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심체요절 복원 마치자 하반신 마비돼
―병이 왔다니요?
"복원사업 최종 보고를 마친 다음 충북 괴산 작업실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떴는데 배꼽 아래로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갔는데 원인을 모르겠다고 하고…. 휠체어 신세로 보름쯤 지나니 다리에 힘이 돌아와 걸을 수 있었습니다."
―5년 작업이 그렇게 힘든 과정이었나요?
"5년 동안 하루 3시간 이상 잤던 날이 하루도 없었습니다. 그마저도 작업대 앞에서 의자에 기대 눈 붙이는 게 대부분이었습니다. 마비 때문에 온갖 검사를 받다 보니 심혈관 질환, 골다공증, 간 이상도 알게 됐는데 사실 그보다는 5년 작업이 끝난 뒤 찾아온 공허함 때문에 생긴 마음의 병이 컸습니다."
―어떻게 이겨냈습니까?
"돌아가신 스승님 묘를 찾아갔습니다. 제 대(代)에서 기술이 끊기면 나중에 불호령을 듣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습니다. 지금도 고민이 생길 때나 큰비가 온 다음에는 스승님 묘를 찾습니다."
충북 괴산군 연풍면 출신인 그는 배움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공부를 시키는 사람도 없었고 하려는 생각도 없어서 국민학교 4학년이 돼서야 한글을 깨쳤다. 학력도 중졸에서 멈췄다. 그때쯤 부친이 돌아가시고 형편이 어려워지자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무슨 일을 했었나요?
"부모님이 구멍가게를 하셨는데 형편이 어려웠습니다. 7남매 중 넷째인 데다 차남이라서 공부를 밀어주시지도 않았고요. 고등학교 입학을 1년 미루고 괴산 연풍우체국에서 급사로 일했습니다."
―급사요?
"아르바이트 같은 거죠. 우체국에서 받은 전보를 배달하고 한 달에 3만5000원인가 받았습니다. 그 돈 모아서 고등학교 가려고 했는데 부족했습니다. 진학 생각을 접고 서울에서 직장 다니던 큰누나 집에 갔습니다."
―서울에서는 뭘 했나요.
"누나한테 등 떠밀려 독산동 말미고개 아파트 공사장으로 막노동하러 갔습니다. 지나고 보니 막노동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막노동에 교재가 있습니까. 하루는 철근 작업하고, 하루는 미장하고, 그때 목공, 조적(벽돌 쌓기), 전기 배선을 주먹구구식으로 다 배웠습니다. 1984년부터 나무 조각하는 서각 일을 했습니다. 금속활자 일을 시작해보니 활자 조각, 거푸집 제작, 쇳물 녹이는 일에서 막노동 기술을 써먹을 일이 많았습니다. 쇳물 녹이는 도가니 틀도 제가 혼자서 벽돌 쌓아 만들었습니다."
스승의 '욕봤다' 한마디가 최고의 칭찬
그의 스승은 제1대 금속활자 장인 고(故) 오국진 선생이다. 주물공장과 충북도청에서 일했던 오국진은 1991년 직장을 그만두고 사비를 들여 청주 북문로에 작업실을 차리고 옛 문서를 활자로 복원하는 일에 전념했다. 1996년 제1대 금속활자장으로 인정받았고 2008년 별세했다. 열두 명의 제자 중 임인호가 대를 이어 2009년 금속활자장이 됐다.
―서각 하다가 어떻게 금속활자를 했습니까?
"1987년 고향으로 내려와 이듬해 서각 작업장을 열었습니다. 1996년에 TV에서 펄펄 끓는 쇳물을 부어 활자를 만드는 스승님을 봤습니다. 무작정 청주 작업실로 찾아갔습니다."
―바로 문하생이 됐습니까?
"반년 동안 오가면서 인사만 드렸습니다. '제자로 받아주십시오'라고 들이댈 용기나 명분도 없었습니다. 반년쯤 지나니 어느 날 '한번 배워볼텨?'라고 물어보셨습니다. 바로 다음 날부터 출퇴근했습니다."
―가족의 반대는 없었습니까?
"이기적인 가장이었습니다. 서각으로 겨우 생계 유지할 정도였는데 하고 싶은 일 한다고 일은 뒷전으로 미뤘습니다. 분식집을 하던 아내가 떡볶이 팔아서 생활비 마련하느라 고생했습니다."
―45세 이른 나이에 무형문화재가 됐습니다.
"스승님이 돌아가시고 이어받을 사람이 필요했는데 당시 전수 조교는 저 혼자였습니다. 스승님을 도와 전수자들 교육을 돕는 역할입니다. 2004년에 스승님께서 문화재청에 저를 추천하셔서 임명됐습니다."
―수제자였군요.
"그런 생각은 한 적 없었습니다. 스승님은 활자 획(劃)의 1㎜ 차이도 눈으로 잡아내는 완벽주의자였습니다. 유일한 칭찬은 '욕봤다' 한마디였습니다. 그 밑에서 5년 정도 일했을 때 작업실 열쇠 꾸러미를 제게 맡기셨습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데 세상 모든 게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10년 넘게 모시는 동안 겸상 한번 못 해본 스승님이었으니까요."
밀랍 얻으려고 토종벌 키워
금속활자는 섭씨 1200도 쇳물을 틀에 부어 만든다. 온도 설정이 되는 전기로(爐) 대신 전통 방식을 고수한다. 아궁이에 숯과 무연탄을 넣어 불을 키우고 온도를 끌어올린다. 무명실로 짠 옥양목 한복을 입고 일한다. 새하얀 한복은 시뻘건 쇳물과 싸우는 일에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그의 종아리와 허벅지, 팔 군데군데 화상 자국이 보였다.
―복장이 위험해 보입니다.
"옥양목으로 만든 옷인데 이것만큼 불이 잘 붙는 게 없습니다. 그래서 입습니다."
―불이 잘 붙어서 입는다고요?
"쇳물이 튀면 바지춤에 불이 붙습니다. 워낙 뜨겁다 보니 뭘 입어도 불이 나는데 나일론 같은 것은 피부에 들러붙어 화상이 더 심해져요. 옥양목은 피부에 상처가 덜 나게 탑니다. 신기하죠."
―전통을 그렇게까지 고수할 필요가 있을까요?
"고지식하다는 소리도 많이 듣습니다. 하지만 이게 옳은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전기로로 1200도 쇳물을 녹이고 금방 마르는 석고 거푸집으로 활자를 찍어내면 시간도 절약됩니다. 하지만 그걸 우리 전통문화라고 할 수 있을까요?"
―쉽고 빠르게 같은 결과를 내면 좋은 것 아닌가요?
"나무에 조각한 팔만대장경이 어떻게 지금까지 보관될 수 있을까요. 최신 항온·항습기를 써도 불가능할 겁니다. 우리 조상들 지혜를 조금이라도 따라가고자 할 뿐입니다. 금속활자 주조에 꼭 필요한 재료 중 하나가 밀랍입니다. 토종벌을 키워 11월에 밀랍을 채취합니다. 사서 쓸 수도 있지만 서양벌이 아닌 토종벌 밀랍을 쓰려고 20년째 키우고 있습니다."
魂 없으면 무형문화재도 한낱 기술자
그는 1년 과정 금속활자 주조 교육도 하고 있다. 재능을 보이는 수강생에게 전수 교육을 하고 싶지만 선뜻 나서는 이가 없다.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그의 유일한 전수자도 아들 규헌(25)씨다. 중어중문학을 전공한 아들을 반강제로 데려다 일을 가르치고 있다.
―아들이 반발하지 않던가요?
"처음에는 싫다고 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일을 돕긴 했는데 이 일을 전업으로 배우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니까요."
―그런데 왜 시킵니까.
"제가 아직 젊지만 금속활자 맥이 끊길까 너무 두렵습니다. 아들에게 일을 가르치는 것도 결국 제 욕심이고요. 그렇다 해도 아들이 대를 이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기술은 곧잘 따라 하지만 성취감을 못 느끼는 것 같아요. 끝내 성취감을 맛보지 못하면 거기까지겠지요."
―금속활자장 대가 끊길 텐데요?
"그 누구라도 모양만 따라 하고 정신과 혼을 잇지 못한다면 끊기는 겁니다. 똑같은 모양 활자를 뽑아낸다고 대를 잇는 게 아닙니다. 무형문화재라는 이름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낱 기술자이지요."
―그럼 무엇을 이어받는 건가요?
"모래와 밀랍 사이에서 원하는 모습 그대로 활자가 드러날 때, 계산했던 비율대로 활자가 완성돼 활자판 안에 깔끔하게 들어맞을 때, 금속활자용 먹으로 한지에 그대로 옮겨 찍을 때 느끼는 황홀한 감정이 있습니다. 조금 과장하 자면, 그 순간만큼은 온 우주에 저 혼자 있는 느낌입니다."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군요.
"활자에 미친 사람은 느낄 수 있습니다."
활자 제작에 쓰이는 새 조각칼의 칼날 길이는 10㎝ 정도다. 세밀한 획을 표현하려면 칼날 끝을 바늘처럼 유지해야 한다. 임인호의 칼날은 한 달마다 절반으로 닳는다. 그의 작업실엔 몽당연필처럼 짧아진 칼들이 수없이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