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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고대세계 8대 불가사의 ‘데린쿠유’ 지하도시…자연과 역사·문화유적이 보존된 최고 걸....
글쓴이 문화재방송.한국 등록일 [2021.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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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린쿠유 지하동굴의 내부 모습. 지하 8층까지 한때는 지하 85m까지 팠다는 지하동굴은 고대 세계 8대 불가사의에 꼽힌다.(사진 터키관광청)

고대세계 8대 불가사의 ‘데린쿠유’ 지하도시…

동양학자 조용헌 박사와 현지답사… 자연과 역사·문화유적이 보존된 최고 걸작품

글 | 박정원 월간산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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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만 년 전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 기암괴석이 오랜 풍화작용으로 버섯같이 희한하게 생긴 바위들이 카파도키아에는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터키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카파도키아(Cappadocia)다. 동서양 문명의 교착점이자 실크로드의 시·종점이었고, 비잔틴문명의 중심이었던 이스탄불도 물론 풍성한 역사유적지가 가득하다. 하지만 이스탄불이 문명적 측면에서 가볼 만하다면 카파도키아는 자연적 측면에서 꼭 봐야 할 장소다.

카파도키아는 누구나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세계 100대 경관 중의 한 곳으로 꼽히는 지역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그 기이한 경관으로 SF영화의 선구자격인 ‘스타워즈’ 1편의 촬영지다. 그 기이한 경관으로 거장 조지 루카스(George Lucas) 감독 의 상상력과 창의성이 ‘스타워즈’에 그대로 녹아들었다. 실제 루카스 감독은 “지구의 자연이라고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지역”이라고 했다. 카파도키아라는 촬영장소의 선택도 영화 성공의 중요한 한 요소였던 것이다.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고깔모자와 버섯같이 생긴 지평선 위의 기기묘묘한 기암괴석, 높이 50m에 달하는 모래 빛깔의 원뿔 모양의 둔덕, 인간이 상상하기 어려운 동굴암벽, 동굴 속에 암벽을 뚫고 지은 은신처와 교회 등등…. 상상 이상이다.

카파도키아의 자연은 수백만 년 전 에르시예스산(Erciyes·3,916m)에서 격렬한 화산폭발이 있은 후, 두꺼운 화산재가 쌓여 굳어간 조형물이라 한다. 카파도키아인들은 신이 빚은 듯한 이 조각물을 ‘요정의 굴뚝(페리 바잘라르)’이라 한다. 그 후 수십만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모래와 용암이 쌓인 지층이 몇 차례의 지각변동을 거치며 비와 바람에 쓸려 풍화되어 갔다. 그렇게 화산재가 굳어 만들어진 응회암은 인간이 큰 힘을 들이지 않고 굴을 팔 수 있을 만큼 부드러웠다. 날카로운 돌만으로도 절벽을 뚫어 집을 지을 수 있었다. 그 집들이 마치 고대 아파트같이 층층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가히 장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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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 기원전부터 은신처로 사용했던 바위 주거지는 카파도키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명물이다. (우)바위 은신처 내부에는 탈곡하는 농업용 기기까지 갖추고 있다.


바위교회·바위은신처는 마치 고대 아파트 같아

카파도키아는 크게 세 가지 범주로 나눠서 볼 수 있다. 뛰어난 자연경관과 거친 현무암 망토를 걸친 옥수수 모양의 기둥처럼 생긴 수도원, 그리고 전 세계에서 가장 독특한 계곡들이 첫째 볼거리다. 둘째, 예수·성모마리아·성서 속의 사건과 성인들을 그려놓은 프레스코화가 있는 바위교회, 마지막으로 세계 8대 불가사의로 평가되는 지하도시는 은신처이자 예배를 드리는 비밀장소로 사용된 곳으로, 기원전부터 지어졌으며 점차 확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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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에서부터) 카파도키아의 신기하고 신비한 기암괴석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열기구는 터키의 명물이며, 세계의 많은 여행객들이 이것을 타고 즐긴다.(사진 혜초여행사) / 카파도키아 바위교회 내부에 있는 프레스코화로 그린 예수 그림. / 동양학자 조용헌 박사가 바위교회 내부를 둘러보며 상념에 잠겨 있다.
먼저 계곡으로 간다. 으흐랄라계곡(Ihlara Valley)이다. 실크로드로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에서 지하 150m 이하로 움푹 빠진 지형이다. 천혜의 요새 같다. 멀리서 보면 계곡이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다. 계곡 중간으로 강이 흐른다. 메렌디즈(Melendiz)강이다. 세계 어느 곳이든 강 주변, 아니 물 주변에는 사람이 산다.

지평선 사이 움푹 빠진 으흐랄라계곡에는 거의 1만 개의 바위동굴과 105개의 바위교회가 있다. 계곡에 있는 많은 교회들은 수도사들의 은신처 역할을 했으며, 시대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시대에 따라 단층 혹은 복층 구조로 교회를 지어, 석회로 벽화를 그린 프레스코화가 아직 남아 있다. 정말 신기하다.

절벽을 뚫어 집을 지은 바위촌의 첫 입주민은 4세기 이후 기독교 성직자들이었다. 그들의 은신처로 주로 사용돼 왔다. 무슬림이 아나톨리아를 지배하고 있을 때, 기독교도들은 자연적으로 이 은신처를 활용했다. 그들은 눈에 띄지 않는 암벽과 바위 계곡 사이를 파고 깎고 다듬어 교회와 마구간이 딸린 집들과 납골소와 성채를 만들고, 지하도시까지 건설했다.

또 이들은 바위동굴에서 비둘기를 많이 키웠다. 지금도 곳곳에 비둘기 배설물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비둘기는 이들에게 여러 모로 유익한 새였다. 첫째, 이들은 주로 포도나 감자농사를 짓고 살았다. 염기가 강한 토양은 산성이 강한 비둘기 배설물을 모아 비료로 사용하면서 땅을 중성화시키는 지혜를 발휘했다. 둘째, 비둘기는 마을 간 연락을 할 때 메신저 역할을 했다. 비둘기 다리에 편지를 묶어 보내는,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바로 그 장면이다. 셋째, 비둘기 알은 프레스코화를 그리는데 염료와 함께 사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비둘기를 때로는 먹이로도 활용했다고 한다. 비둘기는 이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생활수단이었던 것이다.

바위동굴에는 그들의 생활이 그대로 남아 있다. 결과적으로 으흐랄라계곡은 자연과 역사와 문화유적이 보존된 ‘카파도키아의 진주(The pearl of Cappadocia)’로 대표되는 지역이다.


조 박사, “카파도키아는 정감록의 제1지에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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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흐랄라 계곡에는 물이 흐르고 있고, 그 주변에 관광객을 위한 상점이 있다.
동양학자 조용헌 박사도 상상력을 벗어난 자연의 경관에 말을 잊은 듯 조용하게 있다, 마침내 한마디한다.

“한국의 정감록에 10승지가 있는데, 터키로 치자면 제1 지역이 카파도키아가 아닌가 여겨집니다. 움푹 빠진 계곡에 있는 바위동굴 속의 은신처는 어떤 적(敵)이 와도 못 찾을 겁니다. 정말 이걸 두고 천혜의 요새라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으흐랄라계곡에 있는 바위교회와 수도원은 지형적 조건과도 무관치 않은 듯 보인다. 주변 광활한 지평선에 집을 지으면 그대로 노출된다. 하지만 바위 속에 은신처를 마련하면 적의 눈에 띄지 않는다. 더욱이 바위는 날카로운 칼로 깎으면 쉽게 다듬어진다. 우리는 산에 나무가 있어 언제든 나무로 집을 지으면 되지만 이곳은 황량한 사막지대라, 집을 지을 수도 없고 지으면 적의 표적이 된다. 이러한 환경적 상황을 고려하면 카파도키아의 동굴 은신처와 바위교회는 어쩌면 자연스런 주거형태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더욱이 동굴 속은 일 년 내내 일정한 온도가 유지된다.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엔 시원하다. 초기엔 단층으로 짓다 시대가 흐를수록 지상과 지하로 방을 낸 복잡한 정착촌도 나타난다. 데린쿠유란 지하도시가 바로 그 형태를 보인다. 데린쿠유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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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린쿠유 지하동굴의 내부 모습. 지하 8층까지 한때는 지하 85m까지 팠다는 지하동굴은 고대 세계 8대 불가사의에 꼽힌다.(사진 터키관광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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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파도키아의 기암괴석 옆에 낙타를 탈 수 있도록 대기시켜 놓고 있다.


무려 85m까지 지하도시 건설

데린쿠유 지하도시(Derinkuyu Underground City)는 거대한 바위에 20층까지 방을 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지하 8층 규모만 공개한 상태다. 그것만 해도 거대한 지하도시다. 깊이만 무려 85m 정도 된다. 한때 이곳에 무려 1만여 명이 살았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같은 얘기지만 고고학자들이 밝혀낸 사실이다. 고대 세계 8대 불가사의로 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터키에 있는 많은 지하도시 중에 가장 크다.

BC 8~7세기 원시 히타이트 민족들이 처음으로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로마시대, 비잔틴시대를 거치면서 계속 다른 민족들이 살았다. 지하 1층은 원시 히타이트인들이 저장고로 삼았으며, 다른 종족들이 숨어살면서 지하 8층까지 확장하게 됐다. 지하로 내려갈수록 신기하지 그지없다. 한 번 벌어진 입은 다물 줄 모를 정도다. 어떻게 이런 동굴을 고대부터 축성할 생각을 했는지, 정말 상상 이상이다.

카파도키아 지역에는 모두 36개의 지하도시가 있으며, 기독교인들이 서기 6~7세기에 아랍민족의 핍박을 피하기 위해 그들만의 종교를 전파하기 위한 비밀장소로 이용되어 왔다. 성경학교는 물론이고, 수도원, 부엌, 저장고, 침실, 응접실, 와인창고, 식당들이 주로 1, 2층에 자리 잡고 있다. 무기저장고와 은신처, 각종 터널들은 3, 4층에 있다. 출입구가 있는 복도에는 돌문이 있다. 급습을 당했을 때는 지하로 내려와 볼트를 풀어 문을 닫음으로써 긴급대피했다. 외부에서 이 문을 여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지막 층에는 특별히 견딜 수 있게 우물, 숨겨진 무기, 교회, 회의실, 고해성사실, 무덤, 환풍구가 있다. 교회에 가만히 앉아 보니 경건하기 이를 데 없다. 일반 교회보다 훨씬 신앙심을 발휘하게 하는 듯하다. 종교의 힘을 느낄 수 있을 정도다.

데린쿠유 지하도시에는 모두 52개가 넘는 공기환풍구가 있는데, 가장 밑부분에 우물이 있다. 가장 상층부에는 공기구멍이 있어, 모든 층에 공기를 공급할 수 있었다. 숨이 가쁠 정도로 상당히 내려왔는데 전혀 숨 쉬는 데 지장이 없다. 지하우물의 물은 1962년까지 도르래를 이용해서 끌어올려 사용했다고 한다.

이 지하도시에 살던 상주인구를 1만여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만드는 데 정확히 10만여 명이 30년 동안 작업을 해야 가능하다고 한다. 이곳 데린쿠유 지하도시는 이 방대한 규모의 공사를 하는 데 얼마나 많은 인력과 시간이 소요됐을까? 이에 대한 답은 세계 어느 고고학자도 아직 정확하게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지하도시임에 분명한 사실인 듯하다.

카파도키아 유적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기독교도들이 남겨놓은 유적이다. 그들은 계곡 바위산 곳곳에 동굴을 뚫어 수도원과 성당을 건설했으며, 그 내부에 수많은 벽화를 그려놓았다. 현재 남아 있는 종교 벽화의 대부분은 비잔틴제국(9~13세기 후반) 시대에 그려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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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외박물관 으로 불리는 젤베. 수많은 기암괴석들이 우후죽순으로 솟아 있다.


카파도키아의 마지막 이색지역 젤베(Zelve)로 간다. 젤베는 야외박물관이라 불릴 정도로 다양한 수도원과 동굴교회가 많다. 가장 아름다운 수도원도 이곳에 있다. 이곳 교회와 수도원들은 대개 우상파괴주의가 성행하던 8~9세기경에 지어졌다. 동굴은 그 당시 은신처로 이용됐다. 젤베의 특징 중 하나가 1924년까지 이슬람과 기독교도가 함께 살았다. 그리스와 터키의 역학관계가 변하면서 기독교도들은 계곡을 완전히 떠나야만 했다. 이슬람교도들 역시 1950년 침식으로 인한 거주 위험으로 젤베계곡을 완전히 떠났다.

잠시 카파도키아의 역사를 한 번 살펴보자. 최초로 카파도키아 지역에 정착했던 사람들은 아시리아 상인들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BC 1900년경 교역을 위해 식민지 도시를 건설했다고 한다. 그 후 BC 1600~1100년에는 히타이트가 노예와 광산물을 사고파는 교역도시로 발전시켰다. 하지만 히타이트 멸망과 함께 카파도키아는 쇠퇴했다. 1세기 전반 로마제국 황제 티베리우스는 카파도키아 지역을 수중에 넣고 페르시아와 국경선을 정했다.

2세기 후반에는 기독교도들이 포교를 위해 이곳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시 로마는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위험한 종교로 생각해서 신자들을 혹독하게 탄압했다. 신비감을 느낄 수 있는 카파도키아로 기독교도들은 로마의 탄압을 피해 4세기 초까지 계속 이 지역으로 숨어들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황제(307~337년 재위)가 기독교를 공인하자 카파도키아는 기독교도들의 수행장이 되어 더욱 많은 신도들이 몰려들었다.

7세기 후반에 이슬람교도들이 아나톨리아를 침공하자 기독교도들을 중심으로 많은 피난민들이 카파도키아로 이주해 당시 인구는 6만 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이렇게 몰려온 사람들은 주거용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바위산을 뚫어 지하도시를 건설했다.

8~9세기 전반에는 비잔틴제국에서 일어난 우상파괴운동으로 인해 수많은 초기 벽화들이 파괴됐다. 그러나 우상파괴에도 불구하고 10세기 무렵에는 동굴 속에 건설된 성당과 수도원의 수가 360개를 넘었으며, 11세기에는 인구가 7만 명에 육박했다고 한다.

11세기 후반에는 아나톨리아 일대가 터키 셀주크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카파도키아는 완전히 이슬람의 영향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들이 서로 평화적으로 공존했다. 1453년 비잔틴제국이 오스만투르크에 의해 멸망했지만 기독교도들은 이 지역을 떠나지 않고, 근근이 신앙을 이어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도의 수행장이자 은신처

결론적으로 동양과 서양을 잇는 중요한 교역로였던 카파도키아는 하나의 제국이 일어설 때마다 전쟁터로 변했다. 기원전 히타이트인들이 정착한 이래, 페르시아, 로마, 비잔틴,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차례로 이곳을 점령했다. 로마와 비잔틴시대에 기독교인들의 망명지가 됐던 이곳은 4세기부터 11세기까지 기독교가 번성했다. 지금 남아 있는 대부분의 암굴교회와 수도원들은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크로드의 중간거점으로서 동서문명의 융합을 도모했던 카파도키아, 동로마제국의 마지막 보루이자 오스만투르크의 교두보 역할을 했던 카파도키아, 수천 년의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는 인류문명의 중요한 자산이다. 그 신비하고 신기한 자연과 역사와 문화유적의 잔상을 지울 수 없다. 이 지역은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돼, 항상 세계 곳곳에서 자연과 문화와 역사를 보기 위해 찾아온 방문객들로 붐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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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으흐랄라 계곡 물에는 오리들이 노닐고, 그 옆에 말이 놀고 있다. / (우)카파도키아는 일교차가 매우 심해 과일 맛은 어느 지역보다 좋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포도와 석류 등 과일을 즉석에서 갈아 판매한다.


그리스와 터키의 관계는 왜 앙숙인가?
비슷한 역사이면서 지배·피지배 반복… 제1차 세계대전으로 감정의 골 깊어진 듯

그리스와 터키는 한국과 일본 관계 못지않게 앙숙이다. 아니 한일관계보다 훨씬 더 심한 적대적관계다. 지난 12월 초 영국언론은 그리스를 방문한 아흐메트 다부토울루 터키 총리가 안토니스 사마라스 그리스 총리와 고위급 협력회의를 개최한 결과 무역과 관광, 에너지, 불법이민 근절 등의 분야에서 협력하기로 약속했다고 보도했다. 공동성명은 “상호 존중과 신뢰, 국제법을 기반으로 좋은 이웃국가 관계를 촉진하자”고 밝혔다. 사실 이 정도의 보도라면 웬만한 국가에서는 별로 뉴스로 취급되지 않을 수도 있다. 앙숙관계인 두 나라가 손을 잡고 좋은 관계로 나가보자고 하니 뉴스가 되는 것이다. 두 나라 관계는 그 정도다. 언제부터 그리스와 터키가 앙숙관계가 됐을까? 정확한 시점과 유래를 아는 역사학자들은 없지만 두 나라의 역사를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알려진 대로 그리스는 서구문명의 기원이다. 민주주의의 토대가 된 아크로폴리스, 철학적 기초를 제공한 소크라테스 등 서구문명은 그리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기원 전 강력한 도시국가를 건설한 그리스는 지중해를 끼고 있는 인근 국가들로 진출한다. 국경을 접하고 있는 터키는 당연히 그리스의 첫 번째 진출국이었다. 터키에 그리스와 유사한 신화가 많이 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통일된다. 그리스뿐만 아니라 터키·인도까지 진출한 알렉산더는 강력한 국가를 건설한다. 하지만 그의 사후 그가 지배했던 국가는 다시 산산조각 난다.

알렉산더의 뒤를 이어 로마가 등장한다. 로마는 그리스와 그 주변국을 점령하고, 거대해진 국가는 동서로마제국을 건설한다. 서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에 있고, 동로마는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정하고 통치한다. 수세기 동안 통치한 동로마는 서서히 힘이 쇠약해진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1453년 쇠약해진 동로마제국, 즉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면서 비잔틴제국을 멸망시킨다. 이슬람국가인 오스만투르크는 수백 년간 그리스가 있는 펠레폰네소스반도를 지배한다.

그리스는 1821년부터 1829년까지 독립운동을 벌여 1830년 독립을 쟁취한다. 다시 그리스란 이름의 국가를 되찾은 것이다. 무려 400년간 오스만의 지배를 받았다. 이와 같이 근대까지 그리스와 터키는 서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계속 반복해 왔다. 그 과정에서 민족도 상당히 중화된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보면 그리스의 역사와 터키의 역사가 상당 부분 중복되는 측면도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400년간 지배를 받은 그리스가 터키를 미워하는 건 당연하다고 보는 측면도 있다. 마치 한국이 일제 36년을 겪은 뒤 미워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더 결정적인 감정은 현대 들어서 폭발한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터키는 독일편에 가담했다가 패하고, 그리스는 연합국 측에 가담해 전승국 대열에 선다. 여기서 터키는 많은 땅을 빼앗긴다. 발칸반도의 땅은 이스탄불만 남겨놓고 모두 넘겨준다. 이때 400년간의 지배를 받은 그리스는 결정적으로 터키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사건을 일으킨다. 그리스는 과거 비잔틴 제국의 영광을 되돌리고 소아시아 해안과 에게해 일대의 그리스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이스탄불을 함락시켰을 뿐만 아니라 터키의 본토인 아나톨리아까지 원정 가서 초토화시킨다. 그리스 원정군은 열강의 도움을 받으며 별 어려움 없이 오스만 제국 영토로 진군해 많은 부분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터키의 자존심을 굉장히 무너뜨린 진군이었다. 어쩌면 감정 대 감정싸움으로 벌어진 전쟁이었다. 하긴 전쟁 자체가 감정싸움인 측면도 있긴 하지만. 이로 인해 두 나라는 감정의 골이 더욱 깊어졌다. 

하지만 현재 터키의 국부인 ‘무스타파 케말’에 의해 세력을 규합한 터키 독립군은 각지에서 그리스군과 전투를 벌여 대항했고, 결국 초반의 열세를 뒤엎고 터키군이 각지의 그리스군을 거의 대파하면서 마무리됐다.

지도를 보면 터키 바로 앞에 있는 지중해의 섬까지 그리스 영토로 표시돼 있다. 배를 타고 10분 거리에 있는 섬도 그리스령이다. 그러니 심심찮게 영토분쟁, 아니 섬분쟁이 벌어지고 있다.

출처 | 월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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