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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가야 역사의 마지막을 수놓은 창령과 고령 기행
글쓴이 문화재방송.한국 등록일 [2020.12.19]

 사진 

 

가야 역사의 마지막을 수놓은 창령과 고령 기행

 

 

 

 

 

창녕을 두고 '제2의 경주'라고도 한다. 규모나 내용으로 보면 둘은 비교 대상이 못 된다. 그러나 경주와 견주는 그것만으로도 창녕이 지닌 가치와 의의가 크다는 얘기가 된다. 신라·백제 문화보다 훨씬 덜 알려진 가야문화는 신라와 백제의 각축 사이에서 거점 노릇을 했던 창녕에 지나간 역사의 보석 같은 흔적이 되어 촘촘히 박혀 있다.
창녕은 태백산맥을 등으로 삼고 서쪽으로 낙동강 건너 고령·합천, 남쪽으로 같은 창녕의 영산과 밀양·함안 등 주변 지역을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요지다. 창녕을 확보하면 낙동강 본류를 가운데 두고 함안의 아라가야와 고령의 대가야를 동시에 효과적으로 압박할 수 있다. 신라 진흥왕이 가야 진출의 교두보로 창녕을 병합하고 척경비를 세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사진 


- 영산 석빙고
옛 무덤 같은 외부, 과학적인 내부 

창녕과 고령을 찾아 떠나는 기행은 영산 석빙고(사적 제169호)에서 시작된다. 밖에서는 옛 무덤처럼 보이지만 내부는 과학적으로 세밀하게 만들어져 있다. 땅을 판 다음 벽은 석재로 쌓고, 바닥은 앞이 높고 뒤가 처지게 기울어지도록 해서 물이 잘 빠지게 했다. 천장은 기다란 장대석으로 무지개 모양을 만들었고 바람이 잘 통하게 돌을 얽고 지붕을 얹어 구멍을 냈다.
겨울에 강에서 깨끗한 얼음을 떼어내 여름에 쓸 수 있도록 저장했다. 일반 백성은 쓰지 못하고 양반이나 관에서 썼다. 경주 석빙고(보물제66호)·안동 석빙고(보물 제305호)·창녕 석빙고(보물 제310호)·청도 석빙고(보물 제323호)·현풍 석빙고(보물 제673호)·영산 석빙고 등 남아 있는 석빙고들이 모두 경상도에 있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신라 때부터 만들었다지만, 지금 남은 석빙고들은 모두 조선
시대 산물이다.
영산 석빙고 아래에는 만년교(보물 제564호)가 있다. 만년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을 만큼 튼튼한 다리라는 뜻이다. 하천 양쪽의 자연 암반 위에 화강석으로 반달 모양으로 무지개처럼 다리를 쌓은 위에 자연석을 올린 다음 흙을 깔아 길을 만들었다. 선암사 승선교(보물 제400호), 벌교 홍교(보물 제304호)와 함께 희귀한 유물인 동시에 조선 후기 남부 지역의 홍예교 축조기법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들머리 '만년교'라고 새겨져 있는 비석도 눈여겨볼 일이다. 다리가 완성되던 날 밤 고을에 살고있는 신통한 필력을 가진 열세 살 신동의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네가 신이 내려준 필력이라던데 내가 다닐 다리에 네 글씨를 새겨놓고 싶구나. 다리 이름은 만년교니라" 하고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 관룡사
잘 생긴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 

사진 
창녕 하면 관룡사(觀龍寺)를 빼고 말하기는 어렵다. 양산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된 
<관룡사 사적기>에 따르면 신라 흘해왕 40년, 가락국 이시품왕 4년(349년)에 창건됐다. 지리산 자락의 하동 칠불암과 함께, 불교가 가야를 통해 남방에서 바다 건너 전해왔다는 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종종 꼽힌다. 하지만 보통은 관룡사 창건을 583년(신라 진평왕 5년)으로 본다. 증법국사가 처음 짓고 나중에 신라 8대 사찰이 돼서 원효 스님이 제자 1000명과 더불어 화엄경을 설법했다는 것이다. 

사진관룡사 가는 길엔 예스러운 정취가 남아 있고 명물 석장승(경상남도민속자료 제6호)도 만날 수있다. 왼쪽 키가 큰 장승은 영감이고 오른쪽 작은 이는 할멈이다. 영감은 입술 밖으로 나온 이가 아래로 향하고 할멈은 위로 솟아 있다. 자세히 보면 영감은 깐깐해 보이고 할멈은 호탕해보인다.
그다지 가파르지 않은 오솔길을 걸어 관룡사에 이르면 뒤편 병풍바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대단하다. 돌문과 돌계단도 보기 드문 운치와 멋이 있다. 특히 돌문은 흔히 보는 일주문, 불이문과는 판이하다. 오래된 나무 두그루와 함께 서 있는 모습은 성황당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규모는 작아도 지닌 보물이 많은 절이다. 세월의 끼침이 느껴지는 대웅전(보물제212호) 단청에서는 자연스러움과 기품이 묻어난다.
약사전(보물 제146호)에서 빌면 아픈 곳을 낫게 해준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삼층석탑(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1호)과 마주보고 전각 안에 들어앉은 석조여래좌상(보물 제519호)은 묘하게 닮은 느낌을 준다. 튼실하고 우직한 남정네 같은 그런 모습이다. 이 약사전은 고려 말에 만들어진, 관룡사에 하나뿐인 임진왜란 이전 건물이다. 하지만 호젓한 맛이 예전만은 못하다. 

원음각(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40호)은 그런 아쉬움이 가장 크다. 사물(목어·운판·범종·법고)을 걸었다는 이 건물은 지금 막혀 있다. 드나듦에 걸림이 없이 사물 소리로 중생을 구해야 할진대 사방을 막아 놓았으니…. 원음각에 있어야 마땅할 목어는 대웅전 뒤쪽에 나뒹굴고 있다. 법고는 새로 만든 범종각의 새로 만든 범종 옆에 놓여 있다.
관룡사의 화룡점정은 용선대(龍船臺)다.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제295호)은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얼굴이 두툼하고 아주 잘 생겼다. 용선대는 절간 마당에서 20분이면 족히 오를 수있다. 오르면 한눈에 담기는 확 트인 세상이 눈길을 잡는다. 부처가 바라보는 동쪽 동짓날 해 뜨는 데도 좋지만 그 오른편 사람 사는 속세 풍경도 괜찮다.
용선대 부처를 가장 그럴듯하게 바라볼 수 있는 곳이 용선대가 아니라 관룡사 마당이라는 점도 재미있다. 마당 끄트머리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아득한 가운데 불상이 조그맣게 보인다. 천국도 지옥도 그대 마음 속에 있다. 너무 가까이서 매달리지 마라. 그것이 그대들이 반야용선으로 이르고 싶은 극락이다. 

- 옥천사터
고려 공민왕 때 개혁을 이끈 신돈이 태어나 자란 곳 
관룡사에서 나오다 화왕산 정상 가는 길과 관룡사 가는 길이 갈라지는 왼편 언덕배기에 향토문화재인 옥천사지(玉泉寺址)가 있다. 고려 공민왕 때 개혁을 이끈 신돈(?∼1371)이 태어나 자란곳이다. 역사는 대체로 승자가 기록한다. 권문세가의 횡포 속에 신돈은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만들어 빼앗긴 토지와 강압으로 노비가 된 사람들을 원래대로 돌리는 개혁을 추진했다.
한 쪽에서 보면 성인이고 다른 쪽에서 보면 눈엣가시다. 결국 역모로 처형당한 신돈을 승자들은 '요사스런 중(妖僧)'이라고 역사에 적었다.
신돈이 망가지면서 옥천사 또한 송두리째 망가졌다. 석탑·석등 따위는 죄다 부서졌고 기단석이나 장대석 또는 주춧돌 몇 개만 겨우 남았다. 정으로 깬 자국이 600년 넘게 지난 지금까지 뚜렷하다. 이렇게 철저하게 망가진 절터는 찾아보기 힘들다. 권력무상이라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여전히 내려놓지 못하는 권력이다.


- 창녕박물관
교동·송현동 고분군 등에서 나온 가야·신라 유물 

사진 
다음은 고분군과 함께 있는 창녕박물관이다. 창녕박물관은 바로 옆 교동·송현동 고분군과 계성 고분군 등에서 나온 가야·신라시대의 유물을 주로 보여준다. 고인돌도 있다. 계성고분 이전복원관에는 창녕 계성면에 있는 계성 고분군의 대형 고분 하나를 여기로 옮겨 복원해 내부를 살필 수 있도록 했다.
창녕 교동 고분군(사적 제80호)은 도로 바로 건너편 위쪽 송현동 고분군(사적 제81호)과 함께 가야시대에 만들어졌다. 금동관을 비롯해 귀금속 장신구와 철제무구, 토기 등으로 미루어 5~6세기 지역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짐작된다. 일부에서는 순장 흔적도 발견됐다. 송현동 고분군 15호분에서는 순장됐으리라 짐작되는 사람 뼈 4구가 나왔다. 열여섯 살 여성도 있었다. 꽃다운 여린 소녀는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사랑하는 이들을 두고 그렇게 생목숨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처절함이 사무친다. 교동·송현동 고분군 출토 유물들은 신라와 밀접한 관계를 보여 이미 5세기에 창녕 지역이 신라 영역에 포함되었음을 알려준다고도 한다.

사진진흥왕척경비(국보 제33호)는 창녕이 정치·군사상 요충지임을 말해준다. 임금이 두루 살피며 돌아다님을 기리는 다른 순수비와 달리 ‘순수관경(巡狩管境)’이라는 글자가 빗돌에 있지 않아 영토 개척을 기념하는 척경비(拓境碑)라 한다. 가까이 있는 경북 고령의 대가야 멸망보다 한 해 앞선 진흥왕 22년(561년)에 세웠는데, 진흥왕에 대한 사실 기록과 지명, 신하들의 명단과 직위가 적혀 있다. 진흥왕의 창녕 순수비는 이듬해 대가야 점령의 신호탄이었다. 


- 술정리 동삼층석탑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과 비길 만한 기품 
창녕 읍내에는 5일장이 선다. 3·8일 장날에 맞춰 가면 수구레국밥을 맛볼 수 있다. 방송을 타면서 유명해진 음식인데 수구레는 소가죽 안쪽에 붙어 있는 질긴 고기를 이른다. 장터 둘레에 창녕 석빙고와 술정리 동삼층석탑(국보 제34호)이 있다. 창녕 석빙고는 영산 석빙고와 더불어 경남에 남은 조선 후기 얼음 창고로 규모는 작지만 구조는 경주와 안동의 석빙고와 다르지 않다. 고령 가는 길에 현풍 석빙고를 둘러보며 이들 셋을 비교·대조해볼 수도 있다.

사진술정리 동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렸고 몸돌(옥신석)과 지붕돌(옥개석)을 각각 돌 하나로 구성했다. 위로 올라가면서 적당한 비율로 줄어드는 몸돌로 안정감과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수법도 정교해 기품이 석가탑으로 알려진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국보 제21호)과 비길 만하며, 경주의 석탑 양식이 지방으로 확산되는 과정도 보여준다.
대합면 신당마을 언저리 1080번 지방도가 왼쪽으로 휘어지는 들머리에는 '조민수 장군의 묘'라는 안내판이 서있는데 무덤은 1962년 발견됐다. 조민수는 같은 창녕 출신 신돈과 대척점에 있었던 인물이다. 신돈은 땅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려 했고 조민수는 권문세가 출신이어서 그대로 갖고 있으려 했다. 조민수(?~1390)는 요동을 정벌하러 떠난 5만 고려군이압록강 위화도에서 회군할 때 현지 최고 지휘관이었다. 당시 좌군도통수 조민수는 군사를 돌리자는 우군도통수 이성계의 설득을 따라 1388년 5월22일 압록강을 도로 건넌 다음 6월3일 개경에 이르러 팔도도통수 최영(1316~1388)을 몰아내고 우왕도 폐한다. 

사진 
우왕에 이어 조민수의 지지를 받은 창왕(재위 1388~1389)이 등극한다. 이어진 전제(田制)개혁국면에서 조민수는 대사헌 조준의 탄핵을 받아 창녕으로 귀양갔다가 곧바로 특사를 받았으나 이성계를 비롯한 개혁세력이 창왕을 죽이고 세운 공양왕 아래서 다시 창녕으로 귀양보내져 숨을 거둔다. 창녕은 개혁파 신돈과 수구파 조민수를 동시대에 낳은 땅이다. 

경남 창녕에서 경북 고령으로 가는 길은 중간에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을 지난다. 여기에는 현풍 석빙고(보물 제673호)가 있다. 조선 영조 6년(1730년)에 만들었는데 당시에 얼음 창고가 마을마다 설치되지는 않았음에도 크지 않은 현풍고을에 들어서 있으니 눈길을 끈다. 여기서 영산·창녕의 석빙고와 한번 견줘본 대가야의 고장 고령으로 넘어간다. 






- 대가야박물관
지산동 고분군 44호분 등 왕릉전시관이 중심 

사진 
대가야박물관의 중심은 대가야 왕릉전시관이다. 최초로 확인된 대규모 순장무덤인 지산동 고분군 44호분 내부가 실물 그대로 나와 있다. 무덤의 구조와 축조방식, 주인공과 순장자의 매장 모습, 껴묻거리의 종류와 성격까지도 바로 볼 수 있다. 대가야의 역사와 문화, 순장 풍습 등을 보고, 느끼고, 겪어볼 수 있게 만들었다. 박물관을 좋아라 하지 않는 이들도 기억에 남을 만큼 인상적이다. 옆에는 대가야역사관도 있다. 

사진사람들은 가야라 하면 김해, 가락국만 떠올리지만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내륙분지여서 방어하기도 쉽고 바로 옆 합천에서 손쉽게 철을 가져올 수 있었던 고령의 대가야는 후기 가야의 맹주였다. 낙동강 덕분에 교통도 좋았으므로 합천과 의령·창녕·현풍까지 함께 아울렀다.
지산동 고분군은 대가야의 세력이 절대 만만하지 않았음을 일러준다. 규모가 큰 것만도 수십 개에 이르고 아직 발굴도 안된 채 머리에 나무를 인 작은 고분까지 꼽으면 200기를 훌쩍 넘는다.
무엇보다 1977년 발굴된 크고 작은 널 35개는 우리나라 순장의 역사를 처음으로 확인해 준다. 저승에서 주인공이 먹고 쓸 것을 넣었던 남·서 석실에도 창고지기가 한 사람씩 순장돼 있다. 부부로 보이는 30대 남녀가 한 구덩이에 들어 있기도 하고 10살 남짓한 여자아이를 같이 넣은 석실도 있으며 30대 아버지와 8살 가량 된 딸도 함께 있다. 주인공을 위해 파묻은 석실이 무려 32개라니 인간이 휘두르는 권력 앞에 또다른 인간은 그저 무기력할 뿐이다.

사진우륵 기념탑은 우륵이 제자들과 함께 가야금을 탔다는 금곡(琴谷) 언덕배기에 있다. 대가야 가실왕(嘉實王)의 명을 받아 가야금 12곡을 제작한 3대 악성의 한 사람인 우륵의 생애를 기리는 의미다. 옆에는 우륵 초상을 모신 영정각도 있다. '정정골'이라고도 하는데 우륵이 연주하는 가야금 소리가 정정하게 들렸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 한다. 어쨌거나 우륵은 가야 멸망의 전조곡이었다. 대가야 직할지인 성열현(省熱縣, 경남 의령군 부림면) 출신인 우륵은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신라 진흥왕한테 항복한다. 진흥왕은 우륵을 국원(충북 충주)에 머물게 하고 대나마 법지(法知)·계고(階古)와 대사(大舍) 만덕(萬德)을 보내 전수받게 했다. 전해 받은 세 사람은 뒤이어 새로운 곡을 만들었고 우륵 또한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뛰어넘은 곡임을 인정하고 만다. 우륵이 지은 12곡은 이름만 남았다. 하가라도(下加羅都)·상가라도(上加羅都)·보기(寶伎)·달기(達己)·사물(思勿)·물혜(勿慧)·하기물(下奇物)·사자기(師子伎)·거열(居烈)·사팔혜(沙八兮)·이사(爾赦)·상기물(上奇物)이 그것이다. 


 영산 석빙고(경남 창녕군 영산면 교리 산10-2, 문의 : 055-530-1473) 창녕 관릉사(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292, 문의 : 055-521-1747) 창녕박물관(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리 87-1 문의 : 055-530-2246) 창녕 석빙고(경남 창녕군 창녕읍 송헌리 288 문의 : 055-481-4650) 술정리 동삼층석탑(경남 창녕군 창녕읍 시장2길37 문의 : 055-530-1473) 현풍 석빙고(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현풍동로 86) 대가야 왕릉전시관(경북 고령군 고령읍 지산리 460, 입장료 어른 2000원, 학생 및 청소년 1500원, 한 장의 관람권으로 대가야박물관, 왕릉전시관, 우륵박물관을 모두 관람할 수 있다. , 매주 월요일 휴관. , 문의 : 054-950-6065 홈페이지 : www.daegaya.net) 우륵기념탑(경북 고령군 고령읍 쾌빈리 15, 문의 : 054-950-6105) 

*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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