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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특파원 르포 - 세계문화유산 탐방...앙코르가 불가사의한 이유
글쓴이 문화재방송.한국 등록일 [2022.05.31]

 

앙코르의 신비를 보다

황혼 무렵의 앙코르와트 최상층부 탑 아래의 회랑 외부벽. 압사라 상 옆의 주판알 모양의 기둥은 창문 살이다.
황혼 무렵의 앙코르와트 최상층부 탑 아래의 회랑 외부벽. 압사라 상 옆의 주판알 모양의 기둥은 창문 살이다.


앙코르 유적지로 가는 숲속 포장도로의 아침 공기는 몇 번 거듭해 숨을 들이키고 싶을 만큼 상쾌했다. 밀림 속 저편 어디에선가부터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 자전거 물결을 이루어 시엠렙 시가지를 향하고 있었다.


캄보디아-‘킬링필드’의 사람들. 그러나 그들의 얼굴은, 물론 가난에 찌들어 있기는 했지만 유순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70년대 중반 폴포트 정권 시절 인구의 4분의 1인 무려 200만 명이 학살당했다. 가한 자들의 잔혹함과 당한 사람들의 공포가 유달랐던 대학살이었다.


“이 크메르인들, 놀라운 사람들이예요. 그런 모진 일을 겪은 지 그래야 20년인데도 성품들이 얼마나 유순한지-.”


캄보디아에서 8년간 살아온 가이드 서성호씨는 지나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며 그렇게 말했다. 그는 캄보디아 사람들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밀림 속의 1천여 년 전 유적


그런데, 저들의 조상이 축조한 앙코르와트라는 그 자자한 명성의 유적은 어디 있는 것일까. 숲은 워낙 울창해 옛적 같으면 거대 조형물의 축조는 고사하고 사람이 발길을 들여놓기부터가 어려웠을 것 같았다. 두세 아름은 너끈히 될 무수한 거목들이 하늘을 가렸고 그 사이의 공간도 갖은 수목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여객기 창밖으로 내다뵈던 그 넓디넓은 땅덩이는 놓아두고 하필 이 깊은 밀림 속에 나라의 수도를 정하고 수많은 사원을 지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나 이 나라는 삼림이 국토 면적의 75%라고 한다. ‘하필이면 밀림’이 아니라 밀림 지대 이외 별달리 마땅한 곳이 없었던 것이다. 서성호씨는 이 곳에 이런 거대 유적이 남게 된 연유며 각각의 유적이 가진 특징을 제대로 보려면 크메르족의 나라 캄보디아 역사에 대한 이해가 필수라며 빠른 말로 설명을 시작했다.


“앙코르 이해의 열쇠가 되는 몇몇 왕이 있습니다. 그 중 최초 인물이 야소 바르만 1세죠. 889년 왕이 된 그는 앙코르에서 약 20km 떨어진 하리하라라야란 곳으로부터 이곳 앙코르로 수도를 옮겨왔습니다. 당시 자기 이름을 따서 수도 이름을 야소 다라푸라라고 했죠. 그는 신성한 거주지를 건설하기 원했고, 그 중심을 삼은 곳이 프놈바켕입니다.”


그렇다면 앙코르 순례의 첫 대상지는 프놈바켕이어야 한다. 갑자기 툭 트이는 시야-. 밝디밝은 강물과 그 건너로 길게 띠를 이룬 숲지대가 펼쳐진다. 강이 아니라 앙코르와트를 둘러싼 해자(垓字) 곧 방호 수로(水路)라고 한다. 숲의 띠 속에는 앙코르와트 남벽이 서 있다. 이 앙코르와트는 프놈바켕 이후 120여 년 이상의 세월이 지나서야 축조된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보기로 했다.


시엠립 시가지에서 앙코르와트까지는 북쪽으로 약 5km다. 거기서 다시 7~8km 북방까지, 그리고 동서로 8km쯤 되는 지역 안에 앙코르와트, 앙코르톰과 같은 앙코르 유적지의 핵심부가 위치해 있다.


아이들이 수영하며 놀고 있기도 하는 해자를 따라 빙 돌아 앙코르와트의 정문인 서문 앞을 그대로 지나쳐 숲길을 조금 더 가자 왼쪽으로 긴 계단이 설치된 프놈바켕 사원 오르는 길이 보인다. 왕국에서의 그 의미는 각별하지만, 프놈바켕 사원은 오래된 만큼 보존 상태는 좋지 않아 큰 볼거리는 못되었다.


지정학적으로 캄보디아는 인도의 영향을 피할 수 없다. 힌두 전통에 따르면 세계의 중심은 메루(Meru)산, 곧 수미산(須彌山)이고, 그 곳에 신들의 거주지가 있다. 프놈은 둔덕이란 뜻으로, 해발 60m에 불과하지만 프놈바켕은 이 지역에선 유일한 산이었으므로 신성을 부여하기는 제격이었을 것이다. 야소 바르만 왕에 이어 후대 왕들도 다투어 신성의 ‘사원 산’들을 세우며 앙코르는 크메르왕국의 수도로서 오랜 번영을 누리게 된 것이다.


 


35년간 매일 20만 명 동원


앙코르와트로 우리는 120년 세월 건너 발걸음을 옮겼다. 수리야 바르만 2세-. 우리 역사로 치면 고려 중기쯤 되는 1113년 왕위에 오른 그는 참족의 영토인 베트남 남부까지 영역을 넓혀 중국 황제가 그에게 경의를 표시하기도 했다. 그가 세운 대사원이 앙코르와트다. 와트(wat)는 사원이란 뜻이니 ‘사원의 도시’란 의미다.


12월6일 금요일 낮의 앙코르와트 입구엔 여러 대의 버스와 수많은 오토바이들로 혼잡스러웠다. 관광객들은 줄지어 해자 위에 걸쳐진 통로를 따라 앙코르와트로 향했다.


수리야 바르만 2세는 창조신 브라흐마, 파괴신 시바와 함께 힌두교 3대 최고신에 드는 비슈누신을 숭배했다. 그는 비슈누신의 영광을 위해 앙코르와트를 지었다. 그 이전에 이처럼 비슈누신을 중요시했던 사원은 없었다. 물론 이는 12세기 들어 인도에서 시작된 철학적 흐름의 영향이다. 저 멀리 푸른 하늘 속에 솟은 메루산의 다섯 봉우리를 상징하는 높이 60m의 다섯 개 탑이 뵌다.


“나중에 저 탑까지 올라가 사원을 내려다보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웅장함은 앙코르와트의 주된 특징이 아닙니다. 앙코르와트의 뛰어남은 무엇보다 섬세함에 있지요.”


서성호씨는 서문 입구의 부조물들을 가리켰다. 춤추는 무희의 부조가 무엇보다 눈에 띈다. 천상의 요정 압사라다. 손바닥을 뒤로 꺾고 다리는 마름모꼴로 벌려 춤추고 있는 압사라, 압사라들-. 이곳 앙코르와트에는 모두 2,000개의 압사라상이 새겨져 있는데,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한다. 압사라의 넓적다리를 감싼 얇은 천의 무늬까지도 섬세하게 묘사돼 있다. 그 넓은 벽면 어디든, 심지어는 문틀의 네 겹 주름의 속까지도 무늬 없이 비어 있는 부분은 없다.



앙코르와트 회랑벽에 부조로 형상화된 라마야나 설화.
앙코르와트 회랑벽에 부조로 형상화된 라마야나 설화.
회랑에 든 우리는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온갖 형상의 정교한 부조물들이 80m 저쪽 끝까지의 벽체에 가득 새겨져 있다. 앙코르와트에는 모두 8개의 회랑이 있는데, 대부분은 고대 인도의 2만4천송(頌)의 시구로 이루어진 대 서사시이자 설화인 라마야나(Ramayana), 즉 라마왕 행전(行傳)을 형상화한 것이다. 코살라국의 왕자 라마와 그의 정숙한 왕비 시타, 동생 파라타, 원숭이신 하누만, 마왕 라바나 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 이야기의 흥미진진함 만큼 부조의 형상도 다양하다.

제2회랑은 주인공이 수리야 바르만 2세 그 자신이다. 왕은 장식된 의자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고 그 뒤에 양산을 펴고 부채를 부치는 자 양편에는 궁정의 요인과 브라흐민(성직자)도 보인다. 화려한 옷을 입은 브라흐민은 길쭉한 얼굴과 오똑한 코로 보아 인도 혈통임이 드러난다. 왕 앞에는 무릎을 꿇은 군중들, 또한 공물을 바치는 군중들이 있다. 주위의 궁정 여자들은 귀금속의 관과 목걸이로 장식했다.

이 회랑의 부조물은 한 마디로 그의 업적과 위엄이 주제로서, 특히 상징적인 장면으로 염라대왕 옆에 수리야 바르만 왕이 앉아 있는 모습을 들 수 있다. 이는 천국이나 지옥행을 결정짓는 조언자로서 왕을 신격화한 것이다.

긴 회랑들을 거쳐 중앙탑 아래의 널찍한 뜰로 올라선 뒤 우리는 띵한 머리를 식힐 겸 휘이 한숨 돌리며 앉아 쉬었다. 저 위에 장대하게 솟은 첫번째 회랑으로 오르려면 가파르기 그지없는 계단을 기어야 한다. 성스러운 곳이므로 업드려 올라야 한다는 뜻이 거기 담겨 있다고 한다.

높이 60m의 저 탑 다섯 개를 조성하는 데만도 엄청난 공력이 들었을 것이다. 총면적이 동서 1.5km, 남북 1.3km로 200ha, 건물 면적만 따지면 332m×258m로 85,656m2이니 약 26,000평이다. 이 대사원의 축조엔 대체 얼마나 많은 인력이 필요했을까. 앙코르에 반해 몇 년씩, 심지어는 20여 년간 여기 머물며 연구해온 ‘앙코르 마니아’들은 35년간 매일 20만 명이 이 사원의 축조에 동원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마침 석양이 비추었다. 황금빛 햇살이 들며 사원도 황금빛으로 온통 물들었다. 노을이 지는 쪽을 향해 앉아 노을 바라기를 하는 사람들-. 서양인도 동양인도 모두 찬란한 황금색으로 물들이는 크메르의 노을빛이다.

 

부처에 헌납된 바욘 사원

프놈바켕 사원 입구 북쪽으로 숲지대가 끝나는 곳, 거기는 천도 200년쯤 뒤, 그리고 왕코르와트 건립 60년쯤 뒤에 새로이 건설된 왕도인 앙코르톰의 남문이다. 코끼리를 타기도 한 수많은 관광객들이 양쪽으로 54개 신상이 도열한 진입로를 지나 남문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 안쪽 1.5km 지점의 바욘 사원은 1180년 등극한 자야 바르만 7세가 앙코르톰의 핵심으로 건설한 것이다.

 

한낮의 바욘사원 입구. 신들의 거주처 메루산을 상징하는 탑들과 보살상들이 흘립해 있다.
한낮의 바욘사원 입구. 신들의 거주처 메루산을 상징하는 탑들과 보살상들이 흘립해 있다.
자야 바르만 7세, 그는 우리의 광개토대왕과 세종대왕을 반반 합친 것 같은 걸출한 왕이다. 그는 등극 이전 4년 간 앙코르왕국을 침입 지배했던 원수 나라인 베트남 지방의 참족 왕국을 멸망시킨 뒤 불멸의 요새이자 새 왕도로서 앙코르톰을 건설했고, 그 가운데에 바욘 사원을 세웠다. 80여 년 전 수리야 바르만 2세가 힌두 사원으로서 앙코르와트를 세운 반면 자야 바르만 7세는 불교 사원으로서 바욘 사원을 건축했다.

그의 선왕이 바로 ‘부처의 발에 영광을 주는 자’였다. 자야 바르만 7세는 참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 부처의 보살핌 덕분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고 학자들은 추측한다.

크메르족의 앙코르왕국과 베트남 남부의 참족 왕국은 이를테면 과거 한국과 일본처럼 원수지간이었다. 바욘 사원의 부조에는 자야 바르만 7세가 승리로 이끈, ‘길고도 고통스럽고도 무자비했던 참족과의 전투’ 상황이 세세하게 묘사돼 있다. 코끼리를 탄 장수, 군수물자를 나르는 노예들, 떨어져 죽는 참족 군사, 그들을 잡아먹는 악어 등등 참족과의 전쟁 이외 시장 풍경도 자세히 묘사돼 있다. 병나발 부는 술꾼, 투계 놀음하는 중국인들, 저울 다는 상인, 돼지를 통째로 삶는 장면 등등…. “바욘 사원 회랑의 이 부조물 전체는 한 마디로 온 국민이 합심하여 참족을 물리치고 평화를 구가하고 있음을 알리고자 한 것으로 주제를 요약할 수 있다”고 서성호씨는 말한다.

 

캄보디아의 상징이 된 크메르의 미소 상. 자야 바르만 7세의 얼굴상이라고도 한다.
캄보디아의 상징이 된 크메르의 미소 상. 자야 바르만 7세의 얼굴상이라고도 한다.
회랑 중간의 통로로 사원의 제일 위쪽 회랑에 올라갔다. 앙코르 유적의 상징으로 가장 자주 등장하는 ‘크메르의 미소’를 비롯, 사면불상들이 선 곳이다.

걸음을 옮기면 불상의 옆얼굴이 나타나고, 그 불상 뒤에 가렸던 사면불이 진초록 숲 위로 모습을 나타낸다. 한 바퀴 돌고 또 도는 동안 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불상들이 살아 나서고 숨기를 거듭하는 것 같다. 이 기묘한 공간미에 빠져든 여행자들이 침묵과 더불어 여기저기 앉아 있다.

갑자기 몰려든 관광객들이 한 곳으로 몰려 사진을 찍느라 법석이다. ‘크메르의 미소’ 앞이다. ‘바욘의 미소’라고도 부르는 이 상은 자야 바르만 7세의 얼굴상이라고도 한다.

자야 바르만 7세는 이외에도 10개의 대형 사원을 앙코르에 더 세웠다. 하나마다 8~12년 걸린 대작들로, 그 중 하나가 어머니를 위해 세운 타프롬 사원이다. 비록 앙코르와트가 있긴 하지만, 타프롬을 “영화 인디애나 존스적인 분위기로, 가장 인상적이고 볼만했다”고 회상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이 사원은 사원을 뒤덮은 수목들을 제거하지 않고 100년 여 전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원의 18명 고승과 2,740명의 사제 등을 위해 12,640명이 종사하고 있었다고 하니 사원이 거의 하나의 도시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이 수도원은 또한 3,140개의 주위 마을들로부터 기부금을 받았다고 한다.

 

거목이 뱀처럼 부수고 휘감은 타프롬 사원

우리 나라 명산처럼 음식점이며 기념품점이 늘어선 입구에서 차를 내려 우리는 숲속 길을 걸어갔다. 500m쯤 되는 숲길 중간에 장애인들이 모여 이곳 토속 현악기를 연주하고 있길래 1달러를 놓았더니 득달같이 우리 아리랑으로 곡을 바꾼다.

고푸라(성이나 사원 입구의 부조로 장식된 구조물)를 지나 어두컴컴한 타프롬 사원 회랑 안쪽의 뜰로 들어선 순간 멈칫 걸음이 멈추어졌다. 그곳의 분위기는 그렇듯 고요하고 깊었다. 그저 나무들뿐인 숲속이었다면 그렇게까지 깊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수백 년 전 사원의 여기저기에 떨어진 새똥 속의 씨앗에서 이 기이한 풍경은 시작되었을 것이다. 사원의 석재 사이를 비집으며 내려가 종내는 유적지를 허물어뜨리고, 그 허물어진 유적의 벽체 위로도 흡사 촛농이 흘러내리듯 휘덮으며 옭아맨 거목들-. 그 두 가지가 어우러진 이곳의 시공간은 수백 년 세월 저편의 것 그대로 같다.

앙코르의 모든 사원은 일단 석재를 차곡차곡 쌓아올린 뒤 돋우었던 흙을 거두어내리며 상층부부터 조형해 내려왔다. 그 틈새를 강한 생명력의 열대 식물들이 놓칠 리 없었다. 앙코르의 모든 사원들은 이렇듯 타프롬 사원처럼 나무들에 의해 허물어지고 뒤덮였다가 근대 들어 복원된 것이다. 퉁, 퉁, 퉁… 머리나 다리 아닌 가슴을 쳐야 비로소 울림이 오는 수도승의 방에서 한 번씩 가슴팍을 두들겨본 뒤 우리는 밝은 곳으로 빠져나왔다.

앙코르의 사원들은 왕의 신앙에 따라 불교사원, 혹은 시바신을 모신 힌두사원으로 세워졌다. 또한 불교사원 안에 시바신의 상징인 링가가, 힌두사원 안에 불상들이 모셔지기도 했다. 우리에게서 무불이 습합했듯 이곳 앙코르에서는 힌두교와 불교가 습합된 것이다. “모두 1,000여 개의 사원과 수도원이 발굴돼 있으며, 그중 독특한 특색을 지닌 것만 돌아보려 해도 몇 달이 필요할 것”이라며 서성호씨는 앙코르에서의 시간이 단 이틀뿐인 우리를 서둘러 다음 사원으로 이끈다.

그런데 왜 사원들만 보이는 것일까. 왕궁은? 그리고 사람들이 살았던 집은? 서성호씨에게서 즉각 답이 돌아왔다.

“사원만 석재를 썼고, 왕궁조차도 신하들의 집과 마찬가지로 목재로 만들었다지요. 게다가 이곳은 습하고 무더운 지방입니다. 때문에 모두 썩어 잔해조차 보기 어려운 거죠.”

그러나 13세기 말 캄보디아에서 살다 돌아간 중국인 주달관(周達觀)이 쓴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에 그 왕궁의 모습 일부와 왕들이 누리던 영화가 전해지고 있다. 진랍은 당시 크메르왕국의 중국식 표기다.

‘왕궁은 황금 탑(바욘)과 황금 다리의 북쪽에 있으며, 그 둘레는 2.4km나 된다. 왕궁의 중앙 건물은 납으로 된 타일로 되어 있고, 다른 곳들은 노란 색의 도기 타일로 덮여 있다. 모든 기둥은 부처상이 조각되거나 그려져 있는데 굉장하다. 지붕 또한 인상적이다. 긴 주랑(柱廊)과 열린 회랑은 조화를 이루며 교차되어 길게 뻗어 있다. 군주가 정무를 보는 방은 40여 개 이상의 황금 창문이 있는데 좌우측 창문틀에 유리가 끼워져 있다. 창문의 아래는 코끼리로 장식되어 있다. 왕궁 내에는 놀랄 만한 많은 것들이 있다고 들었지만, 이것들은 엄격히 보호되고 있어 나는 볼 기회가 없었다.’

 

메콩강 통해 200km 밖의 석재 실어와

주달관은 또한 왕의 행차 모습을 여실히 전하고도 있다.

‘왕이 궁전을 나갈 때는 군인이 행렬의 맨 앞에 서고 기와 휘장, 군악대가 따른다. 머리에 꽃을 꽂고 화려한 옷을 입은 300~500명의 궁녀들은 손에 작은 초를 들고 행렬을 이룬다. 날이 밝을지라도 촛불은 켜든다. 다음으로 왕실의 금과 은으로 된 용품들과 화려한 장식품이 나오는데 아주 신기한 디자인이라서 나는 그것이 어디에 쓰이는지 모르겠다.’

그 호화스런 행차가 나서던 왕궁은 모두 스러지고 단단한 돌로 지은 사원들만 남은 것이다. 사원들 사이의, 지금은 울창한 숲을 이룬 널찍한 숲지대 어딘가에 왕궁이 서 있었을 것이다. “바로 저기, 바욘 사원 북쪽의 피메나카스 사원 일대가 왕궁터였다”면서 서성호씨는 앞장선다.

 

앙코르 유적 남쪽의 거대한 호수인 톤레삽 호수의 수상촌. 학교를 파한 아이들이 귀가하고 있다. 앙코르 사원 축조에 쓰인 석재는 이 톤레삽 호수를 통해 운반됐다.
앙코르 유적 남쪽의 거대한 호수인 톤레삽 호수의 수상촌. 학교를 파한 아이들이 귀가하고 있다. 앙코르 사원 축조에 쓰인 석재는 이 톤레삽 호수를 통해 운반됐다.
앙코르 지역은 바위 산은 고사하고 높은 둔덕마저도 없는 완벽한 평야지대다. 그렇다면 사원 건축에 쓰인 그 많은 돌들은 어디서 가져온 것일까. 피라미드의 재료를 나일강으로 날랐듯 고대 크메르인들 역시 수로를 이용했다. 서성호씨는 이렇게 말했다.

“건축 석재는 세 군데서 가져왔습니다. 북동 45km 거리의 쿨렌산, 200km 북방인 라오스 남부, 남서쪽 300km의 코끼리산맥에서 잘라내서는 메콩강을 따라 프놈펜까지 내려온 다음 우기를 기다려 물이 역류하면 앙코르와트 남쪽 톤레삽 호수까지, 뒤이어 시엠렙 강을 통해 여기까지 실어온 것이죠.”

사원 건설이나 저수지 축조 등 모든 어려운 일에는 노예를 동원했음을 사원 석주나 벽에 새겨진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일반 서민들도 극빈한 자가 아니면 대개 노예를 거느렸다고 한다.

800여 년 전 자야 바르만 7세 때도 한낮의 이 숨막히는 더위는 마찬가지였을까. 우리는 서둘러 서쪽 호수로 가 배를 타고 120년 세월을 거슬러 올랐다. ‘서쪽 바라이’라 이름붙인 이 인공호수는 자야 바르만 7세보다 120여 년 전 시대의 왕이 동쪽 바라이가 메말라가자 대신 축조한 것이다. 길이 8km, 폭 2.2km이며, 2m 깊이로 파고 2m 높이의 제방을 쌓았다. 왕은 이 저수지 축조 후 가운데에 작은 섬을 만들고 서쪽 메본이란 사원을 세웠다.

배가 달리자 시원한 바람에 가슴 속이 시원스레 씻긴다. 메본 사원의 유적지-. 섬 가운데 숲속에 작은 매점이 하나 있을 뿐이다. 호수 저편 앙코르 유적지를 덮은 밀림 위로 희디흰 뭉게구름이 솟아 호수면에 환히 반사되고 있었다.

자야 바르만 7세는 앙코르톰을 건설하며 막강한 종교적 방어물로서 사원과 수도원들을 건립하는 한편 각 변이 3km인 정사각형의 높은 성벽을 새로이 쌓았다. 밖으로는 또한 폭 100m의 널찍한 해자를 파는 등 새 왕도의 수호를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앙코르가 불가사의한 이유

그러나 그의 죽음 직후부터 앙코르왕국은 흔들렸고, 결국 100년쯤 뒤인 14세기 말을 전후하여 앙코르는 버려졌다. 어떤 군주가 언제, 어떤 이유로 이 왕도를 버렸는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앙코르를 불가사의라고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여기에 있다면서 서성호씨는 이렇게 설명한다.

“100만 명에 달하던 주민들이 일시에 사라졌다고 합니다. 거기에 여러 설이 있는데, 그중 하나로 전염병설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주민들이 사용하던 연장 등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잃지요.”

다음, 이주설은 앙코르의 그것과 같은 양식의 건축물이 타 지역 어디서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또한 미흡하다. 가장 그럴듯한 것이 노예반란설이다. 주달관의 진랍풍토기에 보면 노예들이 얼마나 비참하게 살았는지가 여실하다.

‘그들은 오직 집의 맨 아랫바닥에만 눕거나 앉을 수 있다. 주어진 일을 하기 위해 위층으로 올라가기 전 무릎을 꿇고 땅에 절을 해야 하고, 손을 합장해 경의를 표해야 한다. 일을 잘못해 맞을 때면 머리를 숙이고 조금도 움직임이 없이 주먹을 맞는다. 만약 달아나다 잡히면 파란 먹을 얼굴에 새기고, 목에 쇠목걸이를 채우거나 손발에 족쇄를 채운다.’

북방의 타이족(샴족)에 패한 후 남은 귀족들이란 노약자뿐-. 원한이 뼈에 사무쳤을 노예들은 그들을 모두 죽이고 사방으로 흩어져갔다는 것이다.

피라밋, 타지마할, 마추피추, 모아이석상 등과 더불어 앙코르를 세계 7대 불가사의라고들 말한다. 우리가 오늘날 감탄해 마지않는 이 모든 것들의 공통점이라면 권력자들이 수많은 민중을 동원해 이룩한 욕망의 산물이란 점이다.

되돌아오는 관광선에 동승한 크메르족 아이들이 이곳 갈대로 만든 팔찌 묶음을 내밀며 “원 달라, 원 달라”를 되뇐다. 각각 한 묶음씩 사주자 아이들은 어금니가 드러나도록 환하게 웃었다.


◈ 앙코르 유적지를 가려면


베트남 호치민시 경유…하롱베이와 연계


우리 나라에서 앙코르 유적지가 있는 캄보디아 시엠렙은 베트남 호치민시에서 연결되는 항공편을 이용해 가는 것이 상례다. 대개 베트남의 절경지 하롱베이와 연계되어 이루어지며, 한국여행사(02-733-4411)를 비롯해 이 지역 전문 여행사들이 몇 있다. 관광 적기는 11월~이듬해 5월 사이의 맑은 날이 많은 건기다. 태국이나 베트남에서 육로를 이용해 가는 싸구려 패키지 상품이 있지만 더위와 더불어 비포장도로의 먼지에 여러 시간 시달리는 고역을 각오해야 한다.

시엠렙시는 세계적인 유적도시인 만큼 하루밤 숙박비가 100만 원대인 고급 호텔부터 몇 달러에 불과한 싼 모텔까지 여러 가지가 있다. 아리랑식당, 서울가든 등 한국 식당도 두 군데 있으며, 최근 북한이 평양냉면집을 차렸다.

유적 관광은 현지 오토바이나 오토바이가 끄는 2인승 시클로를 이용해서 할 수도 있다. 현지 주민이 하루 종일 손님이 원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기다리고 하는 비용이 오토바이는 5달러(약 6,000원), 시클로는 10달러에 불과하다. 이른 아침, 호텔 앞에 줄지어 기다리는 오토바이를 타고 한 번 앙코르 유적지를 달려보자. 20달러(약 25,000원)의 입장료를 또 내야 했지만, 앙코르 유적지의 아침 오토바이 드라이브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 프놈펜과 달리 이곳 시엡렙은 강력 범죄가 거의 없다고 한다.

시엡렙에 택시는 없다. 자가용도 극소수이므로 아침녘 오토바이 드라이브는 별로 위험하지 않다.


◈ 인물


‘앙코르 박사’ 서성호씨


앙코르 유적지를 가진 시엠렙시의 세코(Seoul Korea)여행사 사장 서성호씨(42)는 베트남, 태국, 캄보디아 등지의 한국인 여행업계에서 이름 높다. 특히 앙코르에 대한 박식함으로 그렇다. “과찬이지만, 다소나마 사실이라면 그건 IMF 덕분”이라며 그는 웃는다.

손님이 전혀 오지 않아 할일도 없고 나가 돌아다닐 돈도 없었던 그는 앙코르에 대한 책을 모조리 사서는 독파했다. 책들의 내용과 앙코르 유적의 실제를 대조해 보기도 하는 사이, 그는 앙코르에 대해 일가견을 갖게 된 것이다. 한때는 모 대학에서 강의 부탁이 들어온 적이 있었을 정도다.

그는 연세대 신방과를 나와 조선일보 기자시험에 응시, 1차에 합격하기도 했지만 천하를 주유하는 여행사 일이 좋아 여행업계에 뛰어들었다. 이곳 앙코르에 자리잡은 지는 이미 8년째. “돈은 좀 덜 벌어도 좋으니 앙코르관광이 대중화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로 앙코르를 그는 사랑한다.

새 직원을 채용한 뒤에는 3개월간 수습기간을 두어, 그 안에 주어진 일정량의 공부를 마치지 못하면 한국으로 되돌려 보낼 정도로 그는 앙코르에 대해 철저하다. 


(글·사진 안중국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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