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강점기인 1916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성진은 15세에 조선 궁중음악의 원형을 보존하고 전승했던 이왕직아악부양성소에 입소했다. 정악은 이미 몰락해 버린 조선의 왕실 음악이었지만, 음악적 가치를 높게 평가받아 기관이 유지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성진은 2년간 박창균, 김천룡에게 궁중음악을 배우면서, 전공 악기로 대금을 선택했다. 실기에서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내었는데, 대금과 자신이 한 몸인 것처럼 한시도 떼놓지 않고 연주 실력을 연마한 까닭이었다.
그는 1936년 졸업과 동시에 이왕직아악부의 아악수로 임명되면서 평생의 업이 될 대금 연주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아악수가 된 뒤에도 그는 조선시대에 뛰어났던 대금 연주자 최학봉과 정약대에게 사사받은 대금 명인 김계선을 찾아 대금정악을 익히는데 열정을 보였고, 그의 뒤를 이을 수 있었다.
광복 후, 이왕직아악부의 해체, 한국전쟁의 발발 등으로 대금정악의 명맥을 이어가는 것이 녹록하지 않은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김성진은 이런 상황 속에서도 자신이 배우고 갈고닦은 대금 가락을 놓지 않고 견고히 붙들고 있었다.
김계선 명인의 타계 후, 그가 맡았던 라디오 방송을 김성진이 이어받게 되었고, 라디오 방송에 자주 출연해 세상에 대금정악의 명인으로 알려졌다.
그는 1951년에 이왕직아악부를 전승한 국립국악원의 국악사가 되었고, 1962년에는 학예관보, 지도위원, 원로 사범 등 국립국악원 내 다양한 직책을 거치며 활동했다. 아울러 1955년에는 국립국악원 부설로 개소된 국악사양성소에서 오랫동안 많은 대금 전공자들을 가르쳤다. 현역으로 활동하는 50대 이상 대금연주자 중 그의 가르침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사실 대금정악이라는 것은 대금으로 연주하는 정악으로 정악이 합주인 것을 생각할 때 원래 대금정악 독주 가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악을 대금으로 독주를 하면 다양한 음역을 오가며 삼라만상의 소리를 내는 특유의 멋과 흥취가 있다. 이렇게 독주로 연주된 대금정악이 일제강점기 김계선에 의해 구축되고 녹성 김성진에 의해 정립되었다. 김성진이 대금정악의 창시자로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금정악은 그 자체로 국가무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이 되었고, 녹성 김성진은 이것의 최초 기예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그는 국가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의 기예 보유자이기도 하다.
녹성 김성진의 연주를 들은 사람들은 입을 모아 ‘입신의 경지’를 느낄 수 있다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대금정악의 상징적인 곡인 <상령산>, <청성가>에 특유의 변주를 섞어 그만의 스타일로 아름답게 연주하는 것은 지금까지 따라올 연주자가 없을 정도이다.
국가무형문화재 기예 보유자로 김성진은 1964년 미국 순회공연, 1966년 일본 연주, 1967년 대만 연주 등 해외에 우리 대금의 소리를 전하는 활동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1971년에는 제2회 파리 아시아음악제 연주부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1977년 녹조근정훈장, 1981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93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모란장, 1993년 대한민국예술상은관 문화훈장 등을 받으며 의미 있는 행보들을 이어갔다.
평생을 ‘대금 연주자’로 살아온 녹성 김성진, 청빈하게 살며 대금 연주와 제자 사랑이 특별했던 그는 76세까 지 음반이 아닌 실연으로 무대에서 연주하며 후배 연주자는 물론 그의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신라시대 ‘만파식적’으로 많이 알려진 우리 고유의 대금 선율을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에 계승한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글. 김진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