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답사기 입선 수상작]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무실의 명가, 명재고택

                                                              - 박병원

 
당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저명한 인물에 의해 윤리적 가풍이 형성되고, 그 가풍이 종택을 중심으로 후손들에 의해 오랜 시간동안 전수되어 오늘에 이르는 집안을 ‘명문가’라 부른다. 다시 말해 명문가란 선구적 인물, 오랜 가풍과 고택, 전통을 존중하는 종손을 필요조건으로 하는 명예로운 가족집단을 말하는 것이다.

명재고택은 이러한 명문가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는 종택이다. 그래서 이번 답사는 명재고택이라는 장소성에 배어있는 오랜 가풍을 통해 명문가에 면면히 흐르는 정신을 체험하고 우리의 전통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는 답사였다.
 

명재고택은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천리에 있다. 노성산의 양지바른 남쪽자락에 위치하고 있는데 풍수상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의 명당자리라고 한다. 고택앞 너른 마당에는 큼직한 연못을 두어 지기가 빠지는 것을 비보하고 있고, 사랑채 누마루 앞에는 아담한 금강산이 꾸며져 있다.

이 명당자리에서 명문가를 잉태한 선구적 인물, 명재 윤증(明齋 尹拯 : 1629-1711) 선생은 양란이후 사림의 지배체제가 동요하고 붕당의 대립이 격화되던 17세기 조선사회에서 사상계의 거목으로 활약하던 학자이자 정치가였다. 무실(務實)과 실심(實心)을 강조한 성리학자요 예학자로서 명재선생은 평생을 향촌에 은거하며 학문을 닦아 백의정승이라 불렸다. 명재선생이 정치가로서 소론의 영수가 된 것은 그의 스승이자 당대 최대정치세력이던 우암 송시열과의 대립때문이었다. 정치적·학문적 입장차이에다 부친의 묘갈명을 둘러싼 개인적 은원이 겹치면서 이른바 ‘회니시비’를 벌이게 된 것이다.
 

주자학 절대주의와 보복의 정치관으로 점철되었던 17세기 조선에서 명재선생은 상대주의적 세계관과 무실(務實:實에 힘씀)의 정신을 바탕으로 사문난적도 포용하는 화합의 리더십을 제시하였다. 또한 그의 탁월한 인품과 학덕은 향촌사회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정신으로 표출되었고, 자손들에게는 청빈과 검소, 그리고 약자에 대한 배려의 정신이 되어 가풍으로 이어지게 된다. 명재고택의 곳곳에는 이러한 명재선생의 고매한 정신과 솔선수범의 실천적 가풍이 스며있었다.

중요민속자료 제190호로 지정되어 있는 현재의 명재고택은 사실 명재선생이 평소 거주하던 집은 아니었다. 원래는 여기서 몇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유봉영당 옆에 소박한 초가삼칸을 짓고 사셨다고 한다. 현재의 고택은 명재선생의 장자인 윤행교가 1709년경 건립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명재故택”이라 부른다.

조선시대의 다른 종택들처럼 명재고택도 유교적 전통에 따라 남성들의 공간인 사랑채, 여성들의 생활공간인 안채, 조상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의 영역으로 구별되는 형식을 따르고 있다. 우리 한옥은 조선사회의 유교적 윤리가 반영되어 있다. 특히 배치와 구성에 있어 남녀상하의 차별이 뚜렷이 드러난다. 남자의 공간이자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인 명재고택의 사랑채도 이에 따라 안채에 비해 높고 웅장하며 개방적인 모습을 갖추었다. 그러나 사랑채의 권위적 외양에도 불구하고 손님을 대접하는 하인이나 여자들을 배려한 시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이 명재고택의 실용신안이라 할 ‘미닫이여닫이문’이다. 이 문은 뒷문으로 연결된 골방과 사랑방 사이에 한쪽은 여닫이로 다른 한쪽은 미닫이로 되어 두 짝을 합쳐 밀면 활짝 열리도록 설계되어 있다. 안채에서 준비된 음식 등을 골방을 통해서 큰방으로 옮길 때 편리하도록 독특하게 고안된 것인데 약자에 대한 배려와 무실의 가풍에서 이러한 기발한 발상이 나오게 된 것이다.

한옥의 격식을 잘 갖춘 사랑채의 누마루는 양쪽의 분합문을 걸쇠에 걸어 올리면 전면의 연못을 조망하거나 앞의 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데 마치 요즘 TV의 와이드 화면을 보는 듯 시원하다. 그리고 분합문 아래 턱은 팔을 괴고 앉아 편히 쉴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곳에서도 인체공학적인 실용성과 이용자에 대한 따스한 배려가 느껴진다.
 

 
                                               <명재고택의 입구>
 

명재고택 안채의 초입에서는 개방성이 눈에 띈다. 솟을대문과 그 옆에 위치하는 행랑채가 없어 그러한데 이러한 개방성은 향촌민과 친밀한 생활을 한 가풍과 무관하지 않은 듯 하다. 그런데 이러한 과도한 개방성은 여성들만의 공간인 안채에는 아무래도 부담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안채 입구에 내외벽을 두었다. 내외벽으로 인해 방문자는 입구에서 곧바로 안채로 향하지 못하고 오른쪽으로 한걸음 돌아 들어가야 하는데 내외벽 밑에는 공간을 두어 방문자의 발걸음이 보이도록 하였다. 안채에 기거하는 여성들이 안채로 들어오는 사람의 발을 보고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세심한 배려가 돋보인다.


                                     <명재고택의 안채>
 

여성들이 기거하는 공간인 안채는 폐쇄적이고 은밀한 것이 특징이다. 남녀유별의 유교윤리하에서 명재고택의 안채도 사랑채에 비해 낮고 깊은 곳에 위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재고택에서 볼 수 있는 안채의 구조는 대단히 파격적이고 여성을 배려한 섬세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안채의 대청은 일반적인 사대부집 대청보다 2칸이 더 큰 8칸인데 대청마루 양 모퉁이의 팔각기둥은 사람이 이동하거나 집고 올라서기 편하도록 고안되어 있다. 대청마루의 창에는 옹이 구멍이 있는데 그것이 대칭인 것이 재미있다. 시각적으로 대칭이라 아름다움에 한번 놀라고, 오랜세월을 유지하기 위해서 뒤틀림의 정도를 맞춘 것이기도 하니 그 지혜에 또 한번 놀라게 된다.

부엌쪽으로 창고가 있는데 창고와 안채의 배치를 나란히 하지 않고 좀 틀어지게 배치하였다. 이에 따라 양 건물 사이의 폭이 앞쪽과 뒤쪽에 차이가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넓은 쪽방에는 부피가 큰 물건을, 좁은 쪽 방에는 작은 물건을 보관하여 거동의 불편함을 덜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게다가 두 건물이 처마를 마주할 정도로 바짝 붙어 있는데도 햇볕을 잘 받을 수 있고, 빗물의 배수 및 바람의 통풍이 원활히 잘 되게 한다. 건물 배치에도 그곳에 사는 사람에게 미칠 채광과 보온 등을 배려한 놀라운 과학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바라지창을 통해 바라본 장독대>
 

명재고택 후원에는 장독대가 옹기종기 소담스럽게 놓여 있다. 일반적으로 장독대는 햇빛이 잘드는 집 전면에 놓이는 것이 보통이나 명재고택의 후원이 산지로 향하여 솟아있어 햇빛이 잘 들므로 이곳에 장독대가 배치된 것이다. 그 장독대 앞에는 나지막한 굴뚝이 자리잡고 있다. 굴뚝을 나지막히 한 것에도 사연이 있다고 한다. 굴뚝을 낮게 함으로써 연기가 밖으로 흐르지 않도록 하여 행여 배고픈 서민들이 느낄 서러움을 배려한 것이라고 하니 이 사대부가에 흐르는 애민정신의 가풍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명재선생에 의해 형성되고 명재고택의 여기저기에 배어있는 윤리적 가풍은 오랜 기간 이를 전승해온 후손들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이 집안은 큰 흉년이 들었을 때는 마을 사람들을 돕기 위해 신작로에 석축을 쌓는 공사를 벌여 빈자들을 구휼하기도 하고, 집안사람의 생일이면 생일잔치를 생략하고 그 대신 마을 사람들에게 쌀을 나누어주는 등 가풍을 실천하였다. 그런 덕분에 동학이나 6·25 같은 격동 속에서도 명재고택은 아무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명문가 집안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수백년 세월의 풍파에도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게 한 힘이 되었던 것이다.

이번 명재고택의 답사를 통해 진정한 명문가의 참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현대를 살아가는 졸박한 도시인들에게 자신과 삶에 대한 성찰적 모티브로서 이 명문가의 아름다운 전통이 잘 보존되고 전승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