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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백제의 무덤은 어떻게 됐을까?
글쓴이 tntv 등록일 [2012.11.28]

 

 

우린 항상 옛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옛사람들의 세계관은 어땠는지 궁금해합니다. 그래서 상상력으로 그 모습을 그려보고 영화나 드라마로 꾸며보기도 하죠. 그렇지만 과거의 아무런 정보나 자료가 없다면, 우리의 상상력을 펼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옛사람들의 모습, 삶을 그려보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무덤!! 입니다. 특히 과거 지배 세력이나 왕의 무덤에 부장된 유물을 통해 그 시기 어떤 나라와 교류를 했고, 그 시기 사람들은 어떤 생활을 했으며, 어떤 세계관을 갖고 살았는지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옛날 무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무덤이 무엇인가요? 아무래도 경주에 여행 가서 본 신라 무덤일 것 같습니다. 유명한 천마총을 포함한 산처럼 큰 무덤이 떠오르지 않나요? 하지만 오늘 제가 알려드릴 무덤은 신라의 무덤이 아닙니다. 신라와 한반도 삼국시대의 한 축을 이뤘던, 백제의 무덤에 대해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 경주 노서리 고분군

 

 

 

사실 신라의 무덤이 백제의 무덤에 비해 많이 남아있는 이유는 그 규모의 차이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나라였고, 백제는 패망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백제의 슬픈 역사만큼이나 백제 무덤 역시 아픈 수난을 겪어왔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백제의 대표적 고분군은 공주시 송산리 고분군, 그리고 유명한 무령왕릉, 교촌리 고분군, 능산리 고분군, 청주 신봉동 고분군, 그리고 최근에 발견된 전주 고분군 등이 있습니다. 특히 충청도 지역에 많은 고분군이 몰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웅진, 사비 시대에 수도가 있었기 때문이겠죠.

 

 


▲ 송산리 고분군 현재 모습

 

 

 

그럼 이제부터 대표적 고분군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공주에 있는 송산리 고분군입니다. 공주시 금성동에 자리한 송산리 고분군은 복원된 7기 무덤을 포함해 모두 20여 기 이상의 백제 무덤이 있습니다. 이 고분군이 처음 발견된 것은 일제강점기 시대입니다. 당시 가루베 지온이라는 일본인이 처음 발견했는데요. 그는 1932년 당시 공주 교보 교사였습니다. 그런데 가루베 지온은 바로 조선총독부에 알리지 않고 혼자서 발굴하였습니다. 사실 국가의 허락 없이 발굴했기 때문에 아무리 최초 발견자라 해도 도굴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대 우리 문화재가 이렇게 일본인에 의해 많이 훼손되고 강탈당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ㅠㅠ

 

 



▲ 일본이 남겨 놓은 유리건판, 송산리 6호분 전경

 

▲ 일본이 남겨 놓은 유리건판, 일제강점기 송산리 고분군의 모습

 

 

 

 어쨌든 가루베 지온은 이후 1년 뒤에 이 사실을 조선총독부에 알렸고, 1933년부터 발굴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당시 일본이 발굴하며 남겨 놓은 유리건판을 보면 29호분이 발견되지만, 지금은 29호분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현재 송산리 고분군은 7기의 고분만이 복원되어 있을 뿐입니다. 일제강점기에만 해도 20여 기의 고분들이 산재해 있었는데 말이죠...

 


▲ 송산리 고분 출토 유물, (왼쪽부터) 금제마름모꼴장식, 칼자루 장식, 허리띠꾸미기

 

▲ (왼쪽부터) 무령왕릉 연도 폐쇄전 제거작업 모습, 무령왕릉 출토 진묘수, 금동 신발


그런데 1971년! 당시 문화재관리국에서 배수로 작업을 하던 도중 벽돌로 만들어진 무덤의 출입구가 발견되었습니다. 새롭게 백제로 향하는 문이 발견된 것이죠. 발굴한 후 이 무덤이 바로 무령왕 부부가 주인이라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무령왕릉은 기존 송산리 고분처럼 일제에 의해 발굴된 무덤이 아니므로 부장품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108종 2,906점이란 엄청난 양의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물론 당시 발굴의 기술부족, 어수선한 분위기로 제대로 된 실측이 이뤄지지 못한 점은 우리가 모두 반성해야 할 일입니다. ^^;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유물은 여러분도 많이 보셨을 텐데요. 백제의 기술, 백제인의 삶을 연구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 (왼쪽부터) 능산리 현재 모습, 능산리 고분 출토 금제이식, 금사


다음은 능산리 고분군입니다. 능산리 고분군은 백제 사비시대의 왕릉으로, 부여에 있습니다. 현재 총 7기의 고분이 남아 있습니다. 백제 횡혈식석실의 전형적인 형식을 보여준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고분군 역시 일제강점기 시대 1914년에 이본인 야기 쇼우자브로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이후 1915년, 1917년에 일본에 의해 발굴됐습니다. 이 고분군은 일제에 의한 발굴과 매우 소략한 보고, 광복 이후 무계획적인 복원 정비작업 결과 일제강점기 때 확인된 고분 대부분이 파괴되어 현재는 형체를 파악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 (왼쪽부터) 청주 신봉동 토광묘, 두귀단지, 재갈

다음은 청주 신봉동 고분군입니다. 이곳은 재갈과 같은 마구류가 발굴이 되고 손잡이 달린 토기, 크기가 여러 개로 나뉜 토기 등이 나타나 백제 시대의 군사집단이 거주했던 지역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1982년에 발굴이 시작된 후로 1990년, 1992년, 1995년, 2000년, 2003년에 계속 발굴이 이루어졌습니다. 신봉동 고분군에서 발견된 유물들을 살펴보시면 백제의 군사들이 어떤 도구로 싸웠는지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청주에 미호천과 무심천이 있는 신봉동 유적이 군사적으로 요충지였다는 점을 알 수 있죠. 위 사진이 재갈인데요. 재갈이 아직도 남아 전해진다는 게 정말 신기하지 않나요??

 

이렇게 대표적 고분군인 송산리, 능산리, 신봉동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외에도 최근에 전주에서 백제의 무덤이 발견되었는데요, 충청지역이 아닌 지역에서 발견되어 주목받고 있습니다.

 

한성, 사비 시대 백제를 보여주는 고분군. 백제 고분이 신라의 고분에 비해 작고 잘 정비가 되지 않아 일반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신라보다 고분이 작은 이유는 고분의 형식 차이 때문입니다. 백제의 무덤은 벽돌무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벽돌무덤은 무게를 지탱하기 어려워서 무덤의 봉분을 작게 만드는 것이죠. 그런데 옛날에 이를 몰랐던 주민들이 백제의 고분이 신라의 고분에 비해 너무 작다고 생각하여 일부러 봉분을 크게 만들었다고 하네요. 이 때문에 무덤의 벽돌이 거의 3,000개나 훼손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문화유산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여서 죄 없는 유산, 유적을 훼손시켰던 것입니다. ㅠ_ㅠ 우리가 왜 우리 문화유산에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하는지 이런 예들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백제의 고분군은 아직 정비가 잘 이뤄지지 못하고 있고, 시민의 관심도 매우 낮습니다. 하지만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백제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백제 고분에 관심을 두고, 백제 유적에 많은 시민이 방문해야 할 것입니다. ^.^

 

 

 

<참고자료>

역사복원신문 기사, <또 하나의 역사, 백제 문화재 수난사>, 정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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