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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국보 125호 돌상자[石函]와 뼈단지[骨壺]
글쓴이 tntv 등록일 [2014.01.21]


국보 125호 돌상자[石函]와 뼈단지[骨壺]

국립중앙박물관 통일신라실에 전시 중인 국보 125호 뼈단지와 돌상자는 화장을 한 후 남은 뼈를 담는 안그릇과 그것을 보호하는 바깥그릇인 돌상자가 셋트를 이루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장골용기(藏骨容器)라 부른다. 합형(盒形)의 안단지[內壺]는 항아리와 뚜껑으로 구성되며 전체적인 모양은 구형에 가깝다. 뚜껑은 완만한 반구형을 이루며, 항아리는 짧은 구연에 뚜껑받이턱이 있고 바닥은 둥글다. 항아리와 뚜껑에는 인화문이 화려하게 시문되었고, 안팎으로는 초록색의 유약이 고르게 입혀져 있다. 화강암으로 된 구형의 바깥 돌상자[外函]는 뚜껑과 몸통으로 구성된 합형이며 표면을 꽃모양[花瓣]으로 각이 지도록 다듬었다. 돌상자 몸통 안쪽에는 안단지 몸통이 들어갈 깊이 정도의 U자형 홈을 만들었고, 뚜껑에는 안단지 뚜껑이 덮일 수 있도록 반구형의 홈이 있다.

뼈를 담는 안단지. 연녹색의 고운 색조가 돋보인다. 녹유를 시유한 예는 많지 않으며 당시 최고급 토기나 특별한 용도의 와당(瓦當)에서만 볼 수 있다.

위와 같이 망자를 화장하고 매골(埋骨)하기 위해 만든 녹유 뼈단지와 돌상자는 상당한 공력을 들여 준비된 장골용기라고 생각된다. 안단지[內壺] 안쪽은 진녹색, 바깥쪽은 연녹색의 고운 색조를 띠는데 이러한 녹색의 유약은 통일신라에서 사용했던 연유(鉛釉)의 한가지이다. 녹유를 시유한 예는 많지 않을 뿐더러 당시에 최고급 기종인 사이호(四耳壺), 탁잔(托盞) 등의 특수 기종의 토기나 귀면와(鬼面瓦) 등 특별한 용도의 와당(瓦當)에서만 보인다. 또한 안단지에는 꽃무늬[花文], 점열무늬[點列文], 달개무늬[瓔珞文] 등의 인화문 도장을 반복적이고 규칙적으로 시문하였는데 뚜껑과 항아리의 무늬가 서로 대칭되면서도 균형을 맞추고 있어 그릇 외양의 화려함과 장식적인 효과를 높이려는 제작자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바깥상자[外函] 역시 하나의 화강암을 가공하여 몸통과 뚜껑으로 분리하고, 내용기가 정확히 안치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였으며 외형도 꽃모양으로 섬세하게 가공하는 등 세심한 계획 아래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외용기로 돌상자는 경주 조양동과 화곡동에서 출토된 경우가 있으나 경주를 제외한 지역에서는 발견 예가 전혀 없고 돌상자의 면을 각이 지게 다듬은 것은 국보 125호가 유일하다. 그래서 이 장골용기에 매골된 주인공은 특별한 사람이었고, 그 망자를 저 세상으로 떠나 보내는 의식을 치러야 하는 산 자가 정성을 들여 준비한 장골용기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한편 이 장골용기는 1966년에 일본에서 환수된 1,326점의 문화재 가운데 하나로 한 일본인 수집가에 의해 일본 패망 직전 일본으로 반출되어 도쿄국립박물관에 수장되었던 것으로, 1965년 한일협정에 의해 우리나라로 돌아오게 되었다. 1967년에는 시유된 뼈항아리 가운데 그 뛰어남이 인정되어 국보 125호로 지정되었으며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장골용기로 전시되고 있다.

통일신라의 장골용기

신라에서 화장이 수용된 후 유골을 처리한 방법으로 장골(藏骨)과 산골(散骨)이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문무왕(文武王, 661~681)은 동해 대왕암에 장사지내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이를 화장하고 산골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기록상 처음으로 장골한 사람은 신라의 승려 자장(慈藏)(590~658)인데 화장 후 석혈(石穴)에 뼈를 안치하였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화장 후 유골을 탑파(塔婆)나 부도(浮屠)에 안치한 경우 그 용기는 사리용기(舍利容器)라고 하며 매장하는 용기를 장골용기, 장골용기가 매납된 무덤을 화장묘라 한다.

신라의 화장묘에 장골용기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현재까지 확인된 가장 빠른 화장묘의 장골용기는 경주 동천동에서 조사된 돌널 안에 토기로 된 장골용기와 고배를 부장하고 뚜껑돌을 덮은 것이다. 동천동 화장묘의 장골용기는 유골 매납을 위해 따로 만든 전용 용기는 아니고 당시 고분에 부장되던 유개합을 사용한 것이다.

신라의 장골용기는 대부분 토제이며 항아리 형태가 많아 뼈항아리[骨壺]라고 하지만 다양한 형태가 있다. 대체적으로 7세기에는 전체적으로 반구형의 몸체에 뚜껑이 있는 일상용 토기인 합을 전용(轉用)하여 장골용기로 쓰다가 8세기에는 신라 왕경인 경주를 중심으로 화장묘가 증가하면서 장골용기의 기종이 매우 다양해지고 인화문이 화려하게 시문된다. 9세기에는 다양한 종류와 재질, 문양이 시문된 장골용기와 연결고리가 달린 유개호와 탑형 꼭지가 달린 유개합 등 전용(專用) 장골용기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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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동천동 장골용기], 신라 7세기 국립중앙박물관

[합형 장골용기], 통일신라 8세기 국립공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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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화문 장골용기], 통일신라 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탑형 장골용기], 통일신라 9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유개연결고리 장골용기], 통일신라 815년, 국립경주박물관

장골용기를 사용한 화장묘가 발달한 지역은 신라의 중심지였던 경주이다. 충효동 3호 돌방무덤[石室墓] 봉토, 황성동 23호, 석장동 51·61·62·68·73호, 갑산리 5호, 전 민애왕릉 등 조사된 무덤을 보면 구덩이를 파거나 돌덧널[石槨]을 만든 후 유골을 용기에 담아 안치하였다. 이 외에도 석장동 동국대 학생회관 신축부지, 내남면 화곡1리 출토 장골용기처럼 내·외 이중으로 만든 용기에 유골을 담은 것도 발견되었다. 이중용기는 화장한 뼈를 직접 담는 작은 안단지와 그것을 보호하는 큰 바깥단지로 구성되는데, 안단지로 한 개가 아니라 여러 개를 넣는 경우도 있으며 재료는 주로 토제이다. 한편 경주 조양동 야산에서 발견된 돌상자 안의 당삼채삼족항아리[唐三彩三足鍑]나 동국대 학생회관 신축부지에서 출토된 안단지의 뚜껑으로 사용된 월주요계 청자완 등은 당(唐)으로부터 수입한 최고급 도자기이다. 또 화곡리에서는 12지상이 부장품으로 매납되어 있는 등 경주 지역에서 이중으로 된 장골용기 가운데 특별한 출토 예가 많아 신라 왕경인을 위한 장골용기 제작 특징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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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채 장골용기], 경주 조양동, 통일신라 8세기 국립경주박물관

[녹유 장골용기], 경주 남산, 통일신라 9세기 국립경주박물관

불교와 화장묘

화장의 풍습은 신석기시대부터 나타났지만 본격적인 화장묘의 등장이 불교의 전파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데 이견은 없다. 불교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고대 동아시아인의 생사관에 큰 영향을 끼쳤고 화장은 불교의 장법으로써 각지로 전파되고 정착되었다. 불교의 발생지인 인도에서는 불교 성립 이전부터 육체로부터 영혼을 자유롭게 하여 윤회전생(輪廻前生)을 하기 위해 불[火]로 정화하는 장법에서 화장이 행해졌다. 이후 부처의 장례로 화장(다비茶毘)이 행해진 후 화장은 불교식 장법으로 정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불교의 수용과 확산에 따라 화장이 이루어졌으며, 신라 역시 불교적 생사관의 성립에 따라 화장이라는 장법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전까지 현재의 삶이 내세까지 이어진다는 생각으로 사후 안식처인 무덤을 중요하게 여겼지만 화장으로 인한 매장시설의 간소화는 결국 고분 축조 행위의 종말을 가져오게 되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불교가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면서 불교에서의 끝없는 윤회(輪廻)사상은 죽음에 대한 신라인의 생각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물질적 부속물들을 떨쳐버리고 끝없이 반복되는 일련의 죽음들로부터 해방되어 열반에 이르기 위한 방법으로 불교식 화장 문화도 신라 사회에 깊이 확대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불교가 신라에 깊게 뿌리내리고 불교적 내세관이 신라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하면, 신라인들이 화장을 하고 매골하기 위해 만든 장골용기에서 그들의 어떤 마음을 읽어낼 수 있을까? 현재의 우리가 죽은 이와 그를 떠나보내는 남은 자의 염원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장골용기의 제작이 가장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 신라의 중심지였던 경주 왕경인들의 장골용기에서 일단의 계세적(繼世的) 내세관이 남아 있음을 엿보게 된다. 국보 125호 장골용기를 비롯한 당시 최고급의 재질과 공력을 들여 만든 장골용기는 그들이 가진 권력과 경제적 부를 죽음 이후에도 가져가려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특히나 신라 왕경에서 출토된 장골용기 가운데 사리용기를 모방하여 만들어진 것들이 있는데 이는 신라의 지배층이 예배의 대상물인 불사리의 봉안을 그들의 죽음에 반영하려 하는 모습으로 느껴지게 한다. 현세의 영화로운 삶에 대한 욕망을 끊지 못하는 신라인의 모습은 그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삶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살고 있는 현재 우리의 모습과 맞닿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최성애 |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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