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에서 ‘선비’를 찾아보면 ①‘학식은 있으나 벼슬하지 않은 사람을 이르던 말’이라고 나온다. ③은 ‘학식이 있고 행동과 예절이 바르며 의리와 원칙을 지키고 관직과 재물을 탐내지 않는 고결한 인품을 지닌 사람을 이르는 말’이라고 돼 있다. 벼슬이란 곧 권력이고 힘이며 명예인데, 이런 욕심도 없는 게 선비란다. 게다가 학식과 인품까지 갖추란다. 해서 선비란 웬만큼 공부하고 노력해서는 달성하기 힘든 ‘자리’이며 ‘위상’이다. 유교사회에서 사람이 궁극적으로 달성해야 할 목표 같은 것이다.

경북 안동을 선비의 고장이라고 한다. 이 말은 행세깨나 했다는 벼슬아치가 많아서가 아니다. 의(義)와 예(禮)를 쌓는 것은 기본이고, 때로는 자신의 생명까지 던지며 헌신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 선비의 도시 

안동의 선비들은 손에 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 그중에서도 늘 꼽히는 선비라면, 학문의 깊이로는 퇴계 이황이요, 한 나라를 위기에서 구출한 정치가로 치자면 서애 류성룡이다. 또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 선비라면 학봉 김성일과 그 후손들을 들 수 있겠다. 서애와 학봉은 퇴계의 제자이기도 하다.

‘도산서원’을 찾아갔다. 안동에서 태어난 퇴계는 1534년 문과에 급제해 예조판서, 우찬성, 대제학 등을 지냈으나 20여차례나 벼슬을 사양하겠다고 임금에게 사정했다. 모든 관직을 내려놓고 61세 때 고향으로 내려와 세운 곳이 도산서당이다. 도산서원은 퇴계가 세상을 떠난 후 제자들이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증축했다. 

“퇴계 하면 조선시대 학식 높고 근엄한 대학자로만 알고 있지요. 평생 자신을 낮추고 검박하게 살아가신 선비입니다. 배려와 섬김으로 아는 것을 실천한 지행일치(知行一致)에 퇴계의 선비정신이 있습니다.” 김종길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장(76)은 “퇴계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모든 생명을 귀히 여겼다”며 “청렴과 청빈, 겸손과 절제를 끝까지 보여준 선비 중의 선비”라고 말했다. 도산서원 들머리는 걷기 좋은 고즈넉한 길이다. 서원 안으로 들어서자 퇴계가 살아생전 인재를 길러내던 도산서당이 보였다. 방과 마루는 평범하고 작았다. 마루 끝에 걸터앉으니 새소리, 풀벌레 소리가 들린다. 앞마당에 자그마한 연못이 있다. 퇴계는 못의 연꽃을 두고 “흙탕에 살면서도 몸을 더럽히지 아니하고 속은 비고 줄기는 곧아 남을 의지하지 않으며 향기는 멀수록 맑다”는 글을 남겼다. 도산서원은 절반 이상이 퇴계 사후 지어졌다. ‘도산서원’ 현판 글씨는 명필 한석봉의 것이다. 

퇴계종택에서 만난 16대 종손 이근필옹(85)에게 “만약 퇴계가 살아 계신다면 요즘 세상을 어떻게 보실까요”라고 물었다. 이옹은 아무 말 없이 편지봉투를 내밀었다. 친필로 ‘의재정아(義在正我)’라는 글이 쓰여 있다. ‘의리는 나를 바르게 하는 데 있다’는 의미다. 안동시청 김은정씨(40)는 “퇴계는 나라에서 하사하는 예장(국장)을 사양하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는 유서를 남길 정도로 청빈했다”고 말했다. 퇴계 막내손자 이영도의 후손 이재영옹(84)은 “안동은 조선 말 서원철폐령이 내려지기 전 사립학교 서원이 300여개나 있었고, 지금도 67개나 남아 있다”고 했다. 

하회마을에 가면 류성룡의 종택인 충효당이 있다. 여행자들은 “꽤 크고 기품이 있는 집”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이 집 또한 서애의 사후에 지어졌다. 그의 인격을 흠모하던 후학과 자손들이 돈을 모아 하나둘 더해 지은 집이다. 

서애는 임진왜란이 터지자 전국 각처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게 했다. 영의정으로 나라를 이끌었다. 하지만 일본과의 화친을 주도했다는 누명을 쓰고 영의정에서 파직됐다. 후에 다시 왕이 불렀으나 거절하고 쓴 책이 <징비록>이다. 말년에 초가에 머물던 류성룡은 “사람들이 이욕(利慾)에 빠져 염치를 잃어버리는 것은 모두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이라며 후학들에게 청렴의 중요성을 가르쳤단다.

■ 독립운동가의 도시 

“안동의 선비정신은 1900년대 초 일제강점기에 빛을 발했습니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고 357명이나 서훈을 받은 고장입니다.” 안동시청 서철호 팀장(54)의 말이다. 맞다. 근현대를 이야기할 때 안동을 빼놓을 수 없다. 안동 내앞마을에는 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이 있다. 원래 안동 독립운동기념관이었으나 3년 전 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으로 승격됐다. 안동에서만 1035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경북은 2130명. 나라 전체를 보면 1만4651명이 등록돼 있다.

내앞마을은 바로 의성 김씨가 모여 살던 곳이다. 학봉의 후손들이다. 내앞에 독립운동기념관이 온 것은 상징적인 뜻이 있다. 먼저 옛 역사를 보고, 후대로 넘어오자. 일본에 통신사로 갔다가 돌아온 학봉은 왜군의 침략이 없을 것이라고 조정에 보고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장 곽재우, 진주목사 김시민 등을 도와 끝까지 항전했다. 학봉 문중은 “사법부인 금부도사가 찾아오지 않으면 선비집안이 아니다”란 말을 가훈으로 삼았다고 한다. 쉽게 말하면 목숨을 걸고 직언하란 의미다. 그런 절개 때문인지 일제강점기 후손들은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가장 유명한 일화가 학봉의 13대손 김용환이다. 생전에 그는 투전판을 돌아다니면서 대대로 내려온 재산을 다 날려먹은 것으로 돼 있다. 고명딸을 시집보낼 때 세간살이도 제대로 챙겨주지 않을 정도였다. 한데 1946년 세상을 떠나면서 그가 재산을 탕진한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에 쏟아부은 것이 알려졌다. 딸 장롱 값까지 바쳤다. 이 집안의 독립유공자는 무려 18명이나 된다. 

내앞 출신 김동삼 선생은 류인식, 김병식과 함께 협동학교를 세우고 일제에 저항하다 만주로 건너가 항일투쟁을 벌였다. 문중 차원에서 독립운동을 한 곳은 예안의 하계마을도 있다. 이 마을에서는 의병대장과 독립운동가가 3명이나 배출됐다.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고성 이씨 이상룡의 도곡마을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위패를 땅에 묻은 뒤 모든 재산을 들고 만주로 떠났지만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이국땅에 잠들어야 했다. 그의 본가를 찾았을 때 그런 비장함이 느껴졌다. 권오설·오직 형제를 비롯해 권준희, 권오상, 권오윤, 권오창 등을 배출한 가일마을도 유명하다. 봉화 등 안동권으로 넓혀보면 항일투사는 더 많다. 봉화에서는 심산 김창숙의 주도하에 전국 유림대표 137명이 연서한 ‘파리장서 운동’에 9명이나 이름을 올렸다. 

퇴계 14대손인 이육사는 일제강점기 17차례 옥살이를 하고 마흔의 나이에 일본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이육사의 시 ‘광야’) 벼슬 높은 게 선비가 아니다. 선비란 버릴 줄 알아야 한다. 설사 그게 목숨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