진 ⓒ위키백과

‘신흥’의 역사를 따라걷다

1911년 6월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에서 토착민들의 옥수수 창고를 빌려 시작된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는 신민회의 ‘신’자와 다시 일어나는 구국투쟁이라는 의미의 ‘흥’자를 합한 것으로 나라를 새로 일어나게 한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초기 신흥강습소의 학생은 약 40명이었다. 추가가 신흥무관학교 교장은 이철영과 이동녕이었으며, 본과 또는 원반과 군사학을 전수하는 특별반으로 나뉘어졌다. 신흥무관학교는 이회영 6형제와 안동의 이상룡, 김동삼 등을 비롯한 명망가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들은 사회지도층으로서 기존의 모든 기득권과 영예를 포기하고 전 재산을 바쳐 신흥무관 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이 사실은 한국인의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전형으로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을 정도이다. 다만 이러한 사실 이외에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1907년 말에 이동녕의 친척이라고 알려진 이병삼이 먼저 와서 삼원포 지역에 정착했다는 점이다. 바로 이병삼은 신흥무관학교 교관이자 만주 독립운동의 대표적 인물인 이장녕의 부친이기도 하다. 이들의 노력으로 신흥무관학교는 만주지역 독립운동의 단단한 전초기지가 되었다.

이회영,이동녕,이상룡 사회지도층으로서 기존의 모든 기득권과 영예를 포기하고 전 재산을 바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추가가 신흥무관학교 : 새로운 꿈을 끼우다

필자는 여러 차례 신흥무관학교를 답사하였다. 2011년 8월에는 신흥무관학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추가가로 향했다. 추가가 이정표가 눈에 들어왔다. 이곳도 몇 번을 왔던가. 차는 추가가 이정표 밑을 지나 정차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추가가 이정표를 촬영했다. 양쪽에 늘어선 주택들은 붉은 벽돌과 기와를 올린 전형적인 한족 가옥이었다. 먼저 필자는 신흥학교 옛 터로 향했다. 가는 길 왼쪽으로 난 개울은 상당히 지저분해 보였다. 옛 신흥학교 터는 현재 유리파편을 분쇄하는 공장으로 쓰이고 있다. 젊은 노동자가 낯선 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하고 있었다. 그곳이 정확하게 신흥학교 터라고 할 수 없지만 그 주변이 신흥학교와 연관되어 있는 것만큼 분명하다.


1911년 6월 설립된 신흥강습소는 이회영, 이상룡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염원이 한데 모아진 결과물이었다. 신민회에서 추진했던 독립운동기지 건설과 함께 실행된 무관학교 설립 의지가 바로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으로 나타난 것이다. 추위가 온몸을 고통스럽게 하는 서간도 유하현에서 출발한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8월경 폐교될 때까지 약 3,0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할 정도로 그 생명력과 조직력은 다른 학교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대고산을 내려오면서 머릿속에서 내내 자리 잡고 있는 하나의 숙제였다.


우당 이회영과 석주 이상룡을 비롯한 애국지사들은 대고산 노천회의를 통해 경학사를 설립하고 장기적인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천명했다. 경학사 터다. 지금은 거대한 옥수수밭으로 변해 있는 경학사 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02.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서 해외로 망명하여 일제강점기에 무장 독립운동을 벌인 독립 운동가 김경천 ⓒ위키백과 03.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한국독립군 총사령관을 지냈으며, 동아혈성동맹(東亞血成同盟)의 간부로서 각지의 항일단체를 규합하는 데 힘쓴 독립 운동가 지청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04. 신흥학우보. 1913년 7월에 창간된 신흥학우단의 기관지이다.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 강성독립군을 양성하다

신흥무관학교는 날로 늘어나는 학생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보다 넓은 공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적합한 학교 설립 장소로 선택된 곳이 바로 합니하였다. 1912년 7월 천연의 요새인 합니하에서 낙성식을 거행한 신흥무관학교는 군사훈련과 중등교육과정을 가르칠 수 있는 시설을 갖춘 학교였다.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설립비용은 고종 때 영의정이었던 이유원의 양자인 이석영이 부담했다. 합니하 신흥무관학교는 요새지로서 군사훈련이 더없이 적합한 곳이었다. 학교 소재지는 광화에서 남쪽으로 3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큰 병영사가 세워졌고 각 학년별로 널찍한 강당과 교무실이 있었으며, 내무반 내부에는 사무실, 숙직실, 편집실, 식당 등이 갖추어졌고, 낭하에는 총가가 설치되었다. 교사로는 여준, 김창환 등이 활동하였다. 당시 생도는 100여 명이었으며, 졸업생도 한기에 수십 명씩 배출하였다. 졸업생들은 자체적으로 재학생과 함께 신흥학우보를 제작하여 전 세계에 자신들의 존재를 알렸다. 지금 남아 있는 신흥학우보가 미국에서 발굴되었음이 이를 증명한다.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중등과정은 3년이 기한이었고, 군사과는 1년 과정이었다. 신흥무관학교는 군사교육훈련에서 기존 사관학교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주로 대한제국육군무관학교 출신들이 교관을 담당하였으며 기본 교육과정은 대한제국기와 비슷했다. 술과로는 각개 훈련과 기초훈련, 체육을 중시했다. 신흥무관학교에서는 군사시설과 무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훈련을 받을 수밖에 없어 더욱더 도수훈련과 체력단련, 야간 강행군 등의 훈련을 실시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인 원병상의 일기에 나타난 고된 일과를 보면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의 조국애가 얼마나 위대한지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100년이 지난 신흥무관학교 터는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차는 합니하를 따라 지금도 고려관자로 불리는 마을에 들어섰다. 오전 10시 정도 되었지만 여름 해는 레이저 광선을 쏘듯 우리 일행의 머리 위에서 강렬함을 뽐내고 있었다. 마을에는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신흥무관학교 터라는 표식도 흔적도 없지만 이곳이 신흥무관학교라는 시간의 흔적은 지명에서도 찾을 수 있다. 바로 ‘고려관자’가 그것이다.


한족들만이 거주하는 이곳. 중국인들이 지금도 부르고 있는 이름. 원래 이곳에 합니하 신흥무관학교가 있었다는 것을 찾기 위해서 일행은 합니하가 휘돌아가는 낭떠러지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천연의 요새처럼 합니하는 해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마을 곳곳에서는 낯선이들을 경계하는 개 짖는 소리가 요란했다. 옥수수밭이 마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듯하다. 조선족들은 한 명도 살지 않는다. 가볍게 부는 바람이 옥수수 잎을 살짝 스치고 지나간다. 이곳에서 신흥무관학교 생도였던 원병상의 기운을 살짝 느껴보자.


05. 광화진 신흥무관학교 터 2차 추정지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

새벽 6시에 기상나팔 소리 ‘또 - 또 – 따’ 잠든 생도들의 귓전을 울리면서 각 내무반의 생도들은 일제히 일어나 신변 환경을 정리하고 3분 이내에 복장을 단정히 하고 각반 치고 검사장에 뛰어나가 인원 점검을 받은 다음 보건 체조를 한다. 눈바람이 살을 도리는 듯한 혹한에 아침마다 윤기섭 교감이 초모자를 쓰고 홑옷 입고 나와서 점검하고 체조를 시키면서도 그 활기찬 목소리에 그 늠름한 기상과 뜨거운 정성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이 체조가 끝나고 청소와 세면을 마치면 각 내무반별로 취식 나팔 소리에 따라 식탁에 나가 둘러앉는다.


과연 그들에게 조국은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안락하게 살고 있는 현재의 모습을 보면 과연 그들은 무슨 말을 할까.

이들이 식탁에서 먹고 있는 주식은 중국인들이 창고에서 수년간 보관하고 있던 좁쌀로 만든 밥이었다. 꺼칠한 좁쌀밥과 반찬이라고는 콩장밖에 없었던 당시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의 식생활이 과연 현재 우리에게 강렬하게 다가올까. 과연 그들에게 조국은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안락하게 살고 있는 현재의 모습을 보면 과연 그들은 무슨 말을 할까. “참 좋은 세상이다” 아니면 “후대에게 잘 물려주어라”. 글쎄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역사의 거대한 대양에서 길을 잃지 않고 잘 가고 있는지, 선장의 항해기술과 선원들의 감동 어린 항해가 다시 역사에도 기록되기를 바랄 뿐이다.



글. 김주용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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