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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문화유산 답사기]亂中日記의 현장을 가다<1>
글쓴이 tntv 등록일 [2011.08.17]













[문화유산 답사기]亂中日記의 현장을 가다<1>
 

李舜臣의 常勝 뒤에 숨은 절대 고독

● 국보 제76호 亂中日記(아산)
● 국보 제304호 鎭南館(여수)
● 국보 제305호 洗兵館(통영)

軍艦, 상륙정, 여객선, 시외버스, 개인택시를 번갈아 타고 亂中日記에 기록된 李舜臣의 戰勝地 남해안과 多島海 횡단 답사 7박8일. 劣勢함대로 優勢함대를 격파, 壬辰倭亂을 勝戰으로 종결시킨 李舜臣의 常勝戰略을 추적했다

글 : 鄭 淳 台 月刊朝鮮 편집위원〈st-jung@chosun.com〉
사진 : 韓 相 一 자유기고가

 

7639.jpg 順天鄕大學 李舜臣연구소 찾은 까닭

7월22일 새벽부터 폭우가 쏟아졌다. 아침 7시20분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서 한상일 기자와 만났다. 溫陽(온양) 가는 고속버스는 7시30분 정각에 출발했다(1인 요금 5000원). 오전 9시, 온양에 도착하여 터미널 부근에서 잠시 요기하고 택시 편(요금 1만원)으로 牙山市(아산시) 신창면 읍내리 소재 順天鄕(순천향)대학교에 내려 부설 「李舜臣(이순신)연구소」로 찾아갔다.
 
  오전 10시, 이순신연구소 소장 權淳庸(권순용) 교수와 연구위원 이건영·박현규 교수를 만났다. 필자는 이번 亂中日記(난중일기) 현장 답사기간(7월22∼29일) 가운데 처음 2박3일간을 순천향대학교에서 주최하는 「李충무공 전승지 해상·국토 순례」(7월22∼26일)를 따라가기로 했다. 순례에는 전국에서 지원한 고교생 104명 그리고 순천향大 학생 21명 등 모두 165명이 참가한다.
 
  오후 1시, 순례단원들은 순천향대학교 강당에 집합했다. 오후 3시, 관광버스 세 대에 분승한 순례단은 아산시 염치면 백암리 사적 제155호 李忠武公 遺墟(이충무공 유허)에 도착했다.
 
  이곳의 성역화는 1966년, 朴正熙(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주도로 이뤄졌다. 境域(경역)이 10만여 평으로 크게 확장되고, 顯忠祠(현충사)와 유물전시관이 새로 건립되었다.
 
  먼저 李충무공의 영정을 모신 사당 현충사로 갔다. 사당 안에는 장우성 화백이 그린 장군의 영정이 중앙에 모셔져 있다. 단아한 선비의 모습이다. 벽면에는 문학진·정창섭·장우성 화백이 합작으로 그린 「한산대첩도」 등 기록화 10폭이 전시되어 있다. 한글 현판 「현충사」는 朴正熙가 썼다. 순례단은 빗발을 피해 처마 밑에 도열하여 조별로 참배했다.
 
  이곳에 이순신의 사당이 처음 설립된 것은 숙종 32년(1706)이었다. 이듬해 왕은 현판 「顯忠祠」를 내렸다. 
  
    
  7640.jpg arrow.gif亂中日記는 水軍 지휘를 위한 메모
  
  이어 유물전시관으로 갔다. 이곳엔 국보 제76호 亂中日記를 전시하고 있다. 난중일기는 충무공 이순신이 임진왜란·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쓴 일기다. 난중일기가 시작된 날은 선조 1592년, 곧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 음력 1월1일(이하 이순신 및 壬亂 관련 일자는 모두 음력)이다. 일기가 끝난 날은 왜적과의 마지막 싸움에서 전사하기 이틀 전인 1598년 11월17일이다.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은 武官이면서도 달필이며, 文體(문체)는 간결체다. 後世(후세)의 누군가가 읽을 것을 의식하여 쓴 글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일기에는 왜(why), 어떻게(how) 등을 과감하게 생략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순신 연구로 저명한 키타지마 만지(北島萬次) 日本公立女大 교수는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조선 水軍을 지휘하기 위한 메모』라고 평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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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중일기에는 「조선왕조실록」에 나오지 않는 얘기가 많다. 조선 水軍의 현황과 왜란에 대처하기 위한 준비, 특히 이순신 휘하의 목수·石工·弓匠(궁장) 등 職人(직인), 노비, 피난민, 승려, 병졸 등의 역할도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다.
 
  난중일기는 바쁜 陣中생활 틈틈이 기록한 것이지만, 문장이 유려하다. 그는 兵法書(병법서) 한 권을 손에 잡으면 하룻밤을 밝혀 독파하는 독서인이었던 만큼 그런 문장력을 구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국보 제76호의 정식 명칭은 「李忠武公 亂中日記 附 書簡帖 壬辰狀草」(이충무공 난중일기 부 서간첩 임진장초)다. 그가 상부에 전황을 보고하고 지시를 청한 문서인 壬辰狀草, 가족·친지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書簡帖과 더불어 국보 제76호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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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충무공의 유물로는 장검 2점, 玉鷺(옥로: 갓 위에 다는 해오라기 모양의 玉 장신구) 1점, 腰帶(요대) 1점, 桃盃(도배) 1쌍 등이 전시되고 있는데, 보물 제326호로 일괄 지정되어 있다. 장검은 1594년 4월 閑山島(한산도) 진중에서 太貴連(태귀연), 李茂生(이무생)이 만든 것으로, 칼몸에 다음과 같은 이순신의 친필 劒銘(검명) 16자가 새겨져 있다.
 
  三尺誓天 山河動色(석자 되는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떨고)
 
  一揮掃蕩 血染山河(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
 
 
  arrow.gif牙山은 어머니의 친정 있던 곳
  
7643.jpg   「李충무공 유허」에는 그가 기마술을 연마했다는 치마장, 궁술을 연마했다는 활터,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宗家(종가)와 旌閭(정려)가 있다. 이순신의 셋째 아들로서 1597년 牙山에 침범한 왜군과 맞서 싸우다 21세의 나이로 전사한 이면의 묘도 있다.
 
  현충사 참배를 끝내고 순례단은 李충무공 묘소로 이동했다. 묘소는 현충사에서 9km 떨어진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 중턱에 있다. 묘소 참배를 끝내고 순천향대학교로 되돌아왔다. 고교생·대학생들과 어울리는 일은 매우 즐겁다. 순천향대학교 기숙사에서 1박했다.
 
  이순신은 1545년(인종 원년) 3월8일(음력·이하 동일) 서울 乾川洞(건천동: 지금의 중구 인현동 1가)에서 德水(덕수) 李씨 貞(정)의 4남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지금, 그의 생가 터에는 왕년의 名배우 신영균씨 소유의 명보극장이 들어서 있다. 소년기 이순신의 행적에 관해서는 동네아이들과 함께 南山에 올라가 전쟁놀이를 하면서 대장 역할을 했다는 정도의 일화 이외엔 이렇다 할 기록이 없다. 
  7644.jpg
  그는 소년기에 충남 牙山으로 이주했다. 그렇다면 이순신 집안의 형편을 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순신의 조부 白祿(백록)은 깨끗한 선비로서 명망이 있었는데, 中宗(중종) 때 급진 개혁주의자 趙光祖(조광조) 일파를 숙청하는 己卯士禍(기묘사화)에 얽혀들어 큰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아버지 李貞은 스스로 결심한 바가 있어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白頭(백두: 평민)로 지냈다.
 
  이순신의 어머니는 草溪(초계) 卞씨 守琳(수림)의 딸로 그녀의 친정이 아산고을 백암리(지금 현충사가 있는 뱀밭 마을)에 있었다. 서울생활이 어려워지자 李貞은 부인의 친정이 있는 이곳으로 옮겨 살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이순신에게는 외가인 牙山 백암리가 그의 고향처럼 되어버렸다.
 
  牙山 이주 당시 이순신의 나이에 대해서는 8세, 13세, 16세, 18세 說(설) 등이 있는데, 필자는 열여섯 전후로 추측한다. 왜냐하면 1591년 좌의정 柳成龍(류성룡)이 『이순신과는 이웃에 살아 일찍이 그의 인물됨을 잘 안다』면서 그를 宣祖에게 임란 1년2개월 전 전라좌수사로 천거했기 때문이다.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의 품성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천거하려면 적어도 청년기 초입까지는 지켜보아야 할 것 아니겠는가? 류성룡은 이순신보다 세 살 위로서 이순신의 둘째 형 堯臣(요신)의 친구였다.
 
출처:월간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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