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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세기 초 활동했던 영국의 시인 크리스토퍼 말로(Christopher Marlowe)가 남긴 유명한 표현이다. ‘헬레네의 얼굴(The face of Helen)’이란 제목의 시에 등장하는 첫 구절이다.

   트로이전쟁의 원인이 된 스파르타 왕비 헬레네의 미모를 선박의 대규모 출항에 비유한 문장이다. 해양대국 영국인만이 생각할 수 있는 표현으로 느껴진다. 왕비를 되찾기 위해서는 그리스 재산의 전부라 할 수 있는 1000척의 배를 바치겠다는 결의를 강조한 것이다. 대충 보여주고 타협하는 식의 협박이나 허장성세가 아니다. 결심한 이상 그리스 모두의 운명을 걸면서 끝까지 가겠다는 신탁(神託)이 1000척의 배가 갖는 의미다. 실제 아가멤논을 총사령관으로 하면서 왕자 파리스(Paris)를 응징하기 위해 그리스 연합함대 1000척이 트로이로 출항했다.

   사춘기에서부터 시작된 서방 역사라고나 할까? 좋게 말하면 열정이고 나쁘게 보면 비논리적 감정의 극단에서 출발한 것이 기원전 13세기 트로이전쟁이다. 청춘 호르몬이 온몸에서 풍기는 사춘기 기록 자체가 바로 헬레네 스토리의 전모다. 서양에 비해 동양은 수동적이다. 뭔가 일을 벌이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가능하면 위험 요소를 배제하면서 안전하게 나아가는 문화에 익숙하다. 튀거나 나설 경우 곧바로 당하게 된다. 어린이조차 조용하고 어른의 분위기를 재빨리 이해해야 모범생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애 같은 애가 아니라 어른 같은 애가 한층 더 박수받는다. ‘스타트업’이란 말이 시대정신으로 정착된 듯하지만, 결과와 무관하게 ‘한번 실험 삼아 해본다’는 발상 자체가 동양 유전자에는 아예 부족하다.

   반면 잘못에 따른 책임은 일벌백계로 따라붙는다. 미성숙기인 사춘기를 찬미하는 문화 자체가 동양에는 극히 드문 듯하다. 서양은 다르다. 트로이전쟁에서 보듯, 서양 문학의 원점이 되는 사건 자체가 사춘기와 반항기 역사의 증거에 해당한다.

▲ 보티첼리의 그림 ‘파리스의 판단(Judgement of Paris)’ 속 파리스 왕자가 아름다움을 겨룬 세 명의 여신 중 비너스를 선택하는 장면. photo 위키피디아

사춘기의 역사관 트로이전쟁

10대 사춘기의 꿈은 나이가 들수록, 세월의 부침을 겪을수록 한층 더 선명히 떠오르게 된다. 이성과 무관하고 충동적이며 극단으로 갔던 사춘기의 ‘철없던 기억’일수록 한층 더 강하고 깊은 삶의 잔영(殘影)으로 남는다.

   트로이가 지도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 3300여년이 흘렀다고 하지만, 헬레네를 둘러싼 어제의 기억과 정열은 21세기인 지금까지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헬레네 스토리는 장님 음유시인 호메로스(Homer)가 남긴 25장의 대서사시 ‘일리아스(Ilias)’에 기초한 것이다. 쥐어짜기 억지 감동 쇼나 아전인수 격 자화자찬과 무관한 구전 기록의 집대성판이다. 현악기 하나와 함께 이뤄지는, 간단하고도 단순한 스토리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리아스’ 문장 하나하나에는 영광, 우정, 희생, 명예, 자유, 신탁, 운명으로 연결되는 인간 품격에 관련된 모든 것이 투영돼 있다. 마치 초봄 에게해 들판의 수많은 야생화처럼 형형색색 드러난다.

   그러나 특별히 주목할 부분이 하나 있다. 1000척의 배를 띄워서라도 헬레네를 반드시 탈환하겠다는 그리스의 명예회복이 전부는 아니라는 점이다. 헬레네를 선택한 파리스의 운명적 사랑도 그리스 명예 이상으로 중요하다. 그리스의 영광과 트로이의 명예가 동격이란 의미다. 호메로스는 그리스인이다.

   그러나 ‘결코’ 적인 트로이를 아래로 내려다보지 않았다. 전쟁에 이긴 그리스, 지도에서 사라진 트로이 모두 신의 눈으로 보면서 찬미하고 있다. 속(俗)에서나 통하는 승자, 패자 논리와 무관하다. 비록 적이라도 자신의 생각과 가치 그리고 원칙을 지키려는 고결한 영혼의 소유자라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트로이전쟁은 인간이 아니라 신이 기획·연출한 역사라는 것이 그리스인들의 생각이었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전쟁의 원인은 헬레네 납치에 있지만, 보다 근본으로 들어가면 신들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다. 올림푸스 신전에서 벌어진 신들 사이의 질투와 파워게임이 핵심이다.

   서방 역사의 기본 유전자이기도 하지만, 모든 역사의 원인, 과정, 결과를 신과 연결해 풀어나간다. 동양도 신을 앞세우지만, 절대권력자를 장식하는 액세서리 정도에 불과하다. 중국의 ‘삼국지’ 스토리를 보자. 신의 존재를 믿고 신에게 의탁하면서 세상사를 처리해나가는 인물이 단 한 명이라도 있는지 의문이다. 적당한 명분과 핑계로서의 신관(神觀)일 뿐이다. 중국적 사고의 특징이지만, 천벌을 겁내는 권력자는 없다. 남을 공격하는 수단으로서의 천벌일 뿐, 스스로가 하늘이라 믿기 때문에 천벌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마오쩌둥에 이어 시진핑이 기상천외한 특별 호칭에 매달리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당중앙, 핵심, 최고 존엄과 같은 엄청난 타이틀이 이어지고 있지만, 실제 마음속으로는 신이자 권력자인 천제(天帝)라 불리기를 원할 듯하다. 당연하지만 스스로 신이라 믿는 이상, 역사의 원인, 과정, 결과를 신에게 의탁할 필요가 없다. 신은 수단이나 권력을 보충해줄 액세서리에 불과하다. 서방은 다르다. 아직 국체(國體)로 존재하고 있는 바티칸이 증명해주듯, 현실 권력의 협력자거나 경쟁자로서 신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정치적 수단만이 아니라 가치, 목적, 원칙으로서의 신관이 서방에 정착화돼 있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처음에는 마치 장난처럼 시작됐다. “누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냐?”란 질문이 던져졌다. 그리스 신화 속에서 헤라, 아테네, 비너스 세 여신이 파리스에게 던진 물음이다. 헤라는 파워, 아테네는 지혜, 비너스는 미(美)를 선물로 내놓는다. 파리스는 목동으로 어릴 때 트로이의 왕으로부터 버림받은 불행의 화근이다.

▲ 카즈다기 관광지에 있는 파리스와 헬레네 동상.

   “누가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냐”

   들판에서의 삶이 전부인 10대 목동에게 헤라의 파워, 아테네의 지혜는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오감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비너스의 미가 파리스가 서슴지 않고 택한 최후의 결정이다. 파리스가 선택의 징표로 내린 것은 사과다. 성경의 선악과를 떠올릴 듯하지만, 트로이전쟁이 성경 탄생보다 무려 700여년 앞선 역사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브가 비너스를 흉내 낸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트로이전쟁에 등장하는 사과는 ‘천국, 지옥, 선악’과 무관한 골든애플(Golden Apple)로 통한다. 바이블의 선악과는 ‘인간=죄인’이란 숙명론을 전제로 한 세계관의 부산물이다. 목동인 파리스가 여신인 비너스에게 사과를 줄 당시만 해도 ‘인간=죄인’이란 개념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트로이전쟁은 사과를 선물로 받은 비너스와, 파워·지혜를 미끼로 내건 헤라·아테네 사이의 전쟁에서 시작된다. 비너스는 약속한 대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스파르타 왕비 헬레네를 파리스에게 안긴다. ‘헬레네=유부녀’라는 사실은 트로이전쟁이 사춘기 역사라 말할 수 있는 가장 큰 근거이다.

   21세기 기준으로 본다면 전형적인 불륜 문학이다. 로맨틱한 상상력에 매달리는 사춘기의 사랑이 아니라, 연상의 여인이자 유부녀를 상대로 한 욕정의 러브스토리가 트로이전쟁의 배경에 있다. 동양 기준으로 본다면, ‘원숭이 삼형제의 터부’를 대하는 느낌이 들 정도라고나 할까? ‘듣고 보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서방 최초의 문학작품 주제이자 소재로 느껴진다. 불륜에서 시작된 트로이전쟁의 영향력은 이후 서방 문학 전체에 파급된다.

   동양과 비교할 때, 동성애·근친상간 같은 얘기가 특별히 터부시되지 않는 분위기가 서방 문학세계에 퍼져나간다. 도덕, 윤리, 혈연, 권력, 계급, 나이와 무관하게 이뤄지는 자유분방한 인간본능 재탐구와 재발견이 서방 러브스토리의 진가일지 모르겠다.

   헤라는 ‘결혼, 가정, 출산’의 신이다. 왕비로서의 품위는커녕 목동 출신 파리스와 함께 그리스를 버리고 트로이로 떠난 헬레네를 얼마나 증오했을지 눈에 선하다. 평생 결혼도 않고 지혜와 용기로 세상의 평화를 지켜나간 아테네가 볼 때도 외모 하나에만 정신을 판 파리스의 천박한 세계관에 치를 떨었을 것이다.

   결국 비너스에 맞선 두 여신의 합동작전이 그리스에 유리하게 돌아간다. 그러나 최종 결정자는 제우스다. 여신들끼리의 싸움 속에서 비교적 마지막까지 중립을 지키면서 개입을 안 한다. 그러나 트로이의 목마를 계기로 제우스는 그리스에 승리를 안겨준다.

▲ 카즈다기 인근 이다 산으로 들어가는 길은 온통 소나무 숲으로 이어져 있다.

   비너스의 승리와 헤라·아테네의 분노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찾아헤맨 결과가 마침내 나타났다. 필자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삶의 공간’을 발견한 것이다. 조건은 전부 두 개다. 첫째 바다를 통한 일출·일몰이 365일 가능한 공간이다. 당연히 바다에 인접한 땅으로, 동서로 길게 이어진 해안선에 인접할 수밖에 없다. 창문을 여는 순간 아침에는 동쪽의 일출이, 저녁에는 서쪽의 일몰이 지평선을 따라 가득 채워진다.

   필자의 체험이지만, 바다를 통해 일출·일몰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공간은 전 세계에서 극히 일부분에 그친다. 둘째는 온천이다. 일출·일몰 연출과 더불어, 언제든지 온천을 즐길 수 있는 땅이 있다면 지구 최고의 명당이라 볼 수 있다.

   올 들어 1월 중순 그 같은 ‘소중한 땅’을 발견했다. 일출·일몰 바닷가에서 벗어나 30분 정도 달려가면 천연 온천이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터키 에게해의 ‘이다(Ida)’ 지역이다. 터키 지명으로 카즈다기(Kazdağı)라 불리는 곳으로 20세기 말부터 온천지로 개발된 이래 에게해를 대표하는 휴양지로 변신한 상태다. 온천이란 존재도 모른 채 수영장을 찾아헤매던 끝에 우연히 발견했다. 이다에서 내려오는 온천수를 통해 100여개의 크고 작은 호텔과 휴양지들이 들어서 있다. 터키의 온천은 체온과 비슷한 37도 전후의 낮은 수온에 그친다. 수온이 40도만 넘어도 뜨거워서 아무도 안 들어간다고 한다.

   비너스라는 상표는 온천장 주변을 특징 짓는 공통분모 중 하나다. 그리스어인 아프로디테와 더불어 비너스에 관련된 상품이 곳곳에 넘친다. 필자가 자주 다닌 수영장의 이름도 ‘거품(Foam)’으로 표기돼 있다. 바다 포말 속에서 탄생한 비너스를 염두에 둔 말이다. 그리스인들은 ‘이다’가 목동 파리스의 주거지였다고 믿고 있다.

   다시 말해 파리스가 세 명의 여신을 상대로 한 ‘미인 콘테스트’를 벌였던 공간이 바로 이다였다고 말한다. 이다는 높이 1770m 정도의 고산지대로, 북서쪽 트로이와는 약 30㎞ 떨어진 곳에 있다. 목동으로 지내다 후에 트로이의 왕자로 ‘부활’하기까지 살았던 문명 밖의 땅이 바로 이다인 셈이다. 바다 옆에 인접해 있지만, 워낙 산세가 깊어서 트로이의 수원(水源) 역할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인류 최초의 미인 콘테스트 장소가 풍부한 온천지대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물은 생명의 출발점이다. 뜨거운 온천은 뜨거운 생명, 불타는 정열의 기반이 될 수 있다.

▲ 카즈다기는 에게해를 대표하는 온천 휴양지다.

   온천장 주변을 수놓은 비너스의 자취

   경국지색(傾國之色)이란 말이 있다. 나라의 운명을 끝낼 정도의 절세미인을 의미한다. 흔히들 중국의 양귀비(楊貴妃)를 대표로 손꼽는다. 그러나 트로이전쟁에서의 헬레네와 비교해볼 때 동양 경국지색의 가치나 의미가 너무도 왜소하게 느껴진다. 동양의 경국지색은 남자의 수하물로서의 여성, 권력자의 전리품으로서의 미인에 불과하다. 1000척의 배를 띄워서라도 반드시 차지하고야 말겠다는, 권력과 나라의 모든 것을 건 경국지색이 아니다.
출처:주간 조선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C09&nNewsNumb=002694100023

중국·한국 역사를 통틀어 여성 하나를 위해 모든 것을 걸면서 싸운 역사는 전무하다. 기껏해야 암행어사 이도령이 나온 ‘춘향전’ 정도다. 좀 극단적으로 얘기하자면, 남성들 사이의 노리개로서의 여성이 경국지색이 갖는 진짜 의미다. 양귀비를 위해 목숨이나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왕이나 권력자는 애초부터 없다. 서방은 헬레네 탈환 이후 1200여년이 지난 기원전 31년에도 경국지색의 역사를 또다시 부활해낸다. 악티움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 사이의 사춘기 러브스토리다. 예측 불가능하고 어디로 튈지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에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