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태어나서 입신양명을 이룬다면 왕족이 아닌 이상 정승판서가 그 정점이다. 말이 쉬워 정승판서로 심지어 각설이 타령에도 등장하고 있지만,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고 그 자리에 오르기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정승판서를 지낸 조상을 둔 후손들은 집안 대대로 이를 자랑스러워하며 기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시대 판서가 여덟이 살았다는 종로구 삼청동 부근 팔판동은 양택의 자리로 더할 나위 없는 곳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 반대로 아홉의 정승 묘소가 모셔진 양평군 양서면 자락의 구정승골 또한 풍수적 요소를 찾아보려는 수많은 풍수지리 학인(學人)은 물론 문화유산 탐방객이나 역사학도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곳이다.
이곳은 좌정승 김사형(金士衡)을 비롯하여 증좌의정 신효창, 증우의정 이종억, 증영의정 이민성, 영의정 이덕형, 증영의정 이수정, 영의정 이준경, 영의정 정창손, 좌의정 민희와 대제학 민점, 우의정 민암 형제 등의 묘소가 모셔진 곳이다. 실제로 세다보면 9정승이 아니라 10정승도 넘어간다. 이는 최근 들어 이곳으로 이장(移葬)한 분도 계시거니와 굳이 아홉이냐 열이냐를 따지기 보다는 그만큼 많은 고관대작의 음택이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해석해본다.
지도에서 찾아본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일대. 두물머리에서 합수(合水)되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곳의 내륙이다. 옛날에는 배를 타고 다니는 수상교통이 오히려 편리한 곳으로 한양에서 그다지 험지(險地)로 꼽히는 곳도 아닌 듯하다.
풍수지리는 문외한인지라 양평군 양서면 자락이 왜 이렇게 손꼽히는 음택(陰宅)의 명당이 되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지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곳은 북한강과 남한강이 흐르다 만나면서 모이는 두물머리를 앞에 두고 있다. 그러다보니 동에서 서로 내달리던 지맥(支脈)이 이쯤에서 큰물에 막혀 멈칫거리면서 멈추고 치솟게 마련인데, 그 가운데에서도 양서면 산자락은 의외로 아늑한 포란(抱卵)형으로 혈과 맥을 포근하게 감싸는 형국이니 그래서 명당이 아닌가싶다.
좌정승(左政丞) 익원공(翼元公) 김사형(金士衡)
안동 김씨 중시조 김방경(金方慶)의 현손(玄孫)으로 자는 평보(平甫), 호는 낙포(洛圃). 시호는 익원(翼元)이다. 공민왕 때 조준(趙浚) 등과 함께 대간을 지냈다. 이후 공은 조준과 좌우정승을 함께 하며 고려 말부터 조선 건국초기까지 나라를 운영하는 중책을 수행하면서도 단한번의 탄핵도 받지 않을 만큼 정적을 만들거나 파당에 치우치지 않았다.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 개국공신이 되었으며, 왕자의 난을 거쳐 정종 즉위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에 책록되었다.(이성계와는 친분도 있었고, 처음에는 추대하는데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나 16인의 개국 1등 공신에 포함된 것은 조선개국에 지대한 역할과 공로가 있음을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
익원공(翼元公) 김사형(金士衡) 영정. 안동김씨 문중 익원공파(翼元公派)의 파조(派祖)가 된다.
공은 또한 문신이었으나, 태조 5년(1396)에 대마도 정벌에 나서 대마도와 이키섬을 정벌하였다. 이는 공양왕 때의 박위 장군에 이어 두 번째 대마도 정벌이었다. 이후 세종 때 이종무 장군의 정벌 등 모두 세 번에 걸친 대마도 정벌 역사가 있었으나, 이종무 장군의 대마도 정벌만 알려졌을 뿐 그 전에 있던 두 번의 정벌은 그 과정과 결과가 잘 알려지지 않아 많이 아쉬운 부분이다.
별개로 정승에 재직하는 동안 조준(趙浚)의 의견에 따르며 그를 지원했을 뿐이라는 일부 기록이 있다. 이에 대하여 고전번역에 조예가 깊은 이한우 씨는 조선왕조실록을 근거로 '정도전을 뛰어넘은 행정의 달인 김사형'이라는 글에서 아래와 같이 기술하였다.
조선 초 정승을 열거할 때 조준(趙浚), 하륜(河崙)은 알아도 김사형(金士衡)을 아는 이는 드물다. 그러나 태조 정권 내내 최고의 실권자인 좌의정 또는 좌정승이 조준이었다면, 그와 보조를 맞춰 내내 우의정 혹은 우정승으로 있던 이가 김사형이다.
흔히 3정승이라고 한다면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인데 일반적으로 셋 중에서 가장 힘이 센 실력자는 영의정이 아니라 좌의정이다. 시대에 따라 혹은 임금에 따라 아주 드물게 영의정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는 하지만 실권은 좌의정에게 있었던 것이 조선시대 대부분의 시기이다. 따라서 그 시대의 정치를 살필 때 좌의정이 누구인지부터 살피는 것은 필수적이라 하겠다.
김사형(金士衡 1341~1407)은 고려 때의 명 장군이자 충신으로 문무(文武)를 함께 갖췄던 재상 김방경(金方慶)의 현손으로 여말선초의 명문세가 출신이다. 사형은 공민왕 때에 문과에 제하여 조준과 함께 대간을 지냈다. 이때 맺은 교분으로 그의 정치노선은 단 한 번도 조준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그저 조준을 섬긴 때문이 아니라 조준의 노선이 옳다는 굳은 믿음 때문이었다.
1407년(태종7) 7월 30일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실록은 그의 인품을 이렇게 평하고 있다.
"깊고 침착하여 지혜가 있었고, 조용하고 중후하여 말이 적었으며 속으로 남에게 숨기는 것이 없고, 밖으로 남에게 모나는 것이 없었다. 재산을 경영하지 않고 성색(盛色)을 좋아하지 않아서 처음 벼슬 할 때부터 운명할 때 까지 한번도 탄핵을 당하지 않았으니 시작도 잘하고 마지막을 좋게 마친 것(善始令終)이 이와 비교할 이가 드물다“
그는 무엇보다 관리로서의 능력(史才)이 출중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역사가들의 맹점은 이처럼 이재(吏才)가 뛰어났던 경세가들을 소홀히 한다. 그저 책이라도 남기면 그것을 갖고 일방적으로 높이는 경향을 보인다. 학재(學才)만 높이는 편향성 때문이라 하지 않을수 없다.
그러다보니 황희나 김사형처럼 행정실무 능력이 특출 나 백성들에게 큰 혜택을 베푼 이들에 대한 평가는 인색하다. 그들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서 하나 찾아보기 힘든 것이 그 반증이다. (中略)
탁월한 실무능력과 분수를 아는 처신은 그를 우정승에 그치게 하지 않았다. 조준과 김사형의 관계를 실록은 이렇게 압축해서 정리하고 있다. "조준은 강직하고 과감하여 거리낌 없이 국정을 전단(專斷)하고, 김사형은 관대하고 간요한 것으로 이를 보충하여 앉아서 묘당(廟堂)을 진압했다." 흔히 말하는 환상의 콤비였던 셈이다. 태종 초에는 드디어 좌정승에 오른다. 이미 왕권 중심의 정치를 구상하고 있던 태종으로서는 모든 것이 불안정할 때 김사형의 지혜가 필요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1년 반 만에 태종의 최측근인 하륜에게 좌정승 자리를 넘긴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07호 김사형(金士衡) 묘, 명당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곳이다. 혈은 등을 걸어 놓은 것과 같고 좌청룡 우백호는 등불이 바람에 흔들리지 않도록 쳐놓은 병풍과 같으니 만인에 빛을 밝혀 어둠을 몰아내는 형상이어서 그 불빛이 자손만대를 밝혀주니 명예가 가득하고 후손 대대로 귀인과 현자가 끊이지 않겠다.(영남대 지리풍속학 교수 남우정 記) 봉분은 일견 둥글게 보이나 육각에 가까운 모습인바, 3단으로 쌓아올린 호석의 장대석이 교차로 꺾인 탓이다. 전형적인 방형(네모)의 고려 말 봉분에서 원형의 조선으로 넘어가는 시기적인 특징과 함께 고관대작의 묘석(墓石)에서 볼 수 있는 호석을 1~2단이 아닌 3단까지 쌓아 올린 것은 좌정승의 귀한 처지에 부합되는 음택 꾸밈인 듯하다. 봉분 앞은 상계, 중계, 하계로 나누어 상계에는 봉분과 상석을, 중계에는 좌우로 문인석이 시립하였으며 중앙에 장명등을 세웠는데 한 눈에도 고려양식의 큼직한 석등 모습이 귀인(貴人)이 계신 곳임을 드러낸다. 하계에는 묘비석을 좌우로 세워 장엄하게 하였다.
태조부터 태종 때까지는 조선을 창업(創業)하고 수성(守城)해야 하는 험난한 시기다. 난세를 척결하는 영웅이나 선봉에서 정적(政敵)을 제거하는 공신도 필요하지만,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백성을 향한 민생정치의 세심한 부분을 챙기는 숙달된 행정가가 절실하게 필요하였을 터이다. 그중 익원공 김사형은 명실상부한 내치(內治)의 전권을 행사하며 왕조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였다. 조선 창업이라는 역사의 한 페이지에 뚜렷이 기록되었음에도 세인들에게 알려지기는 덜한 듯 하여 조금은 아쉽던 차에 이렇게 계속 행적을 발굴해내는 사가(史家)들이 있어 다행이다.
공은 태종 즉위 후 좌정승에 올랐으며 특히 태종 2년(1402)에는 이무, 이회와 함께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 지도이자 동양 유일의 세계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를 만드셨다. 안타깝게도 원본은 미국에, 사본은 일본에 분산되어 있고 우리나라는 겨우 모사본을 갖고 있다.
역대제왕혼일강리도(歷代帝王混一疆理圖)라고도 부르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 혼일(混一)은 통일이라는 의미를 지니며 개국(開國)을 뜻하기도 한다. 강리(疆理)는 영토, 땅을 의미하며 역대국도(歷代國都)는 역대 중국 제왕의 도성(수도)을 말하니 지도에서 붉은 점이 그것이다. 현존하는 동양최고의 세계지도로 조선이 실제보다 매우 크게 그려져 있는데 당시 세계의 중심이던 중국을 위주로 하던 관습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의지의 표현으로 보인다. 놀라운 것은 중국 서쪽에 유럽과 아랍, 아프리카까지 그려 넣고, 상세한 지명까지 기입했다. 이처럼 대단한 고지도가 정작 우리나라에는 원본이나 사본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마음 아프다.
문무(文武)를 겸비한 학자라는 일견 평범한 호칭에서 벗어나 이토록 엄청난 결과물을 남긴 것은 조선의 과학과 인문지리의 뛰어남을 보여주는 쾌거일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역사적인 일이다. 미국의 세계사 교과서에 우리나라 석굴암과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등 우리나라의 독창적인 문화에 대한 내용이 실린다고 하니 위 지도의 업적이 참으로 대단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조선일보 2017. 7. 28일자 온라인판)
익원공 김사형(金士衡) 재실 낙포재(洛圃齋). 묘소 아래 있으며 불천위로 모신 부조묘(不祧廟)는 전북 고창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