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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국보 제9호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扶餘 定林寺址 五層石塔)
글쓴이 tntv 등록일 [2016.11.15]
▲백제 석탑의 완성된 형태로 칭송받는 정림사지 오층석탑.





[국보 탐방] [9] 국보 제 9호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문화재청 자료
공식명칭: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한자 명칭: 扶餘 定林寺址 五層石塔)
지정일: 1962.12.20
테마: 유적건조물, 종교 신앙, 불교, 탑
시대: 백제시대
주소: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

문화재청 설명

백제 시대의 석탑이다.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후 6세기 말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나, 이 일대의 발굴조사에서 정림사 이름이 들어간 고려 시대 기와가 출토됨에 따라 ‘정림사지 오층석탑’으로 불린다. 좁고 낮은 1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이다.

상륜부는 복발을 제외하고는 모두 없어졌다. 높이 8.33m. 탑의 모서리에 세운 배흘림기둥이나 넓은 지붕돌, 들려진 처마선 등은 목조건축의 구조를 모방한 것으로 익산사지 미륵 석탑과 함께 백제 석탑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정림사지 전경. 중문을 들어서서 탑까지 가는 중간에 연못을 파고 다리를 놓아 건너가게 하였다. 5층 탑 뒤에는 금당 터가 자리만 남아있고 그 뒤편 건물은 강당 자리인데 현재 석불좌상 보호각 노릇을 하고 있다.
▲정림사지 전경. 중문을 들어서서 탑까지 가는 중간에 연못을 파고 다리를 놓아 건너가게 하였다. 5층 탑 뒤에는 금당 터가 자리만 남아있고 그 뒤편 건물은 강당 자리인데 현재 석불좌상 보호각 노릇을 하고 있다.

전체가 장중하고 세련된 조형미를 갖춘 이 탑을 모방한 백제식 형식의 탑들이 많이 세워졌다. 이 탑은 목조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과정의 석탑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1층 몸돌(옥신석)에는 백제를 멸한 나당연합군의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을 새겨 넣어, 당시의 상황을 말해주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가 되고 있다.


정림사지(定林寺址) 사적 제301호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시기(538-660)의 대표적인 절터이다. 1942년 발굴조사 때 강당 터에서 나온 기와에서 ‘태평 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太平八年 戊辰 定林寺 大藏唐草)’라는 글이 발견되어, 고려 현종 19년(1028) 당시 정림사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정림사의 주요 건물 배치는 중문, 오층석탑, 금당, 강당에 이르는 중심축 선이 남북으로 일직선 상에 놓이고, 건물을 회랑으로 감싸고 있는 배치를 하고 있다. 그러나 특이하게 가람 중심부를 둘러싼 복도의 형태가 정사각형이 아닌, 북쪽의 간격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으로 되어있다.

발굴조사에서 드러났던 중문 앞의 연못을 되살렸고, 석불좌상을 보호하기 위한 건물은 1993년에 지어졌다. 백제 때에 세워진 5층 석탑(국보 제9호)과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다. 출토유물로는 백제와 고려 시대의 장식기와를 비롯하여 백제 벼루, 토기와 흙으로 빚은 불상들이 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 국보 제9호

▲백제 석탑의 완성된 형태로 칭송받는 정림사지 오층석탑.
▲백제 석탑의 완성된 형태로 칭송받는 정림사지 오층석탑.

백제 시대의 탑으로 온전히 남아있는 것은 이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이다. 그중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은 동, 서탑 중 서탑만 남아있는데 이마저 반쪽은 무너져 시멘트로 채운 무리한 보수를 오랫동안 방치하다가 최근 해체, 보수 후 조립 중에 있고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있는 유일한 탑이 정림사지 오층석탑이다. 언젠가 이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답사했을 때 어느 지인이 느낌을 물었을 때 내 대답은 유구무언이었다. 무어라 보태고 뺄 말없이 있는 그대로가 걸작이었다. 국보였다. 완벽이었다.

백제의 장인들은 기존의 목조가 가진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석재를 택했다. 석탑을 표현함에 있어 목조탑을 재현하기에 그쳤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석재의 가공적 용이함을 위해 규모를 축소하고 세부형식을 간략화하였고, 정림사지 석탑이 축조되었다.

세부 구성형식이 정형화되지 못한 미륵사지 석탑에 비하여 정림사지 석탑은 정돈된 형식미와 세련된 완숙미를 보여준다. 목탑적인 기법을 보이지만 목조의 모방을 벗어나 창의적 변화를 시도하여 완벽한 구조미를 확립한 석탑양식의 시원(始原)이다.

정림사의 창건연대는 사비 천도 이후부터 백제 멸망 전까지인 538~660년에 석탑으로 건립되었는지, 혹은 목탑 이후에 석탑이 건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탑의 양식으로 보아 미륵사지 석탑에서 진일보한 석탑으로서 전형적인 모습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미륵사지 석탑보다는 다소 늦게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비례.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비례.
탑은 낮은 단층기단으로 1층 지붕돌보다 좁고, 각층의 탑신은 우주와 탱주를 세웠는데 1층 탑신의 네 귀퉁이에 세운 우주는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배흘림(엔타시스) 기법으로 세워 목조건축물 느낌을 살렸으며, 각층의 지붕돌은 얇고 넓은데 처마를 살짝 들어 올림으로써 아름다운 지붕을 구현하였고 지붕 받침돌은 사각형의 석재를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서 간략한 공포를 구현하였다.

전체 높이는 약 8.3m로 1층 몸돌은 크게 솟았으나 2층부터는 몸돌의 높이를 크게 줄여서 안정감 있는 체감률을 나타내었다. 그래서 멀리서 보면 그다지 크다는 느낌이 없으나 가까이 다가가면 제법 큰 탑임을 알게 되지만 넓은 지붕돌이 경쾌해 보여 목조 건물을 보는듯한 부드러움과 함께 석탑의 장중함이 무거운 위엄을 느끼게 해주는 완벽한 탑이다.

탑과 탑을 둘러싼 건물들의 배치와 구성은 매우 정교한 수치에 의하여 구성되었다. 탑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우리가 자세히 알지 못하는 수리적 원리가 작용한 때문이다. 탑의 건립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지대석의 크기이다. 지대석의 크기에 의하여 모든 탑은 높이와 너비가 결정된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지대석의 넓이가 14척(그 당시에 주로 사용하던 단위 '고려척')이며, 그 절반인 7척이 이 탑의 건립 기본단위가 되었다.

▲1층 탑신 한쪽에 새겨진 글씨, 희미해져서 식별이 어렵다.
▲1층 탑신 한쪽에 새겨진 글씨, 희미해져서 식별이 어렵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1층 탑신부 한쪽 면에는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킨 후 쓴 것이다. 그런데 한동안 이 글씨 때문에 이 탑을 소정방이 세운 탑이라고 잘못 알기도 하였다.

 
석불좌상(보물 제108호)

정림사지는 금당은 미복원상태이며, 그 뒤편 강당 자리에 1993년 건물을 지어 석불좌상을 실내에 안치하여 보호하고 있다. 즉, 백제 시대 때부터 이곳에 절이 있었으나 그때 이름도 정림사였는지는 알 수 없으며, 고려 시대에는 같은 자리에 절을 다시 지으면서 강당 자리에 금당을 세우고 이 석불좌상을 주불로 모셨던 것으로 보인다. 석불은 오른쪽 팔과 왼쪽 무릎 등이 마멸되어 겨우 형체만 남아 있다. 불상 가슴으로 올라간 왼손으로 보아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건물 안에 모셔진 석불좌상.
▲건물 안에 모셔진 석불좌상.

머리와 갓은 제작 당시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만들어 얹은 것이다. 불상에 비해 팔각 대좌는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데, 세련되면서도 균형 있는 조각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상대는 연꽃이 활짝 핀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중대는 커다란 눈 모양이 새겨져 있으며, 하대는 8개의 연꽃이 엎어진 모습과 안 상을 세련된 솜씨로 새겨놓고 있다. 절터에서 나온 명문 기와로 보아 1025년 절을 중창할 때 조성된 불상으로 추정된다.
 

▲정림사 건물들과 오층석탑을 재현해놓은 모형으로 당시를 상상해볼 수 있다.
▲정림사 건물들과 오층석탑을 재현해놓은 모형으로 당시를 상상해볼 수 있다.
충청도 지방을 답사하다 보면 이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닮은 탑을 많이 보게 된다. 대부분이 이 탑을 모방하여 만들었을 것이다. 그만큼 정림사지 석탑은 이 지역 석탑들의 표본이자 모범이었다. 백제를 대표하는 탑이었다.

원문보기
http://senior.chosun.com/site/data/html_dir/2014/10/20/201410200125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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