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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삼국유사> 일연의 자취 깃든 비슬산 기행
글쓴이 tntv 등록일 [2013.08.08]


 


 

<삼국사기>가 사관이 쓴 정사(正史)라면 <삼국유사>는 스님이 쓴 야사(野史)다. 정해진 틀이 있는 유교의 문신귀족이 쓴 <삼국사기>에 견줘 <삼국유사>는 매임이나 걸러짐이 없이 자유롭고 진솔하다.
오늘날 <삼국유사>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가지다. 만록(漫錄)으로 보기도 하고 미완성 작품으로 여기기도 하며 또 불교라는 특정 종교의 역사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처럼 평가가 엇갈림에도 누구나 크게 인정하는 <삼국유사>의 가치가 있다. 유사(遺事)로서 갖는 특징이다. 정사인 <삼국사기>가 놓친 부분을 <삼국유사>가 제대로 보완하고 있다는 얘기다.
일연(一然, 1206~1289)은 전국을 두루 여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과정에서 얻은 사료의 발굴과 수집, 현지 답사를 통한 유물·유적에 대한 관찰, 사료 검증, 객관적 서술을 위한 배려 등을 고스란히 책에 담았다. 역사가로서 일연의 노력이고 그 결과로 <삼국유사>가 만들어졌다.
유교사관에 젖어 있던 당시 사람들과는 달리 눈길이 기층민의 삶을 따뜻한 애정으로 감싸고 있었음을  때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을지라도 지금 관점에서 본다면 대단한 가치이고 힘이다.
거기에 더해 <삼국유사>를 통해 담아낸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은 권력과 권위, 물질을 지향하는 삶에 찌든 오늘날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바가 크다.
육당(六堂) 최남선(1890~1957)은 일찍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될 경우를 가정한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후자를 택할 것"이라 말했다. 그만큼 매력 있는 역사서가 <삼국유사>다.

 


 
비슬산과 일연은 인연이 깊다. 일연은 지금의 경산(경북)인 장산에서 태어났다. 22세에 승과에 합격해 20년 동안 수도를 거듭하면서 보당암·묘문암·무주암 그리고 인흥사와 용천사를 거쳤는데 이 모두가 비슬산에 있다. 일연이 비슬산에서 묵은 22년 세월이 <삼국유사>의 태동이나 완성과 무관하지 않았다. 일연은 나이 드신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경북 군위 인각사로 와서 <삼국유사>를 완성하고 삶을 마무리했다. 일연 스님과 삼국유사의 자취를 따라 떠나는 여행길은 비슬산 유가사에서 시작해 삶을 마친 군위 인각사에서 마감된다.

 

 

- 유가사와 도성암
<삼국유사> 속 관기와 도성의 일화를 떠올리다

 

유가사(瑜伽寺)는 비슬산 천왕봉 기슭인 대구 달성군 유가면에 있다. 827년인 흥덕왕 2년에 도성(道成)이 창건하였으며, 한때는 3000명 남짓 되는 스님들이 머물기도 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탔다. 대웅전 앞에는 인근 원각사터에서 옮겨온 삼층석탑이 있고, 절간 오르는 길목에 승탑들이 있다. 유가사에는 일주문도 불이문도 없다. 대신 돌로 만든 돌문과 돌탑들이 있다.


유가사에서 발길을 돌려 찾아가는 곳은 도성암이다. 982년 성범이 중창한 이곳에는 일연이 지은 <현풍유가사도성암사적>이 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널리 알려진 '포산이성(包山二聖)'대목은 이렇다. 관기(觀機)는 남쪽 고개에 암자를 정했고 도성(道成)은 북쪽 바위 구멍에 자리를 잡아 서로 떨어진 거리가 10리쯤 됐다. 구름을 헤치고 달을 노래하면서 매양 서로 찾아다녔다. 도성이 관기를 청하려 하면 나무들이 모두 남쪽을 향해 엎어져 마치 환영하는 것처럼 돼서 이를 보고 관기가 갔으며 관기가 도성을 맞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관기는 관기봉으로 남았고 도성은 후세 사람들이 도성암으로 남겼다.
일연은 이어지는 글에서 "두 분 스님이 오랫동안 바위 너덜에 숨어 살면서 인간세상과 사귀지않고 모두 나뭇잎을 엮어서 추위와 더위를 넘기면 비를 막고 앞을 가렸을 뿐"이라면서 "옛날에 은둔생활을 한 인사들의 숨은 취미를 알 수 있으나 본받기는 어렵다"고 적었다.
도통 굴 아래에 있는 도성암 들머리에는 수도에 방해가 되니 말을 삼가라는 안내판이 걸려 있다. 도성암에 들어서자 마당 가운데 삼층석탑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특별한 것도 없이 무던한 탑이다. 그럼에도 한없이 너그러워 보인다. 빈 공간 때문이다. 비워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새삼 깨닫는다. 발걸음을 대견사지로 돌린다.

 


 
 
 


- 대견사지
우주를 온 몸으로 끌어안은 듯한 삼층석탑

 


 

비슬산 휴양림을 따라 올라가다 자동차가 갈 수 없는 지점에서 2.5km 정도를 걸어 올라가면 대견사터와 삼층석탑, 조화봉이 기다리고 있다. 비슬산 정상에서 참꽃군락지를 스쳐지나면서 월광봉을 지나 내려와도 대견사지를 만날 수 있다.
9세기 신라 헌덕왕 때 창건된 절이 대견사(大見寺)다. 이제 절터에는 석탑만이 남아 있다. 대견사라는 절 이름에 얽힌 일화가 있다. 중국 당나라 황제가 절을 지을 곳을 찾았지만 마땅한 자리가 없어 상심하고 있다가 어느 날 세수를 하려고 물을 떠놓은 대야에 경치가 아름다운 산이 비춰졌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 대견사 자리였다.
도성암에서 느꼈던 탑에 대한 감흥은 대견사지 삼층석탑(대구광역시유형문화재 제42호)에서 절정에 이른다. 아득한 낭떠러지 끝에 우주를 온 몸으로 끌어안은 듯한 석탑이 우뚝 서 있다. 실제 몸체에 견줘 열 배는 더 웅장해 보인다.
대견사는 일연과도 인연이 깊은 곳이라고 한다. 대견사 복원을 진행하고 있는 조계종의 말이다.
역사 기록에 남아 있는 보당암이 바로 대견사라는 얘기인데, 관련 기록이 <동문선>에 나온다고한다. 일연은 보당암에 머물렀는데 여기서 <삼국유사>의 집필을 시작했거나 구상했을 것이다.
절터로는 씩씩하기 이를 데 없는 경남 합천의 영암사지에 견줘도 전혀 모자람이 없다. 구체적 형상에 치중하기보다 상상할 수 있도록 여지를 허락하는 배려도 그 이상의 힘이 있을 것 같은데 어떤 모습으로 복원될지 궁금하다.


대견사지 옆으로는 남쪽을 향한 우람한 바위들이 겹쳐 있는데, 그 돌 틈에 열 사람 정도 들어갈 수 있다. 옛날부터 여기서 사람들이 기도를 드려왔고 그 들머리에는 마애불상이 새겨져 있다.
전체 모양이 '유가심인(瑜伽心印)'과 비슷한데 이는 으뜸 깨달음의 순간을 공(空)으로 표현하고 위로는 부처를 형상화하는 극락 만다라의 세계를 나타내는 밀교 문양이다. 여기 나오는 이 '유가'는 아래쪽 산자락에 있는 유가(瑜伽)사에서 한 번 더 확인되고 유가사가 포함돼있는 달성군 유가면에서 한 번 더 볼 수 있다. 유가는 인도에서 말하는 요가이며 요가는 마음 작용의 멈춤과 사라짐, 즉 열반을 뜻한다. 수련 방법으로 유가(요가)는 호흡을 조절함으로써 마음을 가다듬고 바른 이치에 걸맞은 상태에 이름을 일컫는다.
대견사지에서 비탈을 하나 올라가면 진달래 군락지가 나온다. 전국적으로 알려진 명소다. 30만평의 산이 봄이면 진달래로 붉게 물든다. 진달래 축제도 벌어진다.
대견사지에서 비슬산자연휴양림 쪽으로 걸어 내려오다 보면 바위들이 엄청나게 모여 있는 데를 지나게 된다. 여러 갈래 물길이 흘러내리는 듯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바위들이다. 비슬산 암괴류라 하는데 중생대 백악기에 만들어진 커다란 화강암들이다. 길이 2km, 너비 80m, 두께 5m. 바위 덩어리 하나가 지름 1∼2m여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


- 인흥사지
일연의 법문 듣고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던 절
 


 

길 끝에 소재사(消災寺)가 있다. 마당 한가운데 서 있는 오래된 단풍나무가 인상 깊다. 늦은 가을이면 불꽃처럼 타오른다. 모든 재앙을 사라지게 한다는 소재(消災)와 잘 어울리는 풍경이다.
2000년 대웅전 중수에서 확인된 상량문에 따르면 스님 300명이 머물던 절이었다지만 지금은 대웅전과 삼성각만 남았다.


인흥사(仁興寺)는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이른바 인흥에 절터로 남았다. 일연스님이 영일(지금 경북 포항) 운제산 오어사(烏魚寺)에서 여기 주지로 오자 그 법문을 들으려고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는 절이다. 일연스님이 여기로 올 때 이름은 인홍사(引弘寺)였는데 스님이 절을 중창하고 그 크기에 걸맞은 이름을 지어 달라고 임금에게 요청해 인흥사(仁興寺) 현판을 받았다.
마을 이름 '인흥'과 마을 개울 건너에 있는 인흥서원은 인흥사와 관련이 있는 이름이다. 지금 절터에는 남평문씨 세거지가 있다.
경북 군위군 인각사에 1295년 세워진 보각국사비(보물 제428호)에는 비슬산에서 수행하던 일연스님의 모습이 적혀 있다. 1227년 겨울 선불장(選佛場)에 나가 장원인 상상과(上上科)로 합격한 뒤 포산(包山·비슬산) 보당암(寶幢庵)으로 옮겨 수행했고 1236년 가을 몽고병란이 일어났을 때 같은 비슬산 무주암(無住庵)에 머물 때 '생계(生界)는 줄지 않고, 불계(佛界)는 늘지 않는다'는 화두(話頭)로 참선하다가 문득 깨우쳐 "오늘에야 삼계(三界)가 꿈과 같음을 알았으며, 대지에 터럭 하나만한 장애도 없음을 보았다"고 했다. 말하자면 비슬산은 바로 일연의 득도처다. 그러나 비슬산에 살던 관기와 도성에 관한 '포산이성(包山二聖)'을 도성암사적에서 썼고 22년 동안 수도한 이런저런 암자들은 자취를 찾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경북 청도 운문사와 더불어 <삼국유사>의 산실이라 할 수 있는 인흥사(仁興寺)는 이미 허물어져 남평문씨 세거지로 바뀌는 등 그야말로 무상(無常)이 느껴진다.

 

 


- 인각사
<삼국유사>를 탈고한 곳

 


 

군위 인각사로 나설 차례다. 사적 제374호로 기록돼 있고 경내가 경상북도기념물 제80호이기도 하다. 군위는 ‘삼국유사의 고장’을 자처한다. <삼국유사>가 구상되고 준비되고 태동된 데가 비슬산 일대였다면 <삼국유사>를 완성한 곳은 인각사다.
인각사(麟角寺)는 642년(선덕여왕 11년)에 의상 스님이 또는 한 해 뒤에 원효 스님이 창건했다는절인데 여기서 <삼국유사>를 탈고한 일연스님은 여기서 두 차례 구산문도회(九山門徒會)를 열었다.
인각사에 있는 같은 보물 제428호인 보각국사 정조지탑(靜照之塔)은 일연스님의 승탑이다. 중대석에 동물상, 상대석에 연꽃무늬가 있으며 탑신에는 '보각국사정조지탑'과 사천왕상과 보살상을 새겼다. 이밖에도 석불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39호), 미륵당석불좌상(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26호) 삼층석탑(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27호) 등이 있다. 인각사는 아직 터만 넓고 제대로 된 건물이 적어 휑뎅그렁한 편이다. 여러 차례 발굴이 이뤄졌는데 유물이 많이 나왔다. 인각사 전시관과 일연학(一然學)연구소도 있다.
인각사에서 좀더 올라가면 일연공원이 나온다. 2010년 11월 준공됐다.


머리에 이고 있는 군위다목적댐 아래에 놓여 있는 공원인데 일연 스님과 <삼국유사>를 중심 주제로 삼아 만들어졌다.
일연 스님의 글은 "자신의 기억이나 지식으로 소화된 자료들을 주관적으로 엮어 서술"하는 대신, "당시 나라 안팎 여러 고전 문헌들에서 폭넓게 인용"해 쓴 부분이 많다(<사진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 중).
자료와 문헌을 찾아내는 데 그만큼 정성을 쏟아부었다는 의미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중국 고전만 해도 27가지고, 우리나라 고전은 책명이 확실한 것만도 50가지 안팎, 고기(古記)·향기(鄕記) 약칭 또는 범칭으로 표시한 문헌은 매우 많으며 비문(碑文)이나 옛 문서에서 끌어쓴 대목도 많다. <삼국사기>가 담지 못한 '가락국기'를 요약해 남기기도 했다. 일연이 뚜렷한 목적의식에 따라 <삼국유사>를 썼음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비슬산 이름의 유래


일연스님은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승려이다. 가지산문은 신라 말기 도의선사가 전남 장흥군 가지산 보림사를거점으로 산문을 일으켰다. 도의선사는 우리나라 선종의 원조로 꼽힌다. 선종의 흐름은 고려시대 3대 종파 가운데 하나인 유가종으로 이어졌는데 여기에 일연스님이 있었다. 비슬산 자락에 있는 유가사나 유가사가 들어 있는 지역 지명인 유가면에서 자취를 느낄 수 있다.
비슬산은 그 이름에서도 신비로운 냄새가 난다. 신라시대 인도 스님들이 와서 산을 보고 '비슬(琵瑟)'이라 이름지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비슬은 인도의 범어(梵語) 발음을 그대로 소리로 옮긴 것인데, '덮는다'는 뜻으로 한자로 쓰면 포(苞)가 된다고 했다. 그래서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포산'이라 했고 지금도 일대를 일컫는 지명으로 포산을 쓴다. 의병장으로 이름높은 망우당(忘憂堂) 곽재우(1552~1617)의 본관이 바로 포산인데, 유가면 바로 옆 현풍면을 이른다. 그런데 일연은 <삼국유사>에 주(註)를 남겨 "그 지역 사람들은 소슬산(所瑟山)이라 불렀다"고 적었다. '소슬'과 '비슬'은 통하는 바가 있다. 소슬은 '솟다'에서 왔고 비슬은 '(닭)벼슬'에서 왔다. 둘은 공통점이 있다. 우뚝하다, 둘레에서 가장 높다는 것이 그것이다. 비슬산은 둘레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는 뜻이 담겼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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