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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국보 제24호 (1) 경주 석굴암 석굴(慶州 石窟庵 石窟)
글쓴이 tntv 등록일 [2017.07.02]
▲1913년 보수공사 때의 모습, 주실(主室)만이 실내개념으로 지하구조였으며, 비도(扉道)의 좌우 인왕상부터는 외부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주실 입구의 좌우 2개의 기둥위에 작은 가로보 석재가 이때는 보이지 않는다. /성균관대 박물관 
▲1913년 보수공사 때의 모습, 주실(主室)만이 실내개념으로 지하구조였으며, 비도(扉道)의 좌우 인왕상부터는 외부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주실 입구의 좌우 2개의 기둥위에 작은 가로보 석재가 이때는 보이지 않는다. /성균관대 박물관

문화재청 설명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대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으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렀다. 경덕왕은 신라 중기의 임금으로 그의 재위 기간(742∼765) 동안 신라의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데, 석굴암 외에도 불국사, 다보탑, 삼층석탑, 황룡사 종 등 많은 문화재가 이때 만들어졌다.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 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조각했으나 지금은 38구만이 남아있다. 석굴암 석굴의 구조는 입구인 직사각형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360여 개의 넓적한 돌로 원형 주실의 천장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이다.

석굴암 석굴의 입구에 해당하는 전실에는 좌우로 4구(軀)씩 팔부신장상을 두고 있고, 통로 좌우 입구에는 금강역사상을 조각하였으며, 좁은 통로에는 좌우로 2구씩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원형의 주실 입구에는 좌우로 8각의 돌기둥을 세우고, 주실 안에는 본존불이 중심에서 약간 뒤쪽에 안치되어 있다. 주실의 벽면에는 입구에서부터 천부상 2구, 보살상 2구, 나한상 10구가 채워지고, 본존불 뒷면 둥근 벽에는 석굴 안에서 가장 정교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서 있다.

원숙한 조각 기법과 사실적인 표현으로 완벽하게 형상화된 본존불, 얼굴과 온몸이 화려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용맹스런 인왕상, 위엄 있는 모습의 사천왕상, 유연하고 우아한 모습의 각종 보살상, 저마다 개성 있는 표현을 하고 있는 나한상 등 이곳에 만들어진 모든 조각품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에서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특히 주실 안에 모시고 있는 본존불의 고요한 모습은 석굴 전체에서 풍기는 은밀한 분위기 속에서 신비로움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의 본존불은 내면에 깊고 숭고한 마음을 간직한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모든 중생에게 자비로움이 저절로 전해질 듯하다.

석굴암 석굴은 신라 불교예술의 전성기에 이룩된 최고 걸작으로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어 더욱 돋보인다. 석굴암 석굴은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석굴암은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재되었다. 현재 석굴암은 내부 전면 공개 관람 시 항온항습 등의 문제가 우려되어 1976년부터 유리벽을 통한 외부관람을 시행하고 있다.


국보 제24호 석굴암

그동안의 국보 소개로 올린 것 중 어느 하나 소홀하거나 상대적으로 우열을 가릴 것이 있을까마는 석굴암은 단연 그중 제일이다. 석굴암은 기존에 소개한 국보들처럼 하나의 불상이나 탑, 석등, 기념비, 문, 절집 당우 등의 단품이 아니라 모두 40구의 불상, 보살상과 나한, 거사 등이 모셔져 있되 그저 복잡한 종교적 인물상을 나열한 것이 아니다. 한두 개의 뛰어난 조각상이 아니다.

▲석굴암 전경, 토함산을 올라 주차장에서 십 여분 걸으면 언덕 위에 석굴암이 보인다. 멀리서는 목조건물만 보일 뿐이다.
▲석굴암 전경, 토함산을 올라 주차장에서 십 여분 걸으면 언덕 위에 석굴암이 보인다. 멀리서는 목조건물만 보일 뿐이다.

세계적 석굴을 만든 건축공학적 우수함과 돌을 깎아 만든 여러 가지 인물상들의 환조와 부조의 뛰어난 예술성, 수만 권의 불경과 교리서로 해설해야 할 만큼 복잡하고 심오한 불법과 불국의 세계를 표현한 교리적 오묘함, 심지어 자연 친화적인 온도와 습도 조절의 기능을 유지한 비결 등 21세기의 과학기술로도 재현하기 어려운 종합적인 결정체가 바로 이 석굴암이다.

▲가까이 다가가면 정면 3칸, 측면 1칸의 건물에 맞배와 팔작지붕이 겹쳐진 건물과 그 뒤편에 붕긋하게 솟아올라 석굴임을 알 수 있는 인공지형이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가까이 다가가면 정면 3칸, 측면 1칸의 건물에 맞배와 팔작지붕이 겹쳐진 건물과 그 뒤편에 붕긋하게 솟아올라 석굴임을 알 수 있는 인공지형이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지난 1995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세계의 보물이다. 한두 페이지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선뜻 답사기를 쓰기도 쉽지 않다. 두 편으로 나누어 올려본다.


창건 설화

삼국유사 권5 효선 제9(孝善 第9)에 대성효이세부모(大成孝二世父母) 신문왕대(神文王代) 내용이 있다. 즉, 대성이 두 세상의 부모에게 효도하다(신문왕대) 라는 말인데 그 본문을 해석하여 옮기면 다음과 같다.

모량리의 가난한 여인 경조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머리가 크고 정수리가 평평한 것이 마치 성(城)과 같아 이름을 대성(大城)이라 하였다. 집안이 가난하여 키울 수가 없었으므로 부자인 복안의 집에 가서 품팔이를 하였는데, 그 집에서 몇 이랑의 논을 주어 의식의 밑천으로 삼게 하였다.

이때 덕망 있는 승려 점개가 흥륜사에서 육륜회를 베풀고자 하여 시주를 받으러 복안의 집에 이르자, 복안이 베 50필을 시주하였다. 점개가 주문으로 축원하였다.

“신도께서 보시를 좋아하므로 천신이 항상 보호하여 하나를 보시하면 만 배를 얻게 될 것이니, 바라건대 안락을 누리고 장수할 것입니다.”

대성이 그 말을 듣고 집으로 달려와 그의 어머니에게 말하였다.

“제가 문밖에 온 스님이 외우는 소리를 들으니, 하나를 시주하면 만 배를 얻는다고 합니다. 생각해보면 저는 전생에 좋은 일을 한 것이 없어 지금 이렇게 가난한 것입니다. 이제 또 시주를 하지 못한다면 오는 세상에서는 더욱 가난할 것입니다. 우리가 품팔이로 얻은 밭을 법회에 시주하여 후세의 응보를 도모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어머니도 좋다고 했으므로 밭을 점개에게 시주하였다. 얼마 후 대성이 죽었다. 그날 밤 나라의 재상 김문량의 집에 하늘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모량리의 대성이란 아이가 이제 너의 집에 태어나려고 한다.’ 집안사람들이 깜짝 놀라 모량리에 사람을 보내어 조사해 보게 하니 대성이 과연 죽었다고 하는데, 하늘에서 소리가 들리던 날과 같은 때였다.

김문량의 부인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왼쪽 주먹을 펴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7일 만에 폈는데 '대성'이란 두 글자가 새겨진 금패를 쥐고 있었으므로 이름을 다시 대성이라 짓고 그의 어머니를 맞이하여 집안에 두고 함께 봉양하였다. 대성이 어른이 된 뒤에는 사냥을 좋아했는데, 어느 날 토함산에 올라가 곰 한 마리를 잡고 산 아래 마을에서 묵게 되었다. 대성의 꿈에 곰이 귀신으로 변해 시비를 걸며 말하였다.

“너는 무엇 때문에 나를 죽였느냐? 내가 다시 너를 잡아먹겠다.”

대성이 두려워하며 용서를 비니, 귀신이 말하였다.

“나를 위해 절을 지어줄 수 있겠느냐?”

대성이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하고 꿈에서 깨어났는데, 이불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이후부터는 사냥을 하지 않고 꿈속에 나타났던 곰을 위해 장수사(長壽寺)를 세웠다. 이 일로 해서 감동하는 바가 있어 자비로운 바람(悲願)이 더욱 독실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서 이승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佛國寺)를 세우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불사(石佛寺)를 세워, 신림과 표훈 두 승려에게 각각 절에 머물도록 부탁하였다. 대성은 아름답고 큰 불상을 세워 길러준 부모의 노고에 보답하였으니, 한 몸으로 전세와 현세의 두 부모에게 효도한 것이다. 이것은 옛날에도 듣기 어려운 일로 과연 시주를 잘한 징험을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성이 석불을 조각하려고 큰 돌 한 개를 다듬어 감실을 만드는데, 갑자기 돌이 세 쪽으로 쪼개졌다. 그래서 분통해 하다가 얼핏 선잠이 들었는데, 밤중에 천신이 내려와 감실을 다 만들어 놓고 돌아갔다. 그래서 대성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급히 남쪽 고개로 올라가 향나무를 태워 천신에게 공양을 올렸다. 그러므로 그 땅을 향고개(香嶺)라 한다. 즉,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위해 세운 것이다.


수리, 보수공사와 문제점(신라역사과학관 자료 발췌)

이러한 석굴암이 근세에 들어 처음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된 것은 1907년 일본인 우체부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세계적 문화유산인 석굴암의 수난이 시작되기 시작한다. 당시 석굴암이 많이 훼손되어 있던 관계로 1913년부터 1962년에 이르는 오랜 시간 동안 석굴암의 중수 공사가 이루어지면서 석굴암이 지금의 많은 문제점을 가져오게 된다.

문제점 1) 1913년경의 일본인들에 의한 수리 공사

당시 수리 공사를 하던 일본인들은 석굴암을 이루고 있던 석재들을 완전해체하고 재조립하는 과정에서 많은 오류를 남기게 된다. 이중 가장 큰 오류로 여겨지는 것이 돔 외부를 보강하고 있는 콘크리트에 있다. 이로써 궁륭 내부의 고온다습한 공기의 흐름을 차단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지금의 이슬 맺힘 현상(결로현상)을 유발했다.

문제점 2) 1917년, 1924년경의 수리공사

이 같은 결로현상으로 인해 내부벽면에 많은 청태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이를 제거할 목적으로 증기세척을 가하게 된다. 이는 내부 석재의 수명에 치명타를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문제점 3) 1962년경의 우리나라 문화재관리국에 의한 수리공사

문화재관리국은 먼저 석굴암 전실에 목조로 된 가옥을 만들게 된다. 또한, 1913년에 설치한 콘크리트 돔 위에 또다시 콘크리트 돔을 만들게 된다. 그리고 1966년경에는 내부 결로현상을 막기 위해 기계장치들을 설치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기계장치로 인해 내부의 습기 문제는 다소간 해결을 하였으나 많은 기계장치의 소음과 진동으로 인해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1970년대 중반경에는 결국 석굴암의 과학적 보존을 위해 전실 앞부분에 유리로 차단막을 설치함으로써 일반 관람객들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 이상은 신라 역사과학관의 자료에 제시된 문제점들이다.

직접 보수 유지에 관여하는 담당 전문가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문제점들이지만 우리 같은 일반 탐방객이나 답사군, 불교 신자들에게는 무엇보다 유리 벽 밖에서 넘겨다 보아야 하는 답답함이다. 석굴에 목조건물을 덧대어 지음으로써 매우 옹색해졌음은 물론 그 답답한 실내에 다시 유리 벽을 설치하여 나도 모르게 창밖의 남자, 여자가 되어 세계적 문화재이자 우리의 자랑거리인 석굴암을 매우 단편적으로 건너다보기만 해야 한다. 게다가 실내 촬영금지까지 엄중하게 쓰여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 생전에 단 한 번이라도 안으로 들어가 본존불을 한 바퀴 휘돌아 살펴보며 둥근 벽의 위아래 불상들까지 세세히 살펴볼 수 있을까?


석굴암의 구조

석굴암은 자연 동굴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 둥근 천장을 씌운 후에 흙을 덮어 인공 석굴을 만든 것이다. 따라서 석굴암이 아니라 석불사(石佛寺)라는 옛 이름이 맞는 것 같다. 언제 석굴암이 되었을까?

석굴암은 크게 본존불이 계시는 주실과 통로인 비도, 참배자가 참배를 드리는 전실의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뒤쪽 원형의 주실(主室)은 높이 9.3m 높이의 석굴에 본존불을 중심으로 둥근 원형구조에 아래 위층에 다양한 불, 보살들을 새겼고 앞쪽에 네모난 모양의 전실(前室)은 원래 지붕이 없이 밖에 드러난 예배 공간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꺾어졌던 부분을 펴고 목조건물을 달아 지으니 저절로 지붕이 생겨 원래의 모습을 알기 어렵게 되었다.

좌우로 팔부신중이 조각되고 입구 좌우에 인왕상을 새겼다. 이 주실과 전실을 연결하는 비도(扉道)는 좁고 짧은 연결 복도인 셈인데 사천왕상을 좌우로 2구씩 조각하였다. 바로 그 시대에 통용되던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이론에 따른 구조가 아닌가 싶다.

▲석굴암 구조와 평면도.
▲석굴암 구조와 평면도.
특히나 주실의 천장은 360여 개의 넓적한 돌로 둥근 형태의 모습을 꾸며 지탱하게 하였으며 천장 덮개는 20톤이 넘는 연화문을 새긴 거대한 돌을 둥글게 깎아 덮음으로써 아름다움의 극치로 완성의 마무리를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것들을 하나도 살펴볼 수 없이 그저 유리창 밖에서 평면도 개념의 정면 본존불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전실(前室)

위 그림에서 전실의 팔부중상 8구는 지금처럼 좌우 4구씩이 평면으로 마주 보는 형태가 아니라 4번, 8번은 안으로 구부러져서 금강역사 A, B와 마주 보는 구조였다. 즉 [  ] 형태였던 것인데 1960년대 초 공사과정에서 4, 8번을 일자로 펴고 목조건물을 잇달아 지음으로써 예배와 공양을 올리는 (지붕이 없는) 옥외공간이었던 전실(前室)이 정체가 모호한 실내공간이 되었으며, 그마저도 지금은 유리 벽을 설치하여 이곳 속세와는 완벽하게 차단된 외딴 섬 같은 곳이 되고 말았다.

▲1913년 보수공사 때의 모습, 주실(主室)만이 실내개념으로 지하구조였으며, 비도(扉道)의 좌우 인왕상부터는 외부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주실 입구의 좌우 2개의 기둥위에 작은 가로보 석재가 이때는 보이지 않는다. /성균관대 박물관
▲1913년 보수공사 때의 모습, 주실(主室)만이 실내개념으로 지하구조였으며, 비도(扉道)의 좌우 인왕상부터는 외부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주실 입구의 좌우 2개의 기둥위에 작은 가로보 석재가 이때는 보이지 않는다. /성균관대 박물관
이렇게 원래의 전실(前室)은 외부공간이었던지라 복도나 출입문 역할을 하는 비도(扉道)로 들어서는 좌우에 금강역사상, 즉 인왕상 2구(A, B)를 좌우로 배치하여 입구를 경계하는 모습을 구현하였던 것이다.


비도(扉道)

일반적인 예불과 공양은 외부인 전실(前室)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나 본존불 앞에 특별히 공양물을 올리거나 실내로 들어가야 할 경우에는 출입문이자 통로 역할을 하는 좁고 짧은 공간, 비도(扉道)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고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현재의 석굴암 정면사진, 유리벽 너머에서 찍었는데 비도 좌우측 2구의 인왕상이 보이고 정면에 본존불이 보인다. 위 1913년 공사 때 사진에서는 안 보이던 전실 입구 2개의 기둥 위에 가로보 석재가 생겨 본존불의 시선을 차단할 듯하다.
▲현재의 석굴암 정면사진, 유리벽 너머에서 찍었는데 비도 좌우측 2구의 인왕상이 보이고 정면에 본존불이 보인다. 위 1913년 공사 때 사진에서는 안 보이던 전실 입구 2개의 기둥 위에 가로보 석재가 생겨 본존불의 시선을 차단할 듯하다.

비도의 밖에는 2구의 금강역사상(인왕상) A, B를 세웠으니 일반 사찰의 금강문(金剛門)인 셈이며, 짧고 좁은 통로의 좌우에는 각각 2구씩의 사천왕상 가, 나, 다, 라를 조각하여 천왕문(天王門)을 지나 금당에 이르는 구조를 그대로 구현한 것이다. 실제로는 아치형의 석문(石門)이 세워져 있고 비도를 나서 주실로 들어가는 즈음에 다시 2개의 돌기둥을 세웠다.


주실(主室)

주실은 본존불을 모신 석굴암의 주법당인 셈인데 보수공사를 하고 유리 벽을 설치한 60년대 이후 50년 가까이 일반인의 발길이 금지된 공간이다. 부처님을 너무 외롭게 한 건 아닌지? 비도를 지나면 입구 좌우에 2개의 돌기둥이 서 있고, 내부는 둥근 구조이며 천장은 돔형 지붕이 높게 구성되어 본존불이 어느 날 벌떡 일어나시더라도 머리가 부딪치거나 좌우 공간이 움직이기에 부족하지는 않을 듯하다.

다만 일반 참배객들은 유리창 너머로 2개의 돌기둥 사이의 본존불만 겨우 볼 수 있을 뿐 둥글게 둘러싼 원형 벽이 어떤 모양, 어떤 구조인지? 거기에는 어떤 불, 보살들이 새겨져 있는지? 그밖에 어떤 장엄과 꾸밈이 그곳에 모셔져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다.

더욱 아쉬운 것은 이러한 '눈앞에 있으되 볼 수 없고, 볼 수 없으니 알 수도 없는' 구조에 감춰진 저 대단한 국보의 자세한 면면을 상세히 설명하는 설명문 하나, 안내판 하나가 없다. 한쪽 구석에 책상을 놓고 앉아서 시주금 접수대장을 펼쳐놓고 있을 뿐이다.

개개의 상세한 설명은 ②편에서 하기로 하고, 여기 ①편에서는 개략적인 구조를 설명하면, 가운데 본존불을 중심으로 주실은 둥근 모양으로 벽면을 둘러짓고 본존불 바로 뒷면에는 십일면 관음상을 세웠고 그 좌우로 각각 5구씩 모두 10구의 불, 보살을 모셨는데 입구 좌우로는 대범천과 제석천이 있고 그다음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모셨으며 그 안쪽으로는 부처님 10대 제자를 좌우로 각각 5명씩 조각하여 둘러 세웠다.

또한, 석굴암의 특징 중 하나는 본존불의 광배를 본체에 붙이거나 등 뒤에 세우지 않고 둥근 벽의 뒤쪽, 정면에서 볼 때면 본존불의 뒷머리에 위치하는 곳 벽면에 새겨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 입체적으로 느껴지게 한 점이다. 그리고 그 광배의 높이쯤, 그러니까 빙 둘러 세운 보살상들 위로 2층 구조가 되는 자리에는 10개의 감실을 파고 보살상들을 새겼는데 그중 2개는 분실되어 비어있는데 일본 강점기에 도난당했다 하니 당시 관계된 일본인이 훔쳐갔다는 설이 있다.

결국, 지금의 석굴암은 지어진 당시와 비교해볼 때 너무나 많이 변형되고 망가지고 도난당한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또한, 엄밀히 말하면 석굴암 전체를 유리 벽 속에 가둬놓고 한 치도 들어가지 못한 채 밖에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공사, 복원 과정에서 습도 조절 등의 균형을 깨뜨린 후 생긴 일이라지만 너무나 아쉬운 부분이다.

벌써 몇십 년 전의 상황이므로 지금은 관련 기술이나 공법이 더 좋아지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 가능하다면 목조건축물을 헐어내고 본래의 모습대로 전실은 외부에 위치시키고 비도를 통해서 실내인 주실까지 들어가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을듯하다. 그렇게 한다고 꼭 문화재의 수명이나 보호기능이 현저하게 감소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부분별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설명은 ②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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