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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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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세계기록유산 보유 수'아시아 1위/세계 5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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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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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ntv |
등록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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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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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1997년 지정)국보 제70호, 조선시대 1446년(세종 28년) 간행, 목판본 1책, 책의 크기 29.3㎝ * 20.1㎝, 반곽 22.6㎝
* 16.1㎝(본문 4장 앞면 기준),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소장
이 책의 서명은『훈민정음』이라고 부르는 것보다는『훈민정음(해례본)』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다. 1443년(세종 25년) 겨울에 세종이 창제한 문자 '훈민정음'과 구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훈민정음(해례본)』은 1446년 음력 9월에 간행된 1책의 목판본으로, 새로 만든 문자 '훈민정음'의 창제 목적과 이 문자의 음가 및 운용법, 그리고 이들에 대한 해설과 용례를 붙인 책이다. 세종이 직접 작성한 ‘예의(例義)’ 부분과 정인지(鄭麟趾)를 비롯하여 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강희안(姜希顔)·이개(李塏)·이선로(李善老) 등 집현전 8명의 학자들이 만든 ‘해례(解例)’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동안 이 책의 서명을 문자 이름인 훈민정음과 똑같이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부르거나, 또 해례가 붙어 있고 『훈민정음(언해본)』과 구분하기 위해서 ‘훈민정음 해례본’ 또는 ‘훈민정음 원본’ 등으로 명명해 온 것이다.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어 있는 『훈민정음(해례본)』은 국보 제71호로 지정되어 있는 『동국정운』권1, 6과 함께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주촌의 이한걸(李漢杰) 씨 댁에 전래되던 것이다. 1940년에 발견될 당시 원 표지와 첫 두 장이 떨어져 나가고 없었는데 그 후 보충하여 끼워 넣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다. 세종 서문의 마지막 글자 ‘이(耳)’가 ‘의(矣)’로 잘못 씌어지고, 구두점과 권성이 잘못되었거나 빠진 것도 있다. 이 책에는 구점(句點; 右圈點)과, 두점(讀點; 中圈點) 및 파음자(破音字)의 성조를 표시하는 권성(圈聲)도 정확하게 표시한 책이다. 구두점과 권성을 다 표시한 것은 『성리대전(性理大全』(1415년)의 체재와도 일치한다. 최근에 이 책 외에 또, 다른 『훈민정음(해례본)』 한 책이 경북 상주에서 발견된 바 있다.
『훈민정음(해례본)』은 목판본으로 1책이다. 전체 장수는 33장이다. 그 가운데 예의 부분이 4장이고, 해례 부분은 29장으로 되어 있다. 실제로 이 책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예의 부분과 해례 부분의 장차 표시가 각각 제1장부터 4장까지 그리고 해례는 다시 제1장부터 29장까지 장차를 따로 매기고, 판심제(版心題)도 달리 새겨 놓은 것을 알 수 있다. 예의 부분의 판심제는 ‘正音’이고, 해례 부분의 판심제는 ‘正音解例’이다. 예의가 4장 앞면에서 끝나고 4장의 뒷면이 공백으로 되어 있는 이유와, 해례가 시작할 때 제1장 앞면 맨 앞에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라는 내제명(內題名)을 다시 갖추고 있는 이유가 분명히 드러나게 된다. 이 책은 체재상 예의 부분과 해례가 독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본문의 글자도 크기를 달리 하여, 임금이 작성한 부분은 큰 글자로, 신하들이 작성한 부분은 작은 글자로 판을 새겼다. 예의는 1면이 7행에 매 행(每行) 11자로 되어 있고, 해례 부분은 1면 8행에 매 행 13자이다. 정인지의 서문은 다시 한 글자를 낮추어 적고 있다. 이러한 『훈민정음(해례본)』의 체재는 본문과 해설을 짝지어 놓은 체재라고도 할 수 있다. 세종이 쓴 예의를 큰 글씨의 본문으로 하고, 신하들이 쓴 해례 부분을 작은 글씨로 하여 그에 대한 해설로 짝지어 놓은 체재로 되어 있는 것이다. 책의 체재나 내용상으로 볼 때, 정인지의 서문은 해례에 대한 서문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정인지의 서문은 해례의 용자례(用字例) 다음에 한 행의 공백도 없이 계속될 뿐 아니라, 장차도 이어서 매겨져 있고 판심제도 동일하게 ‘정음해례(正音解例)’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목판본의 밑바탕이 되는 판하본(板下本) 원고의 글씨를 쓴 사람은 세종의 셋째아들인 당대의 명필 안평대군(安平大君) 용(瑢)이다. 따라서 이 책은 서예학의 측면에서도 아주 중요하고 의미가 있는 것이다.
『훈민정음』(해례본)의 체재
- ◎ 예의(例義)
- · 세종의 훈민정음 서문
- · 새 문자 훈민정음의 음가 및 그 운용법 등
- ◎ 해례(解例)
- · 제자해(制字解), 초성해(初聲解), 중성해(中聲解), 종성해(終聲解), 합자해(合字解)
- · 용자례(用字例)
- · 정인지 서문
예의(例義)는 세종의 훈민정음 서문과, 새로 만든 문자 훈민정음의 음가 및 그 운용법에 대한 간략한 설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의’라는 말은 정인지의 해례 서문에 나온다. “계해년(세종 25년, 1443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 28자를 창제하시어 간략히 예와 뜻(例義)을 들어 보이시고서 이름 하시기를, ‘훈민정음’이라고 하셨다.(癸亥冬.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 略揭例義以示之, 名曰訓民正音.)” 하는 데에 들어 있다. 세종의 서문에서는 새 문자 훈민정음을 만든 목적과 취지를 밝혔다. 이 서문은 54자로 되어 있다. 그 뒤를 이어, 초성자와 중성자의 음가를 밝혔다. 초성자는 아(牙)·설(舌)·순(脣)·치(齒)·후(喉) 음의 순서로, 그 각각은 원칙적으로 전청(全淸)· 차청(次淸)· 불청불탁(不淸不濁) 자의 순서로 17자를 배열하되, 병서(竝書)를 할 수 있는 글자 뒤에 전탁자 6자(ㄲ ㄸ ㅃ ㅉ ㅆ )의 내용을 추가하여 배열해 놓았다.

해례는 제자해, 초성해(初聲解), 중성해(中聲解), 종성해(終聲解), 합자해(合字解)의 5해(解)와 용자례(用字例)의 1례(例) 및 정인지의 해례 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자 훈민정음을 만든 원리에 대해 해설하고 설명하는 부분이 제자해(制字解)이다. 그 다음으로 초성해와 중성해, 종성해의 순서로 해설하고, 초성·중성·종성의 세 글자를 합쳐 쓰는 방법을 해설한 합자해의 순서로 5해를 구성하고서, 마지막으로 합자법에 의해 올바르게 구성된 단어에 대한 실례를 용자례에서 실제 단어 123개의 용례를 들어 보인 것이다. 자못 논리적인 순서로 배열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각 해가 끝난 뒤에는 ‘訣曰’(“비결에 이르기를”)이라 하고서 운문(韻文)으로 그 해의 내용을 압축하여 설명하고 있다. 훈민정음의 제자 원리는 "성음(聲音)을 바탕으로 하여 그 이치를 다하였다(但因其聲音而極其理而已)고 하면서 정음(正音) 28자는 상형을 기본으로 하여 만들었다고 천명하고 있다. 즉, 초성의 기본자 ㄱ(아음), ㄴ(설음), ㅁ(순음), ㅅ(치음), ㅇ(후음) 등은 발음기관을 상형하여 만들었다고 설명하고, 그 외의 글자들은 소리의 세기[稍?]에 따라 획을 가하여 만들었다. 다만, ㄹ와 ㅿ는 각각 혀와 이의 꼴을 본떴으되 몸이 달라 가획의 의미가 없다고 하였다. 중성의 세 기본자 ㆍㅡㅣ는 천·지·인을 상형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합자해에서는 초성·중성·종성의 세 소리가 합쳐 글자를 이루는[成字]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정인지의 해례 서문은 전통적인 언어관인 풍토설(風土說)에 입각하여 풍토에 따라 말과 소리가 다름을 지적하고, 우리나라에서 한자를 빌려 썼으나 우리 문자가 아니므로 우리말에 맞지 않으며 신라 설총이 비로소 만들었다는 이두도 한자를 빌려 쓴 것이라서 한자 못지않게 불편하여 훈민정음을 새로 만들게 되었다는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또한 훈민정음 28자가 아주 교묘하여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안에는 깨우칠 수 있는 문자라고 하면서, 이 새로운 문자를 가지고 첫째, 한문을 풀이하여 뜻을 쉽게 알 수 있고, 들째, 송사(訟事)를 들어 그 사정을 알 수 있으며, 셋째, 자운(字韻)의 경우 청탁을 잘 구분할 수 있고, 넷째, 악가(樂歌)의 경우 율려(律呂)를 극히 조화롭게 할 수 있는 등의 우수성이 있다고 하면서, 모든 소리를 다 적을 수 있다 하였다.

조선을 건국한 이후 세종 때에 와서는 국가의 기틀이 확고하게 안정되면서 여러 분야에 걸쳐 우리 것을 존중하고 문명과 문화를 발전시키려는 기운이 충만하였다. 이러한 기운이 우리말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문자를 만드는 일 즉,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데까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다른 나라들에서도 자기 언어를 표현하기 위한 새 글자를 제정한 일은 있지만, 구체적으로 그 문자를 만든 창제자가 누구인지를 밝히고 있는 경우는 없다. 더구나 새로 만든 문자의 창제 원리와 그 음가와 운용법을 밝히고 그것을 해설한 책을 간행한 일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일이다. 훈민정음(즉, 한글)은 매우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문자 체계이다. 바로 이 새로운 문자 훈민정음을 다루고 있는 『훈민정음』(해례본)도 그에 못지않게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저작물이다. 따라서 이 책은 학술사적으로나 문화사적인 면에서도 중요한 가치와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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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은 조선왕조의 시조인 태조로부터 철종까지 25대 472년간(1392~1863)의 역사를 연월일 순서에 따라 편년체로 기록한 책으로 총 1,893권 888책으로 되어 있는 가장 오래되고 방대한 양의 역사서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의 정치, 외교, 군사, 제도, 법률, 경제, 산업, 교통, 통신, 사회, 풍속, 미술, 공예, 종교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어 세계적으로 그 유례가 없는 귀중한 역사 기록물이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은 그 역사기술에 있어 매우 진실성과 신빙성이 높은 역사기록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조선왕조실록의 기초자료 작성에서 실제 편술까지의 편수 간행작업을 직접하였던 사관은 관직으로서의 독립성과 기술에 대한 비밀성을 제도적으로 보장받았다. 실록의 편찬은 다음 국왕 즉위한 후 실록청을 개설하고 관계관을 배치하여 편찬하였으며 사초는 군주라해도 함부로 열람할 수 없도록 비밀을 보장함으로써 이 실록의 진실성과 신빙성을 확보하였다.
실록이 완성된 후에는 특별히 설치한 사고(史庫)에 각각 1부씩 보관하였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사고의 실록들이 병화에 소실되기도 하였으나 그때마다 재출간하거나 보수하여 20세기초까지 정족산, 태백산, 적상산, 오대산의 4사고에 각각 1부씩 전하여 내려왔다. 정족산, 태백산 사고의 실록은 1910년 일제가 당시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하였다가 광복 후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그대로 소장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오대산 사고의 실록은 일본으로 반출하여 갔다가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되어 현재 27책만 남아 있다. 적상산본은 구황궁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북한이 가져가 현재 김일성종합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1984년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함께 보관되어 있는 조선왕조실록 정족산본 및 태백산본을 분리하여 안전하게 보관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정족산본 1,181책, 태백산본 848책, 오대산본 27책, 기타 산엽본 21책을 포함해서 총 2,077책이 일괄적으로 국보 제 15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7년 10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실록편찬시 이용되는 자료는정부 기관에서의 보고 문서 등을 정리해 둔 춘추관시정기, 전왕 재위시의 사관들이 작성해 둔 사초(史草), 승정원일기, 의정부등재, 일성록 등 정부 주요기관의 기록과 개인의 문집 등이었다.
 특히 사초는 사관들이 국가의 모든 회의에 빠짐없이 참가하여 왕과 신하들이 국사를 논의, 처리하는 것을 사실대로 기록하는 동시에 그 잘잘못 및 인물에 대한 비평, 그리고 기밀사무 등을 직필(直筆)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사법(史法)이 매우 엄하여 사관이외에는 아무도 볼수가 없었으며, 기록의 진실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왕까지도 보지 못하게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의 세계적 기록유산으로서의 가치 첫째, 조선왕조실록은 25대 군주의 실록이며, 472년간의 역사를 수록한 것이기에 한 왕조의 역사적 기록으로 세계에서 가장 장구한 세월에 걸친 실록이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중국의 대청역조실록(大淸歷朝實錄)도 296년간에 걸친 실록에 불과하다.
둘째, 조선왕조실록은 가장 풍부한 내용을 담은 세계적인 역사서이다. 일본의 삼대실록(三代實錄)은 빈약한 것이고, 남원조(南院朝)의 대남실록(大南實錄)은 548권으로 편성되었다. 중국의 황명실록(皇明實錄)은 2,964권으로 된 대질이나 권수만 많을 뿐이지 기록내용은 소략하다. 조선왕조실록이 총 6,400만 자인데 대해 황명실록은 총 1,600만자에 불과하다.
셋째로, 조선왕조실록은 내용이 다양하여 가히 백과전서적 실록이라고 이해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의 정치, 외교, 사회, 경제, 학예, 종교 생활로부터 천문, 지리, 음악, 과학적 사실이나 자연재해나 천문현상과 동북아시아의 외교적 관계가 수록되어 있는 종합사서요, 국왕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의 생활기록이 담겨져 있는 민족문화서인 것이다.
넷째, 조선왕조실록은 그 역사기술에 있어 매우 진실성과 신빙성이 높은 역사 기록물이다. 조선왕조 실록의 기초자료 작성에서 편술까지 담당했던 사관은 관직으로서의 독립성과 기술(記述)에 대한 비밀성을 보장받던 전문관료였다. 사관의 기록은 군주라해도 함부로 열람할 수 없었고, 비밀이 보장되는 제도가 이 실록의 진실성과 신빙성을 보장하였다.
다섯째로, 활자로 인쇄 간행된 조선왕조실록은 한국 인쇄문화의 전통과 높은 문화수준을 보여주는 역사서인 것이다. 조선은 세계적으로 금속활자를 가장 앞서 실용한 고려시대의 전통을 이어, 활자개량에 힘쓰고, 각종 도서를 간행해 온 전통이 있었다.
여섯째, 조선말기까지 이들 실록이 완전하게 보존되어온 것도 세계적으로 유례를 보기 힘든 일이다. 선왕의 실록편찬사업이 끝나면 최종원고 4부를 인쇄하여 서울의 춘추관과 불의의 사고에 대비하기 위해 각지 깊은 산중에 소재하던 사고(史庫)에 보관하여 왔다.
끝으로, 조선왕조실록은 일본, 중국, 몽고 등 동아시아 제국의 역사연구, 관계사 연구에도 귀중한 기본자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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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란
1. 직지의 명칭
청주 흥덕사에서 1377년에 금속활자로 간행한 책의 이름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다. 이 책의 이름을 줄여서 「불조직지심체요절」, 「직지심체요절」, 「직지심체」, 「직지」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1972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주최한 ’책’ 전시회에 「직지심경」이라 소개되면서 한때 잘못 불리기도 하였다.
불교에서 ’경(經)’은 불교경전을 뜻하는 것이다. 이 책은 엄밀한 의미에서 불경이 아니므로 「직지심경」은 잘못된 표현이다. 여기에서는 판심제에 나타나는 가장 간략한 책의 이름으로 「직지」라고 부른다.
2. 직지의 편저자
「직지」를 편저한 백운화상의 호는 백운이고, 법명은 경한(景閑, 1298∼1374)이다. 백운은 1298년(충열왕 24)에 전라북도 정읍에서 출생하였다. 1351년(충정왕 3, 54세) 5월에 중국 호주의 석옥선사에게 불법을 구하였다. 석옥선사로부터 「불조직지심체요절」 1권을 전해 받고 불도를 닦아, 1353년(공민왕 2, 56세) 정월에 마음을 밝혀 불도를 체득하였다. 또한 백운은 인도의 고승 지공화상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그 후에 황해도 해주의 안국사와 신광사 등에서 주지를 지내고, 후진 양성에 힘쓰다 1372년(공민왕 21, 75세)에 성불산 성불사에서 145가(家)의 법어를 가려 상·하 두권으로 「직지」를 편집하여 저술하였으며, 1374년(공민왕 23, 77세)에 여주 취암사에서 입적하셨다.
3. 직지의 체제와 내용
「직지」의 체제는 상·하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흥덕사에서 간행된 금속활자본은 현재 상권은 전하지 않고, 하권 1책(총 38장)만이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문헌실에 전하고 있다. 취암사에서 간행된 「직지」 목판본은 상·하권이 완전한 1책으로 국립중앙도서관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및 영광 불갑사에 소장하고 있다. 금속활자본만으로는 알 수 없는 체제나 내용을 목판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직지」는 석옥선사가 전해준 「불조직지심체요절」에 「선문염송」과 「치문경훈」 등에서 그 내용을 보완하고 과거 7불과 인도 28조사, 중국 110선사 등 145가의 법어를 가려 뽑아 307편에 이르는 게·송·찬·가·명·서·법어·문답 등을 수록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선사로는 유일하게 신라 대령선사가 하권에 수록되어 있다. 「직지」의 중심 주제는 <직지심체>로 <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의 불도를 깨닫는 명구에서 비롯된 것으로 "참선을 통하여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볼 때, 그 마음의 본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4. 직지를 간행한 사람
「직지」를 1377년에 청주목 밖에 있는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하여 배포하는데 연화문인 석찬, 달잠, 시주 비구니 묘덕이라는 간행 기록이 있다. 석찬은 「백운화상어록」 상·하권을 모아서 기록한 백운화상의 수행비서격인 시자였다. 특히 비구니 묘덕은 흥덕사 금속활자본과 취암사 목판본의 「직지」 간행에 모두 관여한 인물이다. 석찬과 달잠은 모두 백운화상의 제자로서 스승의 가르침을 세상에 널리 펴기 위해 묘덕의 시주를 받아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직지」를 간행하게 되었다.
5. 직지의 프랑스 소장 경위
「직지」는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문헌실에 소장되어 있다. 그 경위는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후 초대 주한대리공사로 부임한 꼴랭 드 쁠랑시(Collin de Plancy, 1853∼1922)가 우리나라에 근무하면서 고서 및 각종 문화재를 수집하였는데, 그 속에 「직지」가 포함되었던 것이다. 「직지」의 수집경로는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으나, 모리스 꾸랑(Maurice Courant, 1865∼1935)이 1901년에 저술한 「조선서지」의 보유판에 게재된 것으로 보아 1900년경에는 이미 수집되었으며, 1911년 드루오호텔에서 경매되었다. 쁠랑시가 우리나라에서 수집해간 대부분의 고서는 모교인 동양어학교에 기증하였다. 그러나 금속활자본 「직지」는 앙리 베베르(Henri Vever, 1854∼1943)가 180프랑에 구입하여 소장하고 있다가, 1950년경에 그의 유언에 따라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되었다.
6. 직지의 재발견
「직지」는 1901년 모리스 꾸랑(Maurice Courant, 1865∼1935)이 저술한 「조선서지」보유판에 수록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실물과 내용은 확인되지 않다가 1972년 "세계 도서의 해(International Book Year)"를 기념하기 위한 ’책’ 전시회에 출품됨으로써 세계에 주목을 받게 되었다. 「직지」의 간행 장소인 청주 흥덕사도 1985년 청주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발굴됨으로써 오늘날의 청주 흥덕구 운천동 866번지임이 확인되었다. 이를 계기로 1986년 충청북도 주최로 열린 <청주 흥덕사지 학술회의>를 통해 흥덕사가 학계에 인정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1992년에는 흥덕사 터의 정비와 함께 청주고인쇄박물관을 개관하였다. 2000년에는 「직지」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2000청주인쇄출판박람회"를 개최하였으며, 2001년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직지」를 등재시킴으로써 그 가치를 세계적으로 공인 받게 되었다. | |
승정원 일기(2001년 지정)
승정원은 조선 정종대에 창설된 기관으로서 국가의 모든 기밀을 취급하던 국왕의 비서실이라 할 수 있는 곳으로, 1623년(인조1) 3월부터 1894년(고종31) 6월까지 272년간 승정원에서 처리한 국정 기록과 승선원, 궁내부, 비서감, 규장각으로 명칭이 바뀌면서 1910년(융희 4)까지 총 3,243책의 기록이 남아 있다.
「승정원일기」는 조선왕조 최대의 기밀 기록인 동시에 사료적 가치에 있어서 조선왕조실록, 일성록, 비변사등록과 같이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세계에 자랑할 만한 자료이며, 또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할 때 기본 자료로 이용하였기 때문에 실록보다 오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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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 가치있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음은 물론, 원본 1부밖에 없는 귀중한 자료로 국보 제 303호(1999.4.9)로 지정되어 있다. 이는 세계 최대 및 1차 사료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2001년 9월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내용을 보면 국정 전반에 걸친 광범위한 사실의 기록으로 啓稟, 傳旨, 請牌, 請推, 呈辭, 上疏, 宣諭, 傳敎 등에 관한 것이다. 이책의 기재 방식을 보면 한 달을 기준으로 책머리에 월간 경연상황, 內殿의 동향을 기록하고 다음으로 승정원의 관리 및 당직자의 표시와 출근실태를 표시하고 마지막에 승정원의 업무현황, 왕 및 내전의 문안, 승정원의 人事關係 등의 내용을 실었다. |
「승정원일기」는 일기식으로 한달에 1책씩 작성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후기로 올수록 내용이 많아져 한 달에 2책 이상이 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조선 건국 초부터 정리되었으나 朝鮮前期分은 임진왜란 등의 兵火로 대부분 소실되었고 현재는 3,243책만이 남아 있으며, 國史연구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외교, 문화, 군사 등 모든 학문 연구에 필수적인 자료이다.
그 사료적 가치는 중국의 「중국 25사」(3,386책, 약 4,000만자) 및 우리나라 「조선왕조실록」(888책, 5,400만자)보다 더 방대한 세계 최대의 연대 기록물(총 3,243책, 글자수 2억4천250만자)이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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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이 국왕 사후 사관들에 의해 편집된 2차 자료라면「승정원 일기」는 당시의 정치·경제·국방·사회·문화등에 대한 생생한 역사를 그대로 기록한 조선시대 1차 사료인 것이다. 고종 31년 갑오경장 이후의 일기 내용은 일제에 의한 내정 간섭기 궁중기록이므로 조선왕(황제)의 결제를 요하는 사건과 기타 궁중의 비화를 기록한 것이므로 근대사 연구의 1차 기본 사료가 된다.
또한 17세기부터 20세기초까지 일기로 300년간의 국문학의 변천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국문학적 가치가 인정되고 있으며, 288년간 매일의 날씨 정보를 기록한 것으로서 특히「조선왕조실록」의 날자는 |
60갑자로만 표기되어 있어 오늘날 우리가 쓰는 태양력으로 환산하는 데 많은 혼란을 겪고 있으나 「승정원 일기」는 60갑자와 수시력역법의 일자를 동시에 표기하고 있어 역사의 기초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전통적인 유교사회 내부로부터 자생적인 천주교 수용이 민중들 사이에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이에 대한 정치권의 대응 등을 자세히 살필 수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승정원일기」 원본은 보존을 위하여 공개하지 않고 있으나, 「영인본 승정원일기」(국사편찬위원회 1961∼1977 간행)와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철종2년(1851)부터 순종융희4년(1910)까지의 일기 필사본은 인터넷으로 제공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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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대장경판 과 제경판 (2007년 지정)

합천 해인사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諸經板)’이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으로 등재됐다.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은 해인사 장경판전에 보관된 팔만대장경판을 포함된 모든 경판을 일컫는다.
해인사 장경판전에는 8만여 장에 달하는 해인사대장경판(국보 제32호) 이외에도 고려시대 새긴 목판 2835매가 보관되어 있다. 이 ‘고려각판’은 모두 54종 2835판으로, 이 중 28종 2725판이 국보 제206호로, 26종 110판이 보물 제734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각판은 현재 해인사 동ㆍ서 사간판고(寺刊板庫)에 봉안되어 있다.
‘고려재조대장경판(高麗再再彫大藏經板)’이라고도 불리는 팔만대장경은 불교 경전이 한자로 새겨져 있는 세계 유일의 목판본으로, 수천만 개의 글자 하나하나가 오ㆍ탈자 없이 고르고 정밀해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평가 받고 있다.
제경판은 해인사가 소장한 경판 중 팔만대장경판을 제외한 경판을 말하는 것으로, 불교경전 외에도 큰스님들의 저술과 시문집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목판은 국가기관인 대장도감(大藏都監)에서 새긴 팔만대장경판과는 달리, 지방관청이나 절에서 새긴 것이다.
국제자문위원회는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은 한자권에서 불교가 지속적으로 포교될 수 있도록 기여한 바가 인정되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권고하게 됐다”고 밝혔다.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이란?
유네스코가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 등재를 결정한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은 쉽게 풀어 쓰면 합천 해인사에 소장된 팔만대장경판과 같은 장소에 보관된 다른 경판 모두라는 뜻이다.
이 중 전자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고려왕조에서 두 번째로 만든 불교의 일체경(一體經.불교경전의 총합)이란 의미에서 고려재조대장경판(高麗再再彫大藏經板)이라고도 하는 팔만대장경판은 현존 세계 유일의 일체경 목판집이다.
현전 불경류만 해도 이제는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팔만대장경이 판각되던 그 시기에도 그 숫자는 만만치 않았다. 한데 당시까지 알려진 모든 불교경전을 하나로 통합하려 한 이 팔만대장경판이 도대체 구체적으로 몇 장이며 이에 수록된 불경류는 몇 종 몇 권인지는 조사자마다, 보고서마다 차이를 보인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펴낸 '민족대백과사전'에는 1천497종, 5천558권, 8만1천258장이라 했으나, 문화재청이 제공하는 문화재 정보에는 1천496종, 6천568권, 8만1천258장이다. 장수는 같으나 종수와 권수가 차이가 난다.
보관처는 해인사 중에서도 동서로 나란히 놓인 수다라장과 법보전이다.
두 건물 사이를 막은 'ㅁ'자 모양 작은 건물이 있는데 '사간전'이란 곳으로 팔만대장경을 제외한 다른 목판들이 소장된 곳이다.
사간전은 사간판이 보관된 전(殿.건물채)라는 뜻이다. 사간판은 한자로는 '寺刊板'이라 쓰기도 하고, '私刊板'이라고도 하는데 전자는 사찰에서 만들어낸 목판이란 뜻이며 후자는 개인이 시주해서 만든 목판이란 의미다.
해인사라고 하면 흔히 팔만대장경판을 떠올리지만, 이런 명성은 사간전에 보관된 사간판들을 왜소한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사간전에 소장된 사간판 또한 그 면모가 만만치 않다. 수량에서는 8만장에 이르는 고려대장경에 비해 적기는 하지만, 총수가 1만 점 가량이나 되어 이 역시 엄청나며, 나아가 이 중 54종 2천835장이 고려대장경과 같은 고려시대에 새긴 경판들이다.
이들 고려시대 경판 중에서도 다시 28종, 2천725장은 '고려각판'이라는 이름으로 국보 제206호로 지정되어 있고 그 나머지 26종 11장은 보물 734호로 등록되어 있다. 고려각판 중에는 그 제작연대가 고려 숙종 3년(1098)인 '화엄경'이 있는가 하면, 충정왕 원년(1349)에 간행된 '화엄경약신중'도 있다. 일부는 고려대장경보다 제작연대가 빠른 것이다.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조선시대 목판이다. 그 중에는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의 아버지와 삼촌의 문집도 포함돼 있다.
이번 세계기록유산 등재 목록에서 '고려대장경판'과 하나의 문화유산으로 묶여 이름을 당당히 올린 '제경판'(諸經板)이란 바로 사간전에 보관된 경판류들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세계기록유산 등재 결정은 팔만대장경에 밀린 '제경판'이란 존재를 더욱 부각시키는 계기가 될 지도 모른다.
조선왕조 의궤 (2007년 지정)
-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에 소장된 546종 2,940책의 각종 의궤 - 한국학 중앙연구원 장서각(藏書閣)에 소장된 287종 490책의 각종 의궤
의궤는 조선왕조에서 유교적 원리에 입각한 국가 의례를 중심으로 국가의 중요 행사를 행사 진행 시점에서 당시 사용된 문서를 정해진 격식에 의해 정리하여 작성한 기록물이다. 같은 유교문화군에 속하는 중국, 일본, 베트남 등에서는 의궤의 체계적인 편찬이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의궤는 조선시대 600여년에 걸쳐 (1392-1910) 왕실의 주요 행사, 즉 결혼식, 장례식, 연회, 사신영접 등 뿐 아니라, 건축물·왕릉의 조성과 왕실문화활동 등에 대한 기록이 그림으로 남아져 있어 600여년의 생활상을 시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희소성을 가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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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3,895 여권의 방대한 분량에 이르는 의궤는 왕실의 주요한 의식이 시기별, 주제별로 정리되어 있어서, 조선왕조 의식의 변화 뿐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의 문화를 비교연구, 이해하는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반차도, 도설 등 행사모습을 묘사한 시각 콘텐츠는 오늘날의 영상자료처럼 당시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생동감 있게 보여준다. 예컨대 정조의 능행도(陵幸圖)는 전 여정을 15.4m에 걸쳐 표현하고 있다. 이런 형태(시각중심 visual-oriented)의 기록유산은 뛰어난 미술장인과 사관의 공동작업을 통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한 마디로 의궤는 장기간에 걸쳐 조선왕조의 주요 의식을 방대한 양의 그림과 글로 체계적으로 담고 있으며 이러한 유형은 동서양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매우 뛰어난 기록유산의 가치(outstanding value of documentary heritage)를 지니고 있다.
세계사 맥락에서 유교의 중요성이 저평가되고 있는 면이 없지 않다. 유교는 세계의 조그만 한쪽 구석에 존재했던 문화가 아니다. 유교가 지배했던 영토는 그 면적으로 볼 때 서유럽보다도 몇 배나 컸으며 인구 수에 있어서도 유럽, 서남아시아 및 중동을 초과하는 큰 규모였다. 유교권은 최소 14세기까지 전세계를 2~3개 권역으로 분할하던 주요 문화권 중 하나였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 수차례에 걸친 야만족의 침입과 이들에 의한 점령으로 인해 시간이 경과하며 전통 의식은 원형을 점차 잃어갔다. 특히 몽골 침입 기간 동안 유교 의식을 수록한 문헌 상당수가 소멸됐다. 이에 반해 한국은 그러한 침입을 경험하지 않았기에 전통 유산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며 천 년 동안 진정성을 훼손하지 않고 유교 의식을 봉행하는 전통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의궤는 대부분의 유교사회에서 잊혀진 과거 유산을 보존하고 있는 기록이다. 또한, 의궤는 조그마한 군주국가의 기록이 아니라, 한때 세계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던 유교 전통의 핵심을 대표하는 기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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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 (2009년 지정)
동의보감은 1610년 허준이 집필하였고, 1613년 왕실의료기관(내의원)에서 나무 활자의 형식으로 간행한 백과사전식 의서(醫書)
국립중앙도서관(보물1085),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보물1085-2) 초판 완질 동의보감(25권 25책)
『동의보감』은 선조 30년(1597) 임금의 병과 건강을 돌보는 어의 허준(1539∼1615) 선생이 선조의 명을 받아 중국과 우리나라의 의학 서적을 하나로 모아 편집에 착수하여 광해군 3년(1611)에 완성하고 광해군 5년(1613)에 간행한 의학 서적이다. 이는 총 25권 25책으로 나무활자로 발행하였다.
허준은 선조 7년(1574) 의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내의원의 의관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의주까지 피난을 갔으며, 그 공을 인정받아 공신으로 추대되었으나 중인신분에 과하다는 여론이 일자 취소되었다.
『동의보감』은 그가 관직에서 물러난 뒤 16년간의 연구 끝에 완성한 한의학의 백과사전격인 책이며, 허준 선생은 이외에도 중국의 의학서적을 번역하는 데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동의보감』은 모두 23편으로 내과학인 『내경편』, 『외형편』 4편, 유행병· 곽란·부인병·소아병 관계의 『자편』11편, 『탕액편』3편, 『침구편』1편과 이외에 목록 2편으로 되어 있고, 각 병마다 처방을 풀이한 체계가 정연한 서적이다.
우리 실정에 맞는 의서라 하여『동의보감』이라 이름 하였으며, 훈련도감자본으로 발행되었다. 이 책은 중국과 일본에도 소개되었고, 현재까지 우리나라 최고의 한방의서로 인정받고 있다.
일성록(2011)
국보 제153호, 1760년(영조 36년)에서 1910년(융희 4년)까지 편찬, 서울대 규장각 소장

이 책은 1760년(영조 36)에서 1910년(융희 4)까지 151년 동안의 국정 운영 내용을 매일매일 일기체로 정리한 국왕의 일기(*국왕을 3인칭인 ‘상(上)’인 아닌 1인칭 용어인 ‘여(予: 나)’로 표기)이다. 임금의 입장에서 펴낸 일기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정부의 공식적인 기록물이다. 필사본으로 한 질만 편찬된 유일본이며 총 2,329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모두 전하고 있으나 21개월분이 빠져있다.
[일성록]의 모태가 된 것은 정조가 세손 시절부터 쓴 존현각일기(尊賢閣日記)이다.
정조는 [논어(論語)]에서 증자(曾子)가 말한 ‘오일삼성오신(吾日三省五身: 나는 날마다 세 가지 기준을 가지고 스스로에 대해 반성한다)’에 깊은 감명을 받아 일찍부터 자신을 반성하는 자료로 삼기 위해 일기를 작성하였다고 함

이후,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에는 규장각 관원들에게 명령하여 매일매일 일기를 작성한 다음 5일마다 일기를 정서하여 이를 국왕에게 올려 결재를 받도록 하였다. 정조는 [일성록]이 자기 시대의 정치 사회적 상황을 확인하고 반성하는 근거 자료가 되기를 원했으며, 이를 위해 기존의 [승정원일기]와는 다른 방식으로 [일성록]을 편찬하도록 지시하였다.
"옛날을 보는 것은 지금을 살피는 것만 못하고, 남에게서 구하는 것은 자신에게서 반추하는 것만 못하다." [일성록 서문]

이에 따라 [일성록]은 국정의 주요 현안들을 강(綱: 표제)과 목(目: 세부 사실)으로 나누어 기록하여 국정 운영에 참고할 내용들을 일목요연하게 찾을 수 있는 체재로 편찬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일성록]은 정조의 개인 일기에서 공식적인 국정 일기로 전환하게 되었다. 책의 제목은 증자의 말을 인용하여 ‘일성록(日省錄)’ 으로 했다.
[일성록]은 18~20세기 동·서양의 정치·문화적 교류의 구체적 실상과 세계사의 보편적 흐름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조선이라는 한 나라의 역사 기록물을 넘어서는 세계사적 중요성과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받아 2011년 5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18민주화운동기록물(2011년 지정)
5.18민주화운동 관련 기록물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대한민국 광주를 중심으로 전개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일련의 활동과 이후에 이 사건의 책임자처벌, 피해자 보상과 관련하여 기록되고 생산된 문건, 사진, 영상 등의 자료를 총칭한다. 주요 소장처는 국가기록원, 육군본부, 국회도서관, 5.18기념재단 등이 있다.
 1980년 5월 18일은 광주에서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던 날.
긴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어지지 않을 만큼
큰 아픔으로 남는 일이었다.
계엄군과 공수부대원들은 시위 학생들을 향하여 총격을 가하였고,
그로 인해 죽는 학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민가나 관공서로 피신했고, 이들을 추격하던 군인들은
무고한 어린 학생, 부녀자 시민들까지 닥치는 대로 체포하고 학살.
군대는 탱크까지 동원하여 모든 도로를 차단하였다.
인간이 과연 저렇게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정말 끔찍한 사건이다.
지금까지도 그날의 일들은 지워지지 않는 큰 상처가 되고 있다.
이상 자료 출처:인터넷 검색창에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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