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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세상이 알아주거나 몰라보거나 하는 일이 유독 산의 경우에만 그러하겠는가!
글쓴이 tntv 등록일 [2019.07.07]

세상이 알아주거나 몰라보거나 하는 일이 유독 산의 경우에만 그러하겠는가! 이이 「유청학산기」사방은 모두 돌산이 솟아 있고 푸른 측백나무와 키 작은 소나무가 그 틈새를 기워 누비고 있다. 두 병풍 같은 산 사이로 시냇물이 아주 멀리에서 흘러와서 격렬한 기세로 폭포를 이루어, 맑은 하늘의 우레가 골짝을 뒤흔들며, 고여서는 못을 이루어서, 차가운 거울에 한 점 흠도 없어, 깊고 맑고 반짝이며 푸르러, 낙엽도 붙지 못하고, 휘휘 흐르고 굽이굽이 돌아나가, 바위의 형상이 천 가지 만 가지로 바뀐다. 산그늘과 나무 그림자에 이내의 기운이 섞어, 아슴프레하여 햇빛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흰 바위 위를 거닐며, 맑은 물살을 가지고 놀았다. (중략) 저 오대산이나 두타산은 여기에 비유하면 풍격이 떨어지거늘, 그런데도 아름다운 이름을 떨치고 있어, 관람하는 자가 끊이지 않는데, 이 산은 중첩된 봉우리와 골짝 속에 그 광휘를 감추고 숨겨두어 그 영역에 끼어드는 사람조차 없었으니, 하물며 그 웅성 깊은 곳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이이의 청학산기행

이 글은 율곡 이이가 지은 「유청학산기(遊靑鶴山記)」의일부이다. 조선시대 기행문 선집 『와유록(臥遊錄)』에도 수록되었다. 청학산은 오늘날 오대산국립공원의 일부인 강릉 소금강을 말한다.


1568년(선조 1) 여름 이이는 천추사(千秋使) 목첨(睦詹)의 서장관이 되어 북경에 갔다가 겨울에 돌아와 부교리가 되었다. 그리고 우수한 문신들에게 학문을 연마하는 기회를 부여하기 위해 말미를 주어 독서하게 하는 사가독서(賜暇讀書)의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11월에는 이조 좌랑에 제수되었다. 서른세 살의 이이는 여가를 갖고 싶었다. 마침 외조모 용인 이씨가 병환 중이었으므로 그 간병을 위해 사직하고 강원도 강릉으로 떠났다. 용인 이씨는 신사임당의 어머니로, 이사온(李思溫)의 딸이다.

한송정이나 경포대 같은 바닷가의 명승이 아니라 계곡 속의 그윽한 곳을 탐방하러 떠났다.

이듬해 1569년 4월 14일, 강릉에 있던 이이는 아우 위(瑋), 서외숙 권(權)씨. 박유(朴宥), 장여필(張汝弼) 등과 함께, 한송정이나 경포대 같은 바닷가의 명승이 아니라 계곡 속의 그윽한 곳을 탐방하러 떠났다. 권신(權愼)은 나중에 합류했다. 이이의 아우 위는 이름을 뒤에 우(瑀, 1542~1609)로 바꾼다. 시와 글씨, 그림에 거문고에도 뛰어나 ‘사절(四絶)’이라 칭송받았던 인물이다. 이이의 서모 권씨는, 『명종실록』에 의하면, 이이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래도 이이는 서모의 집안 사람들과도 가까이 지낸 듯하다. 서외숙 권씨는 바다에 무진정(無盡亭)이라는 정자를 가지고 있었다. 권신도 서모의 집안사람인 듯하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장여필(1534~?)은 본관이 부안인데, 강릉에 거주하였다. 1567년(선조 즉위년)에 생원이 되었다.


4월 14일 이이는 아우와 함께 권씨의 무진정에서 뱃놀이를 했는데, 장여필이 거기에 합류했다. 4월 15일 말을 타고 출발해서 백운천(白雲遷)을 지나 토곡(兔谷) 어구에서 서쪽으로 향했다. 이때 박유가 뒤따라 왔다. 모래밭에서 식사하고 곡연(曲淵)에 이르고, 두 고개를 넘어 30여 리를 갔다. 들판이 3, 4리에 걸쳐 있고, 한 초가집이 있었으며, 5리쯤 가서 승사(암자)에서 쉬었다. 부근의 폭포를 보고 그 못을 창운담(漲雲潭)이라고 이름 지었다. 승려 지정(智正)에게 물으니, 서쪽으로 4리쯤 관음천(觀音遷)이 있고, 그 서쪽에 석문(石門)이 있으며, 석문 안에 식당담(食堂巖)이 있고, 식당암 서쪽에 산성이 있으며, 다시 5리쯤 가면 석봉이 셋 있고 봉우리에 청학의 둥지가 있다고 했다.


4월 16일, 지팡이를 짚고 승려 지정과 산지기의 안내로 나아가, 관음천을 거쳐 석문에 이르렀다. 넓은 바위에서 쉬면서 앞에 보이는 높은 봉우리를 촉운봉(矗雲峯)이라 이름하고, 식당암은 비선암(祕仙巖)으로 고쳤다. 계곡은 천유동(天遊洞)이라 하고, 식당암 아래 못은 경담(鏡潭)이라 하였으며, 산 전체를 청학산이라 하였다. 비가 올 것 같아 산성에 오르지는 못하고 돌아 나왔다. 승사 부근의 너럭바위에서 점심을 먹고 산을 나가 토곡에 이르렀다. 권신이 술을 가지고 와서 층암에서 마시면서, 바위 곁의 폭포를 취선암(醉仙巖)이라 명명하였다. 저물녘에 무진정으로 돌아왔다.

01. 오대산 국립공원 동쪽 지구에 자리한 청학동 소금강계곡은 기암들의 모습이 작은 금강산을 보는 듯 하다고 하여 소금강이라 부르게 되었다. 02. 노인봉, 만물상 방향과 구룡폭포 방향으로 나뉘는 갈림길 03. 등산길 어귀마다 누군가 소원을 담아 쌓아놓은 돌탑이 있다.

명승을 만나 이름을 지어주다

이이의 글은 비장의 명승을 처음으로 발견하여 이름을 짓는다는 사실을 안점(眼點)으로 하였다. 안점은 글이 목표로 하는 궁극의 취지이다. 명승을 처음 발견하여 이름 짓는 행위는, 재야에 버려져 있던 인재를 발견함을 비유한다. 산수 경관은 그나마 누군가에 의하여 그 이름이 드러나지만, 현실 세상에서는 인재들이 요로(要路)의 지기를 만나 스스로의 뜻을 펼치는 일이 가능한가? 인재가 한 사람이라도 버려져 있다면 그것은 현실 정치가 혼란하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징표이다. 동양 정치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용인(用人)’ 곧 사람을 제대로 쓰는 일이었다. 사람을 제대로 쓰려면 사람을 추천할 지위에 있는 사람이 ‘지인(知人)’의 감각이 있어야 한다. 사람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사람을 제대로 쓴다면 백성들이 편안하게 생업에 힘써 나라가 화평한 결과를 가져오므로, 사람을 제대로 쓰는 일은 ‘애인(愛人)’ 즉 사람을 사랑함으로 귀결된다. 다시 말해 ‘사람을 앎’은 ‘사람을 씀’의 과정을 통해 ‘사람을 사랑함’으로 나아간다.


큰 인물은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큰 의미를 부여한다고 했다. 산수 유람의 걸음걸음에서도 이이는 그러한 원론적인 정치론을반추한 것이다



『논어』 「안연(顏淵)」에 보면 번지라는 제자가 공자에게 인(仁)에 대해 묻자 공자는 ‘사람을 사랑함’이라고 대답하고, 번지가 지(知)에 대해 묻자 공자는 ‘사람을 앎’이라고 대답했다. 『서경』의 「고요모(皐陶謨)」에서는 “사람을 알면 명철하여 훌륭한 사람을 벼슬시키며 백성을 편안히 하면 은혜로워 모든 백성들이 그리워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동양정치론의 가장 핵심인 지인(知人)-관인(官人)-안민(安民)의 상관 논리이다.


큰 인물은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큰 의미를 부여한다고 했다. 산수 유람의 걸음걸음에서도 이이는 그러한 원론적인 정치론을 반추한 것이다.


물론 산수가 버려져 있느냐 알려지느냐 하는 것을 인재의 우불우(遇不遇)의 문제와 연관시킨 것은 이이가 처음은 아니다. 이미 중당 때 유종원(柳宗元, 773~819)이 호남성(후난성) 영주(永州)에 10년간 유배되어 있 는 동안에 「영주팔기(永州八記)」라는 8편의 유람기를 지어 그 점을 처음으로 부각시켰다. 이이는 그 주제를 처음부터 드러내려고 안달하지 않는다. 전해 들어서 알고 있었던 곳을 실제로 답파하는 즐거움을 노래 하면서 마지막에 그러한 주제를 살짝 띄운 것이다. 이이는 박유로부터 청학이 깃들어 산다는 바위봉우리에 관한 말을 듣고 그곳을 탐방하려고 결심했다. 그런데 박유도 그곳을 직접 가서 본 것은 아니었다. 박유는 장여필에게서 들었을 따름이었다. 전해 들은 곳을 답파한다는 것은 여간한 결단이 아니다.


04. 연화담과 구룡폭포 사이에 위치 한 금강사 05. 등산로 입구에 서 있는 ‘명주 청학동 소금강’ 표지석 06. 청학동 소금강계곡 중간 3km 구간에 9개의 크고 작은 폭포가 연이어져 있고 구룡호에서 나온 아홉 마리의 용이 폭포 하나씩을 차지하였다고 하여 구룡폭포라 한다

이 글은 명명을 중시한다. 기존에 이름이 알려져 있는 경승에 대해서는 하나하나 그 이름을 확인하고 실상과 대조했다. 이름과 실상이 부합하지 않는다면 그 명명은 잘못이다. 이이는 ‘청학’이라는 명명이 실상에 부합한다는 점을 설득시키기 위해, 청(靑)과 학(鶴)의 글자들이 들어간 사물과 지명에 대해 형형한 시선을 보냈다. 이이는 청학산 유람에서 정신적인 위안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해 6월에는 교리의 직함을 띠고 조정으로 돌아왔다. 9월에는 독서당에 있으면서 저 유명한「동호문답(東湖問答)」을 지어 선조에게 올렸다. 그런데 명종 연간의 을사사화로 공신이 되어 있었던 인물들의 훈공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때문에 물의가 일어났다. 10월에는 휴가를 얻어 다시 강릉으로 갔는데, 이때 외조모의 상을 당하고 말았다.


이이는 오대산이나 두타산도 청학산에 비유하면 그 품격이 낮다고 평했다. 그런데 오늘날 오대산과 두타산은 제 이름을 떨치고 있거늘, 청학산은 그 본래 이름이 잊혀지고 금강산의 아류가 되고 말았다. 이 또한 운명인가.



글. 심경호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사진. 이민희
출처:월간 문화재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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