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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조선 수군 최대 참패의 현장...거제도와 칠천도 사이 칠천량
글쓴이 tntv 등록일 [2016.02.04]


거제도와 그 서쪽 칠천도 사이의 얕은 바다 칠천량, 우리 역사에서 가장 많은 군인들이 전사한 곳이다. 1597년(선조 30) 7월 16일, 삼도수군통제사 원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를 비롯한 약 1만여 장수와 수군들이 조총에 맞아, 바다에 빠져, 뭍에 매복한 채 기다리던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목숨을 잃었다. 그 바다 칠천량, 아직 한 번도 찾은 적이 없다면 '국사에 관심이 많은 국민'이라고 자칭하지는 못하리라.

부산 남쪽 가덕도를 거쳐 거제도로 들어선다. 그렇잖아도 대참패의 현장으로 가는 걸음이라 아침부터 별로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는데, 문득 마음이 더 무겁게 가라앉는다. 길이 물 속으로 들어간 탓이다. '가덕 해저 터널'이라고 한다. 전조등을 켜고 달리는데도 콘크리트 벽에 막힌 칙칙한 분위기에 눌려 가슴이 답답하다.

일본왜성의 존재를 우려한 이순신과 원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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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 사진과 오른쪽 맨 위 사진은 왜성의 특징 중 한 가지인 경사진 성벽을 보여준다. 오른쪽 가운데 사진은 또 다른 특징, 즉 성문 안으로 들어서면 길이 꺾여 있어 적이 입성하는 경우 좌우 성벽 위에서 공격하기 좋도록 설계한 흔적을 보여준다. 맨 아래 사진은 장문포왜성을 찾은 답사자들이 성 안으로 들어서고 있는 모습이다. 장문포왜성(문화재자료 273호)과 송진포왜성은 500m 폭의 바다를 가운데에 둔 채 서로 마주보고 있다. 이 두 왜성은 장목만 입구를 막기 위해 축성된 것이다. 사진에서 보는 장문포왜성은 1593년 왜장 후쿠시마 마사노리(福鳥正則)을 비롯한 7,430명의 일본군이 축성한 후 주둔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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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에 실려 물밑길을 가면서도 이런데, 시커먼 바다 속으로 떨어지며 숨을 거두었던 1597년 7월 16일의 선조들은 과연 어떠했을까! 고향에 두고온 가족들의 울부짖음이 불현듯 스치고 지나가는 그 순간, 물 밑으로 가라앉으며 이승과의 인연을 끊어야 했던 그분들의 한 많은 고통.... 차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처참한 현장을 찾아나선 오늘의 일정이 그저 우울할 뿐이다.

가덕도 휴게소에서 얻은 '거제 관광 안내도'를 편다. 가거대교를 넘으면 곧장 만나게 되는 영등포왜성(거제시 장목면 구영리 산29-2)이 보이지 않는다. 그 다음의 송진포왜성(장목면 장목리 산6-3)과 장문포왜성(장목면 장목리 산130-43)도 없고, 통영으로 가는 거제대교 앞의 견내량왜성(사등면 덕호리 267)도 표시가 없다. 안내도를 만든 거제시 공무원들도 왜성들을 지도에 그려 넣으려니 마음이 답답해졌던 것일까.

안내도에는 없지만, 칠천량 해전의 현장을 답사하려면 그 전에 왜성부터 먼저 둘러보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칠천량 해전의 참패가 왜성들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순신도 원균도 삼도(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수군통제사로 있을 때 부산 일대의 일본 수군을 공격하라는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는데, 그 역시 왜성들의 존재를 우려한 군사적 결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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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수군의 주력선이었던 판옥선의 모습. 사진은 칠천량 해전 공원 전시관에 게시되어 있는 서울대 규장각 소장 각선도본의 일부를 촬영한 것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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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와 조정 대신들은 일본 수군을 격파해야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전쟁 초기만 제외하면 조선 수군은 일본 전선 안택선보다 거대하고 전투 기능도 훨씬 뛰어난 판옥선을 보유한 장점과, 익숙한 지형 지리를 잘 활용한 전술 전략의 구사로 연전연승을 거듭했다. 선조와 조정 대신들은 그것만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수군 지휘부의 판단은 달랐다. 한산도 대패 이후 일본군이 남해안 일대에 왜성을 쌓아놓고 주둔하면서 사정이 전혀 달라졌다. 이제는 수군끼리 바다에서 맞붙으면 되는 전투가 아니었다. 일본 수군의 주력 부대가 있는 부산 근해까지 진출했다가는 맞서서 대항하는 적과, 왜성에서 몰려나와 배후를 공격해올 적에게 저절로 포위가 되어버리는 형국이었다.

그래서 이순신과 원균은 육군이 왜성의 일본군을 공격해주고 수군이 일본 수군을 치는 합동 작전을 주장했다. 선조와 조정의 출전 명령을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선조는 이순신을 한양으로 잡아올려 고문까지 했다.

부산 앞바다 공격 명령을 따르지 않은 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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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도수군통제사가 타던 통영상선으로, 사진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수군조련도병풍의 일부를 칠천량해전공원전시관이 복사하여 게시해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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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선조는 1597년 1월 23일 "왜추(고니시 유키나가)가 (가토 기요마사가 바다를 건너 부산으로 오는 날짜를 가르쳐주면서 해상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치면 그를 죽일 수 있다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런데도 이순신은 가토를 참수하라는 임금과 조정의 명령을 거부하고 출전도 하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왜추보다도 못하다, 한산도의 장수(이순신)는 편안하게 누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하고 개탄한다. 드디어 선조는 1월 27일 "그런 사람(이순신)은 청정(가토 기요마사)의 목을 베어 와도 용서할 수 없다"면서 이순신을 죽이겠다는 의지도 천명한다.

정탁 등의 구명 운동으로 이순신은 겨우 목숨을 건지지만 삼도수군통제사는 원균으로 교체된다. 하지만 본래 수군 단독 출전론을 펼쳐왔던 원균도 통제사가 된 뒤 생각을 바꾼다. 원균은 1597년 4월 19일 "지금은 춘삼월이라 비가 오지 않는 까닭에 땅이 굳어 있어 말을 달리고 싸움을 하기에 매우 좋은 때입니다, 반드시 4~5월 사이에 육군과 수군을 크게 일으켜 한판의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하고 장계를 보내는 등 이순신과 똑같은 주장을 고집한다.

정탁(鄭琢)

1526년(중종 21)에 태어나 1605년(선조38) 사망한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좌의정, 우의정, 영중추부사, 도승지, 대사헌, 강원도관찰사 등 고위직을 역임했다. 본관은 청주(淸州).

정탁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좌찬성으로 있으면서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했다. 1594년에는 곽재우·김덕령 등의 명장을 천거하여 전란 중에 공을 세우게 했고, 그 이듬해에 우의정이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이미 72세의 노령이었음에도 직접 싸움터에 나아가 군사들의 사기를 앙양시키려 했다. 선조가 그의 연로함을 지적하며  만류하는 바람에 종전을 실행하지는 못했지만, 이 해 3월 옥에 갇혀 있던 이순신을 구해내는 데 앞장섰다. 이순신과 원균이 주장한 수륙병진협공책(水陸倂進挾攻策)을 신뢰했던 정탁은 예천의 도정서원(道正書院)에 제향되고 있다.

수군을 빨리 출전시키라는 선조의 독촉이 도원수 권율에게 하달된다. 그동안 원균은 통제사가 된 지 다섯 달이나 되었는데도 전혀 출전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권율은 원균에게 계속 출전을 미루면 군법의 적용을 받게 될 것이라는 선조의 의중을 전한다. 결국 6월 18일, 원균은 가덕도 앞까지 진출한다.

승패가 확연하지 않은 전투를 마친 원균은 한산도 통제영(삼도수군통제사가 근무하는 군영)으로 돌아온다. 권율이 다시 원균을 불러 '빨리 재출전 하라'고 지시한다. 원균은 여전히 수륙 병진론(육군과 수군이 함께 나아가 일본군의 왜성과 수군을 동시에 공격하는 전술)을 주장하며 권율의 지시를 거부한다. 원균은 무수한 장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권율에게 매질을 당한다.

7월 5일, 마침내 원균은 모든 전력을 동원하여 부산포 앞바다로 출정한다. 하지만 갑자기 들이닥친 폭풍우 때문에 싸워보지도 못한 채 가덕도, 서생포(울산) 등 육지 쪽으로 밀려난다. 가토가 주둔한 서생포왜성 등 뭍에서 기다리던 일본군들은 지쳐서 몸도 잘 가누지 못하는 조선 수군들을 무참히 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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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천량 해전 공원 전시관'의 내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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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의 주력 부대는 거제도와 칠천도가 파도를 막아주는 칠천량 바다에 정박한다. 원균이 한산도까지 가지 않고 그 중간인 칠천량에 머문 것은 신속히 전투를 재개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권율은 '더 빨리 재출전을 하겠다'고 속시원하게 나오지 않는 원균에게 또 다시 매질을 한다.

원균은 곤장을 맞고 돌아와 분을 삭이지 못한다. 이때 경상우수사 배설은 "이곳 칠천량은 좁고 물이 얕아 크고 무거운 판옥선이 움직이기 어렵습니다, 왜적이 기습을 해오면 우리가 아주 불리하니 넓고 깊은 한산도 쪽으로 가서 전열을 정비한 다음 전투를 재개해야 승산이 있을 것이외다"라는 취지의 진언을 한다.

경상우수사 배설 "칠천량은 우리가 싸우기에 불리한 곳"

원균은 "한산도까지 물렀다가는 재공격 시기가 늦어지니 전투 이전에 내 목부터 먼저 떨어질 것"이라며 배설의 의견을 묵살한다. <조선왕조실록> 1597년 7월 22일자 기사를 보면, 배설은 7월 15일 원균에게 "촉박한 출전 명령을 따르다가는 우리 군사들을 모두 죽이게 됩니다, 장수들이 명령 불복종으로 처형될지언정 죄없는 병사들을 사지(死地)로 몰아넣을 수는 없소" 하며 버틴다. 그러나 권율로부터 '(원균이 출전하지 않으면) 나라에 법이 있고, 나(선조) 역시 사사로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임금의 말을 전해들은 원균은 칠천량 주둔을 강행한다.

다음날인 7월 16일 오전 4시, 일본군이 칠천량 전체를 에워싼 채 기습을 해온다. 그때까지도 조선 수군은 얕고 좁은 칠천량 바다에 미동도 없이 머물러 있었다. 조선 수군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 비가 퍼붓는 캄캄한 밤, 바다에서도 포위되었고, 요행히 뭍으로 도망쳐 올라와도 왜성에서 쏟아져나온 일본 육군들이 장사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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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천도(왼쪽)와 거제도(오른쪽) 사이의 좁고 얕은 바다 칠천량. 사진은, 해전에서 살아남은 조선 수군이 육지로 올라와도 왜성에서 나온 일본 육군들에게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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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경으로 거제도가 보이고, 그 사이 칠천량 바다가 있고, 오른쪽으로 칠천도의 일부(칠천량 해전 공원 전시관이 있는 부분)가 보이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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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칠천량 해전의 최종 결말을 보자. <조선왕조실록> 1597년 7월 22일자 기사는 선전관(전투 감독관)으로서 원균의 대장선에 함께 타고 있었던 김식의 보고를 보여 준다.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후퇴하였으나 도저히 대적할 수 없어 고성 지역 추원포로 후퇴했는데, 적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마침내 우리 전선은 모두 불에 타서 침몰했고 제장과 군졸들도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모두 죽었습니다.

신은 통제사 원균, 순천부사 우치적과 간신히 탈출해 상륙했는데, 원균은 늙어서 걷지 못하여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 보니 왜군 6∼7명이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들고 있었습니다. 그 뒤로 원균의 생사는 자세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난리 중에 경상우수사 배설과 몇 명의 만호(연안의 수군 병영 책임자)만이 살았고, 많은 배들은 불에 타 불꽃이 하늘을 덮었으며, 무수한 왜선들이 (조선 수군의 총본부가 있는) 한산도로 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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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제도에서 칠천도로 넘어가는 칠천연륙교 입구의 '칠천량 해전' 해설 비(2010년 경상남도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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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문포왜성을 둘러본 뒤 도로로 내려오면 이내 칠천도로 들어가는 칠천연륙교가 나타난다. 다리 입구에 세워져 있는 '칠천량 해전' 해설 빗돌 앞에서 발을 멈춘다. 경상남도가 2010년 1월 12일에 건립한 이 현대적 조형물은 용머리가 나와 있고 지붕이 둥근 것으로 보아 거북선을 상징하는 듯 여겨진다. 칠천량 해전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해줄 듯한 비문을 읽어본다.

'칠천량 해전은 1597년(정유년) 7월 16일 거제시 하청면 실전리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이다. 당시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지휘하던 조선 수군은 7월 14일 가덕도와 영등포 등에서 일본군의 습격으로 손실을 크게 입고 후퇴하여 7월 15일 밤에 이곳 칠천량에서 정박하였다.

이튿날인 7월 16일 새벽 다시 일본 수군 600여 척의 기습 공격으로 조선 수군은 160여 척을 잃었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 조선 장수들이 장렬히 전사하였으며, 원균 또한 고성으로 퇴각하다 육지에서 전사하였다.

이 해전의 패배로 남해안의 제해권을 일본에 빼앗기자 조선 조정은 초계(현 합천군 율곡)의 권율 도원수 휘하에서 백의종군하던 충무공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여 제해권을 회복하도록 하였다.'

'경상남도 이순신 프로젝트 역사고증 자문위원회'의 고증을 거쳤다고 밝혀져 있는 이 글은 패전 사실과 이순신의 복귀 전말에 방점을 두고 있다. 막강한 우리 수군이 어째서 개전 이래 최대의 패전을 칠천량에서 기록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반쪽'짜리 해설인 셈이다.

출전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었던 원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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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천량 해전 공원 전시관' 안에서 볼 수 있는 당시 해전 상황 재현 조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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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륙교 빗돌의 미흡한 해설로는 칠천량 대참패의 원인이 헤아려지지 않는다. 그래서 '칠천량 해전 공원 전시관'의 게시물 중 하나인 '칠천량 해전의 수장, 원균'을 더 꼼꼼하게 읽게 된다.

이 게시물은 '원균의 딜레마와 위기'라는 제목부터 범상하지 않다. 선조와 대신들의 지시를 따르면 (경상우수사 배설의 지적처럼) 병사들을 죽이게 될 것이고, 거부하면 본인이 이순신처럼 끌려가 참담한 꼴을 당하게 될 터이다. 이것이 '원균의 딜레마'이다. 혼자 머리를 싸맨 원균이 혼자서 '어쩌면 좋단 말인가!' 하고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원균(1540~1597)은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뒤 수군을 이끌고 일본군과 싸우라는 선조의 명을 받게 되었다. 원균도 (통제사가 되기 전인 1597년 1월 19일) 선조에게 장계를 올려 수군이 단독으로 바다에 나아가 일본군을 제압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원균은 통제사가 되고난 뒤 수군 단독으로 일본군을 제압하는 것이 무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원균은 조선 육군을 동원하여 앞세우고 수군이 그 뒤를 따라 진격하자는 제안을 한다. 그러나 선조는 원균에게 계속 수군이 단독으로 나아가 싸울 것을 요구하였다. 결국 원균은 조선 수군을 이끌고 바다로 나아갔으며, 칠천량의 패전은 그렇게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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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관 안에 진열되어 있는 '부서진 판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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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은 '칠천량의 패전은 그렇게 비롯되었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렇게'는 '선조'가 '계속' 원균에게 '수군 단독으로 나아가 싸울 것을 요구'한 사실을 가리킨다. 타당한 지적이다. 국가 사이의 싸움을 전쟁이라고 한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승패의 최종 책임은 당연히 최고 권력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손자병법>도 '군대가 (전술과 전략을 알지 못하는 권력자의 지시에 맹종하는) 미군(縻軍)이 되면 반드시 나라가 쇠약해진다, 전진해서 안 될 때 공격을 명하고, 후퇴해서 안 될 때 물러나라고 하는 명령에 복종하는 군대가 곧 미군'이라고 정의했다. 하지만 군사권을 휘둘렀던 선조와 대신들은 처참한 7년 전쟁을 겪고 난 뒤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했다.

군사권을 행사한 최고 권력자의 책임을 묻는다

거제도에는 또 한 군데의 이름 높은 전쟁 유적지가 있다. '거제 포로수용소 유적'이 바로 그곳이다. 그런데 6.25 전쟁을 겪고 난 뒤 대통령 이승만을 비롯한 권력자들 중에도 책임을 지는 사람은 없었고, 도리어 '종신' 대통령을 획책하는 등 권력 강화에 골몰했다. 그런 점에서 거제도는, 권력을 누린 사람에게는 어떤 책임 의식이 있어야 하는지 곰곰 생각해보게 하는 섬이다. 

거제도 역사 여행 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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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제 포로수용소 게시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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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거대교와 해저 터널을 지나
(1) 장문포 왜성
(2) 칠천연륙교 입구 '칠천량 해전' 해설 비
(3) 다리에서 거제도와 칠천도 사이의 칠천량 조망
(4) 칠천량 해전 공원 전시관 둘러보기, 전망대에서 칠천량 조망
(5) 칠천량 해전 공원 둘레의 바닷가 산책로 걷기
(6) 물안 해수욕장에서 칠천량 바닷물에 손 넣어보기
(7) 김영삼 대통령 생가와 기념관
(8) 조선 수군 첫 승전지 옥포대첩 기념 공원 답사
시간 여유가 있으면 거제 해금강(명승 2호)에서 유람선을 타고, 아니면
(9) 거제 포로수용소 (오른쪽 사진은 거제 포로수용소 전시관에 게시되어 있는 포로들의 용변 장면 묘사 그림. 등 뒤에 포로를 의미하는 'PW'가 굵게 쓰여 있다.)
출처: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79014&CMPT_CD=P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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