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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조선왕조실록과 난중일기에 실려 있는 한산도대첩의 경과
글쓴이 tntv 등록일 [2016.10.05]




임진왜란 결정지은 이 전투, 만약 졌다면... 결과 참혹

조선왕조실록과 난중일기에 실려 있는 한산도대첩의 경과
16.09.26 15:55l최종 업데이트 16.09.26 15:55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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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중심부 용궁시장의 풍경. 일본군은 부산 상륙 이래 한양에 이를 때까지 모든 지역에서 승전을 기록했지만 이곳 용궁현에서만은 승리하지 못했다. 이 일로 용궁현감 우복룡은 선조로부터 벼슬이 가자(높여짐)되는 영광을 누렸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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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선조 25) 4월 13일 임진왜란 발발 이후, 조선군은 연전연패했다. 전쟁이 시작되고 한 달이 지나도록 <선조실록>에는 승리를 뜻하는 '승(勝)' 또는 '첩(捷)'이라는 글자가 나오지 않는다.

긍정적 전투 기록은 5월 15일에야 처음 등장한다. 이날 비변사는 선조에게 "용궁(경북 예천군 용궁면)현감 우복룡(禹伏龍)은 여러 고을이 무너질 때 유일하게 자기 고을을 지켰을 뿐 아니라 나가서 싸우기까지 하였으니 그 공로가 적지 않습니다, 특별히 크게 가자(加資, 벼슬의 등급을 올림)하여 다른 사람들의 모범을 삼으소서" 하고 건의한다. 선조가 허락한다.

하지만 우복룡 기사는 승전 기록까지는 아니다. 기사는, 다른 고을들이 모두 적의 손에 넘어갔는데도 우복룡은 빼앗기지 않았고, 지키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적과 맞서 싸우기도 했으므로 공로가 적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이기지는 못했지만 지지도 않았다는 뜻이다. 비변사의 의견은, 줄곧 패전 소식만 들려오던 때에 패하지 않았고, 고을을 빼앗기지도 않았으며, 수비만 한 것이 아니라 나아가 싸우기도 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우복룡은 공을 세웠으므로 상을 주어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자는 제안인 것이다.

용궁현감 우복룡의 선전 기사를 읽으면 '얼마나 속이 탔으면 비변사와 임금이 이런 대화를 주고받았을까' 싶어져, 실록을 대하는 후대 사람의 마음속에 뜨거운 안타까움이 피어오른다.

실록에 실린 '임진왜란 최초의 승전' 기사는 해유령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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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리 한산도 선착장에 도착한 여객선이 보이는 풍경. 선착장에서부터 대첩문까지 바닷가 아름다운 평지 길이 이어진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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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승전 기록은 용궁현 기사보다 닷새 뒤인 5월 20일자 <선조실록>에 나온다. 이날 비변사는 "해유령(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연곡리) 싸움의 승리에 대한 논공행상은 마땅히 그 주장(主將, 최고 지휘관)이 등급을 문서로 보고한 뒤라야 시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돌격장 인천부사 이시언(李時言)은 지난번 장수원(의정부시 호원동) 싸움에서 힘껏 싸워 진을 뚫었었는데, 이번에 또 먼저 성벽에 올라가 적병을 3명이나 죽였으니, 우선 당상관(정3품)에 특별히 가자하시어 싸움에 나간 병사들의 사기를 격려하소서" 하고 선조에게 아뢴다. 물론 선조는 이에 동의한다. 

해유령 전투에 이어 등장하는 승전 소식은 <선조실록> 1592년 5월 22일자에 실려 있는 강원도 조방장 원호(元豪)의 기사이다. 이날 비변사는 "원호는 여주 싸움에서 심상치 않은 승리를 거둔 듯하지만 왜적의 머리를 베지 못하고 왜적의 물건만 올려보냈으니, 가짜로 꾸민 일은 아닐지라도 일일이 시상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조방(助防, 병마사를 도와서 지킴)하라는 명을 받고 이렇게 승리 소식을 보고해 왔으니 그의 마음을 서운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성상께서 짐작해서 상을 내리소서" 하고 선조에게 말한다. 그러자 선조는 "아뢴대로 하라, 원호에게 가자하라" 하고 답변한다.

세 번째 승전 기사의 주인공은 이순신이다. 1592년 5월 23일자 <선조실록>은 '전라수사 이순신이 수군을 동원해서 경상도까지 깊숙이 들어가 적선 40여 척을 격파하고 왜적의 머리를 베었으며, 빼앗겼던 물건을 되찾은 것이 매우 많았다, 비변사가 상을 내릴 것을 청하니, 상이 가자하라고 명했다'라고 증언한다. 날짜와 파괴 적선의 숫자로 볼 때 이 내용은 5월 7일의 옥포(거제시 옥포동) 승전(적선 26척 격침), 옥포 승전과 같은 날 이루어진 합포(창원시 산호동) 승전(5척 격침), 그 다음날인 5월 8일의 적진포(고성군 거류면) 승전(11척 격침)을 아우른 기록으로 보인다. 

6월 11일자 실록에는 '좌의정 윤두수, 이조판서 이원익 등이 김진(金珍)에게 강변의 토병(土兵, 지방의 군사) 백여 명을 인솔하고 강을 건너가 왜적의 군영을 치게 하였다'면서, 이때 '적군들이 한창 자고 있었다, 김진 등이 수백여 명을 사살하고 말 133필을 빼앗아 돌아오던 중 (마중 나간) 배가 한꺼번에 도착하지 않는 바람에 토병 30여 명이 왜적에게 추격당해 빠져 죽었다'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승전했다는 것인지 패전했다는 것인지 애매한 기사인데, 김진에게 상을 준 기록은 6월 22일자 실록에 나온다.

왜적 한 명 죽인 것까지 임금에게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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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루는 적들의 동태를 살필 수 있도록 높은 곳에 세운 누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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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인 6월 12일, 좌의정 윤두수가 선조에게 "오늘 오시(정오 전후)에 왜적 기병들이 백사장 주변을 치닫고 보병들은 강가로 다가와 한참 동안 계속 수없이 탄환을 쏘아대더니 갑자기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이때 우림위 민여호와 전 선전관 이책, 의주 토병 최자급은 각각 1명씩을 쏘아 맞추고 이산 토병 김언광, 화포장(火炮匠, 포병) 고상 등은 왜적의 말을 쏘아 맞혔습니다" 하고 보고한다. 왜적 한 명을 죽인 것까지 임금에게 하나하나 보고되고 있다.

6월 21일자에 나오는 여섯 번째 승전 소식은 다시 수군의 것이다. 이 기사는 5월 23일자의 해전 승리 소식을 아주 상세하게 다루고 있는데, '옥포'라는 지명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 바다에서의 연전연승도 길게 기록하고 있다.

기사는 '이순신이 전선 80척을 거느리고 5월 6일 옥포 앞바다로 나아갔다, (오늘날 거제시 동부면인 송미포에서 하룻밤을 보낸 아군은 7일 옥포 근해에서 적선들을 발견했다.) 적선 30여 척이 사면에 휘장을 두른 채 긴 장대에 홍기·백기들을 현란하게 달고 있었고, 나머지 왜적들은 육지로 올라가 마을을 불사르고 겁탈하고 있었다, 왜적들은 우리 수군을 보고는 빨리 노를 저어 나와 아군과 바다 가운데서 만났는데 아군이 적선 26척을 불살라 버렸다'라며, 첫 승전인 옥포 전투의 경과부터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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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산도 이순신 사당 충무사의 이순신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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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는 계속해서 '5월 29일에 이순신과 원균이 재차 노량에서 만나 적선 1척을 불살랐다, 잠시 후에 보니 (사천포) 해변의 산에 왜적 1백여 명이 우글거리고 있고, 그 아래에 전선 12척이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다, 때마침 일찍 들어온 조수가 벌써 빠져나가 바닷물이 얕아진 탓에 큰 배는 나아갈 수 없었다.

이순신이 "우리가 거짓 퇴각하면 왜적들이 반드시 배를 타고 우리를 추격할 것이니 그들을 바다 가운데로 유인 후 큰 군함으로 합동하여 공격하면 필승을 이룰 것이다." 하며 배를 돌렸다.

1리도 채 가기 전에 왜적들이 과연 배를 타고 추격해 왔다. 아군은 거북선으로 돌진하여 먼저 크고 작은 포들을 쏘아대어 왜적의 배를 모조리 불살라버리니, 나머지 왜적들은 멀리서 바라보고 발을 구르며 울부짖었다. 한창 전투할 적에 탄환이 이순신의 왼쪽 어깨를 명중하였다'라며 사천 해전의 경과를 말해준다. 그 다음은 당포 해전이다.

사천 해전 중 적의 총탄에 어깨를 다치는 이순신

'6월 2일, 당포(통영시 삼양읍 삼덕리)에 도착하니 적선 20척이 강 연안에 죽 정박하였는데, 그중에 큰 배 한 척은 위에 누각를 설치하고 밖에는 붉은 비단 휘장을 드리우고 있었다. 적장이 금관에 비단옷을 입고 손에 금부채를 가지고서 모든 왜적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중위장 권준(權俊)이 배를 돌려서 노를 재촉하여 바로 그 밑으로 돌진하여 그 배를 쳐부수고, 적장을 쳐다보고 활을 쏘니 시위를 놓자마자 적장이 거꾸러졌다. (중략)

5일, 적선이 고성 당항포 앞바다로 옮겨 정박하였다는 것을 듣고, 이순신이 배 3척을 먼저 보내어 형세를 정탐하도록 하였는데, 바다 어귀를 나가자마자 바로 포를 쏘아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모든 군사들이 일시에 노를 재촉하여 앞뒤를 고기꿰미처럼 연결하여 나아가 소소강(고성천)에 이르니 적선 26척이 강 연안에 진을 치고 있었다.

그중 3층 나무집으로 된 큰 배 한 척은 뒤에는 검은 비단 휘장을 드리우고 앞에는 푸른 일산을 세워 놓았는데, 휘장 안에는 왜적들이 줄을 서 있었다. 모든 군사들이 처음 한 번 교전하고 거짓으로 패한 척 퇴각하니, 층각을 세운 큰 배가 돛을 달고 먼저 나왔다. 모든 군사들이 양쪽에서 공격하니 적장이 화살을 맞고 죽었다. 그러자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 불을 질러 적선 100여 척을 소각하고 왜적 210여 급을 베었으며 물에 빠져 죽은 적은 그 숫자를 다 기록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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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루에 걸려 있는 이순신 시조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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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상한 것은 바로 뒤의 내용이다. 7월 6일 벌어진 한산대첩 기사가 6월 21일 실록에 실려 있다. <선조'수정'실록>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50∼100년 지나 새로 집필되었으므로 7월 6일의 한산대첩을 6월 21일 실록에 기록할 수도 있겠지만, <선조실록>은 어째서 뒷날 일을 앞 날짜에 써넣었을까?

그런 궁금증은 실록 집필 절차를 알지 못해 빚어진 오해이다. 실록은 그날 그날 일기처럼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임금이 죽으면 임시로 실록청(實錄廳)을 설치하여 직전 임금 시대의 실록을 편찬했다. 실록은 현재진행형으로 쓴 오늘의 일기가 아니라 지난 일을 기록하는 역사책이라는 말이다. 한산대첩 기사 부분을 읽어본다.

기사는 '7월 6일 이순신이 이억기와 노량에서 만났는데, 원균은 부서진 배 7척을 수리하느라 먼저 와 있었다, (이때 목동 김천손으로부터) 적선 70여 척이 영등포(거제시 장목면)에서 견내량(거제시 사등면)으로 옮겨 정박했다는 것을 들었다, 8일 수군이 바다 가운데로 가니, 왜적들이 아군이 강성한 것을 보고 노를 재촉하여 돌아가자 우리 군사들이 추격했다'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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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산도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기다리던 중 포구에서 본 판옥선의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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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는 '적선 70여 척이 안바다에 진을 치고 있는데 해안선의 모양이 좁은데다 험악한 섬들도 많아 배를 운행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아군이 진격하기도 하고 퇴각하기도 하면서 그들을 유인했다. 그랬더니 과연 왜적들은 총출동하여 추격해 왔다. 아군은 적들을 한산 앞바다로 끌어냈다'로 이어진다. 한산대첩 기사를 계속 읽어본다.

'아군은 (병력이 우세할 때, 학이 날개를 편 모양으로 전함들을 전진시키면서 적들을 포위하는) 학익진(鶴翼陣)을 펼친 채 깃발을 휘두르고 북을 치며 한꺼번에 진격하였는데, 크고 작은 총통들을 연속적으로 쏘아 먼저 적선 3척을 쳐부수니 왜적들이 사기가 꺾여 조금 물러섰다. 이 광경을 보며 아군 장수와 군졸들은 발을 구르고 환호성을 질렀다. 기세가 오른 아군은 화살과 탄환을 번갈아 발사하여 적선 63척을 불살라버렸다. 잔여 왜적 4백여 명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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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신이 병사들 활쏘기 훈련을 실시했던 한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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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에 안골포에 도착하니 적선 40척이 바다 가운데 벌여 정박하고 있었다. 그중에 첫째 배는 위에 3층 큰집을 지었고 둘째 배는 2층집을 지었으며 그 나머지 모든 배들은 어린진(魚鱗陳, 병력이 상대보다 적을 때, 물고기 비늘처럼 차례대로 진을 결성하는 방법)을 펼치고 있었는데 그 지역이 협착하였다. 아군이 두세 차례 유인하였으나 왜적은 두려워하여 감히 나오지 않았다. 우리 군사들이 들락날락하면서 공격하여 적선을 거의 다 불살라버렸다. 이 전투에서 머리를 벤 것이 250여 급이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수효를 다 기록할 수 없으며 나머지 왜적들은 밤을 이용하여 도망쳤다.

이순신 등이 그의 군관 이충(李沖)을 보내어 보고하고 수급을 바치니, 행조(行朝, 피란 중인 조정)에서는 지위가 높고 낮은 모든 사람들이 뛸 듯이 기뻐하며 경하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한산대첩 소식 듣고 조정 모든 사람들, 뛸 듯이 기뻐했다

이순신 등이 군관 이충을 보내어 승전을 보고하자 선조와 조정 사람들이 모두들 기뻐하며 서로 축하했다는 마지막 문장이 눈길을 끈다. 임진왜란 3대 승전의 하나인 한산대첩 소식은 진정으로 당시 조선인들 모두에게 큰 희망을 주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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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산대첩비를 능선에 거느리고 있는 한산도가 이제 지척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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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는 한산대첩에 대해 '만일에 이 해전에서 우리 수군이 패하였더라면 일본 수군은 남해를 돌아 황해는 물론 평안도 연안에 상륙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한산대첩이야말로 임진왜란을 결정지은 해전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임진왜란을 결정지은 해전, 한산대첩! 그 현장인 한산섬을 찾아 길을 떠난다. 한산섬에서 놓치지 않고 봐야 할 것들에는 한산문, 대첩문, 한산정, 제승당, 제승당 유허비, 수루, 수루에 걸린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시조 편액 등이 있다고 한다. 그 목록이 적힌 종이를 들여다 보며 파라다이스 호에 승선한다. 자, 출발이다! (한산도 답사에 대해서는
'바다 건너 과녁 보이는 곳... 활 한번 쏘고 싶다' 기사 참조)

<난중일기>의 한산대첩 관련 기록

<선조실록>의 한산대첩 관련 기사를 읽었으니 이제 이순신 본인이 이 대첩을 <난중일기>에 어떻게 남겨 두었는지 살펴볼 일이다.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행주산성 대첩과 1차 진주성 대첩에 대해서는 권율과 김시민 본인이 직접 써서 남긴 기록이 없으니 읽어보고 싶어도 가능한 일이 아니지만, 한산대첩은 이순신이 직접 기록한 <난중일기>가 남아 있으니 어찌 읽어보지 않고 그냥 넘어갈 것인가. 아래는 국가문화유산포털의 <난중일기> 1592년 7월 8일 '장계'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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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산도 대첩문 앞에는 두 명의 초병이 서 있다. 그런데 이 초병들은 실제 사람이 아니라 인형이다. 대첩문 인형들은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본 실제 사람 초병들을 생각나게 했다. 이런 곳에 조선 시대 수군의 복장을 완벽하게 차려입은 초병들이 서 있으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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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에 적선이 머물러 있는 곳(견내량)으로 항해했다. 한바다에 이르러 바라보니, 왜의 대선 한 척과 중선 한 척이 선봉으로 나와서 우리 함대를 몰래 보고서는 도로 진치고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뒤쫓아 들어가니, 대선 서른여섯 척과 중선 스물네 척, 소선 열세 척(모두 일흔세  척)이 대열을 벌려서 정박하고 있었다.

그런데 견내량의 지형이 매우 좁고, 또 암초가 많아서 판옥전선은 서로 부닥치게 될 것 같아서 싸움하기가 곤란했다. 그리고 왜적은 만약 형세가 불리하게 되면 기슭을 타고 뭍으로 올라갈 것이므로 한산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여 모조리 잡아버릴 계획을 세웠다.

한산도는 사방으로 헤엄쳐 나갈 길이 없고, 적이 비록 뭍으로 오르더라도 틀림없이 굶어 죽게 될 것이므로 먼저 판옥선 대여섯 척으로 먼저 나온 적을 뒤쫓아서 엄습할 기세를 보이게 하니, 적선들이 일시에 돛을 올려서 쫓아 나오므로 우리 배는 거짓으로 물러나면서 돌아 나오자, 왜적들도 따라 나왔다. 그때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학익진'을 펼쳐 일시에 진격하여 각각 지자 ·현자·승자 등의 총통들을 쏘아서 먼저 두세 척을 깨뜨렸다.

여러 배의 왜적들이 사기가 꺾여 물러나기 시작하자 아군의 여러 장수와 군사와 관리들이 승리한 기세로 흥분하며, 앞 다투어 돌진하면서 화살과 화전을 잇달아 쏘아대니, 그 형세가 마치 바람 같고 우레 같아, 적의 배를 불태우고 적을 사살하기를 일시에 다 해치워 버렸다.

순천부사 권준이 제 몸을 잊고 돌진하여 먼저 왜의 층각대 선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왜장을 비롯하여 머리 열 급을 베고 우리 남자 한 명을 산 채로 빼앗았다.

광양현감 어영담도 먼저 돌진하여 왜의 층각대선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왜장을 쏘아 맞혀서 내 배로 묶어 왔는데, 문초하기 전에 화살을 맞은 것이 중상이고 말이 통하지 않으므로 즉시 목을 베었으며, 다른 왜적을 비롯하여 머리 열두 급을 베고, 우리 사람 한 명을 산 채로 빼앗았다.

사도첨사 김완은 왜의 대선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왜장을 비롯하여 열여섯 급을 베었다.

현양현감 배흥립이 왜 대선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여덟 급을 베고 또 많이 익사시켰다.

방답첨사 이순신은 왜 대선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머리 네 급을 베었는데 다만 사살하기에만 힘쓰고 머리를 베는 일에는 힘쓰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 두 척을 쫓아가서 쳐부수어 일시에 불태웠다.

좌돌격장 급제 이기남은 왜 대선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잡아 일곱 급을 베었다.

좌별도장 본영 군관 전 만호 윤사공과 가안책 등은 층각선 두 척을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여섯 급을 베었다.

낙안군수 신호는 왜 대선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일곱 급을 베었다.

녹도만호 정운은 층각대선 두 척을 총통으로 뚫자 여러 전선이 협공하여 불태우고 머리 세 급을 베고 우리 사람 두 명을 산 채로 빼앗았다.

여도권관 김인영은 왜 대선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세 급을 베었다.

발포만호 황정록은 층각선 한 척을 쳐부수자 여러 전선이 협공하여 힘을 모아 불태우고 두 급을 베었다.

우별도장 전 만호 송응민은 머리 두 급을 베었고, 흥양통장 전 현감 최천보는 머리 세 급을 베었고, 참퇴장 전 첨사 이응화는 머리 한 급을 베었고, 우돌격장 급제 박이량은 머리 한 급을 베었고, 내가 타고 있는 배에서 머리 다섯 급을 베었고, 유군일령장 손윤문은 왜의 소선 두 척에 총을 쏘고 산 위에까지 추격하였으며, 오령장 전 봉사 최도전은 우리 소년 세 명을 산 채로 빼앗았다.

그 나머지의 왜 대선 스무 척, 중선 열일곱 척, 소선 다섯 척 등은 좌도와 우도의 여러 장수들이 힘을 모아 부수고 불태우니 화살을 맞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왜놈 사백 여 명은 형세가 아주 불리하고 힘이 다 되었는지 스스로 도망가기 어려운 줄 알고, 한산도에서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갔다.

그 나머지 대선 한 척·중선 일곱 척·소선 여섯 척(모두 열네 척) 등은 접전할 때 뒤처져 있다가 멀리서 배를 불태우며 목베어 죽이는 꼴을 바라보고는 노를 재촉하여 도망해 버렸으나, 종일 접전한 탓으로 장수와 군사들이 노곤하고 날도 땅거미가 져 어둑어둑하므로 끝까지 추격할 수 없어서 견내량 내항에서 진을 치고 밤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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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산도 중심부에서 보는, 수군통제영 본부 건물이었던 제승당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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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246253&dable=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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