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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폐지 수집 손수레에서 발견한 이상한 책자는 '하피첩'...7억 5천만 원에 팔려
글쓴이 문화재방송.한국 등록일 [2021.01.15]

 


 

                 

 


 

폐지 수집 손수레에서 발견한 이상한 책자는 '하피첩'...7억 5천만 원에 팔려

 

 

하피첩의 '하피(霞帔)'란 중국 당송(唐宋) 시대 신부가 입은 혼례복을 말하는 데, 조선 시대에는 왕실의 비(妃), 빈(嬪)들이 입던 옷이다. 여기에서 하피란 다산의 부인 풍산 홍 씨가 시집 올 때 입고 온 붉은색 치마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 제대로 쓰자면 홍군(紅裙), 즉 '붉은 치마'라고 써야 옳지만 이는 해석하기 나름으로는 '기생'이라는 다른 뜻도 있기 때문에 그냥 붉을 하(霞), 즉 노을 하를 써서 '하피(霞帔)'라고 한 것이다.

한편 그로부터 3년 뒤 다산은 시집 간 외동딸이 눈에 밟혔던 모양이다. 서첩을 만들고 남은 천 조각에 한 해 전에 혼인한 외동딸에게 줄 그림을 그렸다. 꽃이 벙근 매화 가지에 올라탄 멧새 두 마리를 그려넣은 '매조도(梅鳥圖)'(고려대박물관 소장)가 그것이다. 유배 시절 장남 학연이 두어 차례 다녀간 적은 있지만,

아내와 외동딸은 그 긴 세월 동안 얼굴 한번 볼 수가 없었다. 하나 남은 딸의 시집가는 날도 함께 해주지 못했으니 아비 된 자로서 다산의 심경이 오죽했으리요.

 

딸을 시집보내고 불과 몇 달이 지났을까, 다산은 강진 유배지에서 만난 소실 정씨에게서 딸을 하나 얻었다.

이때 다산은 이미 해배 명령이 떨어져 곧 여기를 떠나야 할 처지였다. 저 어린 것이 여기 혼자 남아 있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다.

이 어린 딸 홍임을 위해 똑같은 크기의 그림 한 폭을 더 그렸다.

똑같은 매조도(梅鳥圖)인데 여기에선 멧새가 한 마리다. 이 그림은 실제 딸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古枝衰朽欲成搓 묵은 가지 다 썩어 그루터기 되려더니

擢出靑梢也放花 푸른 가지 뻗더니만 꽃을 활짝 피웠구나

何處飛來彩翎雀 어디선가 날아든 채색 깃의 작은 새

應留一隻落天涯 한 마리만 남아서 하늘가를 떠돌리라

 

이상 자료와 사진은 인터넷 검색창에서 전재했습니다.

다산 정약용의 보물 2점과 귀양지에서 부인이 보내준 치마 찢어 쓴 하피첩

 

정약용 초상화

 

 

다산 정약용 선생은 잘조선조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사상가이자 문학자로서 그의 학문 영역은 아주 광범하였다.

본관이 나주이고 부친이 화순 현감과 진주 목사를 지냈고 모친은 해남 윤씨다.

 

오늘은 다산사경첩茶山四景帖(보물 제1683호) 등 보물 2점을 비롯한 총 43건 142점의 유물을 남겼다.

그는 역경 속에서도 나라와 백성을 위해 고민했던 대학자였다.

 

 

다산사경첩茶山四景帖(보물 제1683호)
다산초당 전후좌우의 다조茶竈ㆍ약천藥泉ㆍ정석丁石ㆍ석가산石假山을 칠언율시로 읊고 이를 행서로 쓴 시의 모음.


다산이 유배를 가지 않았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지 않고 평탄한 관직생활만을 향유했었다면

오늘날 다산의 목민심서와 수많은 시문들은 없을 것이고 다산 또한 분명히 잊혀졌을 것이다.

 

 

< 체험과 견문을 기초로 저술한 목민심서 >

 



다산은 1762년에 팔당호 부근 마재 소내에서 태어나 10여년간 벼슬살이를 한 후 40세 때부터 18년간 귀양살이를 거쳐 더 이상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 마재에 돌아와 후학들을 가르치다가 75세 나이로 세상을 떳다.

다산은 22세에 소과에 합격하고 28세에 과거(대과)에 급제하여 당시 정조의 총애를 받고 경기도 암행어사 등의 직책을 맡아 순탄한 관직생활을 하였고 정조의 수원성 축조에도 설계에 참여했다.

 

 

 

 

세계문화유산 수원성

정약용의 일생에 중대한 전환이 되었고 당시 당파의 정적으로 부터 공격을 받은 것은 서학으로 알려진 천주교를 믿고 전파시킨 형제들과 친인척들 때문이었다.

다산은 조상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하는 천주교에 대해 다소 유보적이었을 것이다. 반면에 학문을 좋아하는 다산도 서학에 관한 책을 분명 읽었을 것이고 천주교를 마음으로는 수긍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산의 글에서 이따금 이를 엿볼 수 있다.

다산은 정조의 두터운 신임과 보호로 모면되어 황해도 곡산부사로 잠깐 자리를 옮기기도 했지만 결국은 '황사영백서' 사건으로 형제들과 가족들은 참수 당하고 다산은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강진으로 떠났다.

 

 

1780년대 천주교를 이끌었던 신자들이 지금의 서울 명동인 명례방에 있는 김범우의 집에서 기도하고 있는 모습. 정약전·정약종·정약용·윤지충 등 10여 명의 신자가 둘러 앉은 가운데 이벽이 강론을 하고 있다. 1984년 화가 김태가 그린 그림으로 절두산순교성지에서 소장하고 있다.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황사영백서'는 황사영이 북경 천주교 주교에게 알리기 위해 우리나라 신유옥사 등 천주교 박해 사건을 비단에 쓴 글이다. 이 사건의 발각으로 또 다른 엄청난 피바람이 이 강토에 몰아쳤다. 이 때 다산은 문초를 겪고 강진으로 유배를 간 것이다.

어쨋든 천주교 전래과정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북경에 가서 세례를 받았던 이승훈이 다산의 매부이고, 맏형 정약현은 이 벽의 매부이면서 황사영의 장인이었다.

신유박해 때에 둘째 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가서 숨을 거두었고, 막내형 정약종은 큰아들과 함께 참수 당했다. 또한 정약종의 부인과 아들 정하상과 딸 정정혜는 기해박해 때 순교했다.

 

다산은 처음에는 강진 밖 주막을 '사의재'라 칭하고 4년간 두문불출한 후 강진읍 뒷산 보은산방으로 옮겨 주역연구를 몰두했고, 다시 만덕산 서쪽 '다산초당'으로 옮겨 본격적인 집필활동과 교학에 힘을 쏟았다고 한다.

 

 

 



이 때 다산은 만덕산에 있는 백련사를 종종 찾아가 혜장선사와 교류하여 학문을 논했다고 한다. 또한 23세 아래인 초의선사를 제자로 삼아 그에게 유학 등을 계도하기도 했고 대둔산 대흥사 승려들과도 교류했다고 한다.

 


다산은 이 다산초당에서 유명한 <목민심서>를 집필하여 57세 때 이를 완성했는데 이듬해에 귀양에서 풀려나 남양주 마재 소내로 돌아와 생가에서 만년을 보냈다. '여유당'은 다산 생가의 명칭이고 또한 다산이 만년에 삼은 아호이기도 하다.

 

 

 

 

동국여지지도東國輿地之圖(보물 제481-3호)
정약용의 외증조 윤두서가 그림.

 

 

 

 

매씨상서평梅氏尙書平
<매씨상서梅氏尙書>가 위작임을 고증한 책.

 

다산 정약용의 하피첩(霞피帖).

나이 열 여섯에 한 살 연하인 정약용에게 시집 온 풍산 홍씨가 나이 오십 줄에

들어선 어느날 장롱 속에 고이 간직했던 빛 바랜 다홍치마를

강진에 귀양 가 있는 다산에게 보냈다.

 

다산이 나이 40에 귀양을 떠난 지 10여년이 넘었고 언제 해배(解配) 될지

가늠하지 못하는 처지에, 접어든 황혼에 대한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신혼 때 입던 그 치마가 장롱 속에서도 빛이 바랬으니

인생의 무상함을 탓해야 무엇을 하겠는가?

 

자식 아홉에 여섯을 가슴에 묻고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누에와 함께

자식들도 키웠으니 그녀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은 가히 짐작을 하고도 남는다.

 

다산의 나이 스물일곱에 과거에 급제를 하였고 13년 뒤에 다시 귀양을 갔다.

빠른 출세도 아니었지만 인생의 황금기에 유배를 가야만 했던 다산으로 인하여

가정 경제는 거의 부인 홍씨의 몫이었다.

 

38세에 얻은 농장도 세 살이 되던 해에 죽었고,

귀양지에서 그 소식을 들은 다산이나 혼자 그 일을 감당을 했어야 했던 부인 홍씨,

모두 애절하기는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다산은 요절한 아이들을 불쌍히 여겨서 “구장이와 효순이는 산등성이에다 묻었고,

삼동이와 그 다음 애는 산발치에다 묻었다. 농아도 필시 산발치에 묻었을 거다”라고

적고는 “오호라, 내가 하늘에서 죄를 얻어 이처럼 잔혹하니 어쩌란 말인가”라고

비통해 했다.

 

말없이 여섯 폭의 다홍치마가 보내 왔지만 다산은 그 치마를 잘라서 만든 서첩에

“노을 치마”란 뜻인 “하피첩(霞피帖)”이라 표지를 썼다.

찾아 온 황혼에 순응을 하자는 뜻으로 빛바랜 다홍치마를 보낸 것인지,

아니면 현재는 고통스러우나 아름다운 추억을 생각하며 힘을 내자는 뜻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다산은 그 치마폭으로 하피첩을 만들었다.

 

"내가 강진 귀양지에 있을 때, 병든 아내가 낡은 치마 다섯 폭을 보내왔다.

시집올 때 입었던 붉은색 활옷이었다. 붉은빛은 이미 씻겨 나갔고, 노란 빛도 엷어져서

글씨를 쓰기에 마침맞았다. 마침내 가위로 잘라 작은 첩을 만들어,

붓 가는 대로 훈계하는 말을 지어 두 아들에게 보낸다.

훗날 이 글을 보면 감회가 일것이고, 두 어버이의 흔적과 손때를 생각하면 틀림없이

뭉클한 느낌이 일어날 것이다.

이것을 하피첩(霞帔帖)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이는 곧 붉은 치마(홍 군, 紅裙)을

돌려 말한 것이다.

가경 경오년(1810) 초가을 다산(茶山)의 동암(東庵)에서 정약용 쓰다."

 

아들에게 쓴 시구(詩句)

病妻寄敝裙, 千里托心素, 歲久紅己褪, 悵然念衰暮, 裁成小書帖, 聊寫戒子句, 庶幾念二親, 終身鐫肺腑. 몸져누운 아내가 헤진 치마를 보내왔네, 천리의 먼 곳에서 본마음을 담았구려. 오랜 세월에 붉은빛 이미 바랬으니, 늘그막에 서러운 생각만 일어나네. 재단하여 작은 서첩을 만들어서는, 아들 경계해주는 글귀나 써보았네. 바라노니 어버이 마음 제대로 헤아려서, 평생토록 가슴속에 새겨 두어라.

 

 

 

정약용이 시를 써 넣은 산수도. 그림 작가 미상.

 

 

 

 

정약용이 시를 써 넣은 어도魚圖. 그림 작가 미상.

폐지더미 속 '하피첩' 경매, 최고가 낙찰, 소장품 되기까지

국립민속박물관 정약용 '하피첩' 공개
아들에게 보낸 편지 아내 치맛감에 적어
경매로 7억5000만원에 구입
민속박물관 최고가 소장품 기록

  • 등록 2015-10-14 오전 7:52:37

    수정 2015-10-14 오전 7:52:37

 

김용운 기자

[이데일리 김용운 기자] 2005년 수원에서 폐지를 수집하던 할머니의 손수레에서 발견한 고서적이 이듬해 TV의 문화재 검증프로그램에 나왔다. 감정위원들은 깜짝 놀랐다. 문헌에는 남아 있지만 실체를 보지 못했던 정약용(1762~1836)의 ‘하피첩’이었기 때문이다. 감정가 1억원을 매겼다. 문화재청은 문화재로서 가치를 인정해 보물 제1683-2호로 지정했다.

이후 개인수집가에게 갔던 ‘하피첩’이 지난달 서울옥션의 고서적 경매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파산한 저축은행이 갖고 있던 18점의 보물 고서적 중 한 점이었다. 추정가가 가장 높았던 고서적은 보물 제745-3호인 ‘월인석보’ 9권과 10권으로 3억 5000만원에서 경매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날 경매에서 가장 비싼 가격에 팔린 고서적은 바로 ‘하피첩’이었다. 낙찰가는 7억 5000만원. ‘하피첩’의 새로운 주인은 국립민속박물관이었다. 국립민속박물관 개관 이후 가장 비싼 가격에 사온 문화재였다.

국립민속박물관이 13일 박물관 영상채널 스튜디오에서 ‘하피첩’을 언론에 공개하고 소장 과정과 보존처리 방향 및 향후 전시계획을 밝혔다. ‘하피첩’은 정약용이 전남 강진으로 귀양온 지 10년가량 흐른 1810년께 본가인 남양주군 마현에서 부인 홍씨가 보내준 다섯 폭의 비단치맛감에 학연과 하유, 두 아들을 위해 쓴 편지를 모아 재단해 책자처럼 만든 서첩이다.

고려대박물관이 소장한 정약용의 ‘매조도’에 의하면 ‘하피첩’은 본래 네 첩이었다. 하지만 하나는 사라지고 세 첩만 전한다. 정약용은 부인의 체취가 남아 있는 비단치맛감과 한지 등에 아버지로서 두 아들에게 가르치고 싶었던 인생의 교훈을 정성으로 적어내렸다. 서문에는 다음과 같이 남겼다.

“나는 전원(田園: 농장)을 너희에게 남겨줄 수 있을 만한 벼슬은 하지 않았지만 오직 두 글자의 신부(神符: 절대적인 믿음)가 있어 삶을 넉넉히 하고 가난을 구제할 수 있기에 이제 너희에게 주노니 소홀히 여기지 마라. 한 글자는 ‘근’(勤)이요 또 한 글자는 ‘검’(儉)이다. 이 두 글자가 좋은 전답이나 비옥한 토지보다도 나은 것이니 일생동안 써도 다하지 않을 것이다.”
 


행서와 초서 외에도 조선후기 쓰는 이가 드물었던 전서로도 적었다. 세 첩 가운데 한 첩의 표지는 박쥐와 구름 문양으로 장식한 푸른종이며 나머지 두 첩은 미색종이로 만들었다. 세 첩 모두 표지 안쪽에 붉은 면지를 사용했다.

비단치맛감은 바느질했던 흔적이 있어 정약용의 부인 홍씨가 직접 입었던 옷을 해체해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홍빛이었던 치맛감은 옅은 갈색으로 변한 상태다. 제작한 이후에 한 번도 개장(改裝)하지 않아 19세기 초반의 제본 양식과 종이, 장식 등을 알 수 있다. 곰팡이와 얼룩이 여러 곳에 있고 접착했던 부분이 들뜨는 등 훼손됐지만 전반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저산소보관소에서 살충처리를 한 뒤 직물의 염료를 규명할 방침이다. 복원과정에선 원본과 가장 유사한 종이와 전통 접착제인 소맥전분풀을 쓰고 오동나무상자를 만들어 보관하면서 이르면 내년 2월에 일반에게 공개할 계획이다.

이문현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은 “정약용은 많은 서책을 남겼지만 간찰 외에 본인의 필체가 남아 있는 건 전해진 게 드문 만큼 ‘하피첩’의 가치는 크다”며 “특히 정약용이 남긴 전서는 ‘하피첩’ 외에는 없다”고 설명했다. 이 학예연구관은 “특히 부인이 평소 몸에 지닌 것을 가지고 서첩을 만들었기에 민속박물관이 추구하는 생활문화의 계승이란 측면에서 각별한 의미를 가졌다”고 덧붙였다.
 

 

원문보기
www.edaily.co.kr/news/read?newsid=01328406609532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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