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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의병의 날 특집] 태백산 호랑이,일본군이 두려워 했던 신돌석 의병장을 친척이 암살
글쓴이 tntv 등록일 [2020.06.05]

 

 

<신돌석 장군 기념관 충의사에 있는 초상화>

신돌석 申乭石 / 본명 신태호(申泰浩)1878~1908.
대한제국 시기 항일의병운동의 평민출신 의병장.

 

사람들은 신돌석하면 '신출귀몰, 축지법, 평민 의병장, 태백산 호랑이' 등의 단어를 떠올린다.

그는 '1906~1908년 사이 경상도 영덕을 중심으로 격렬한 의병 전투를 펼친 민족의 영웅이자

신화의 주인공'이었다.

(김희곤, '신돌석; 100년 만의 귀향').

영덕에서 태어난 그는 1906년 22세 때 고향의 주점 앞에서 거병하여 의병대장이 되었다.

자수성가한 아버지가 재산을 털어 군자금을 마련해 주었다.

('의병대장 신공유사', '신장군실기')

 

중학교 국사 교과서의 ‘항일의병 투쟁의 전개’ 부분을 펼치면 신돌석(1878~1908년)에 대해

이렇게 기술해 놓았다.

“을사조약 강요 이후에는 규모가 큰 의병부대가 여러 곳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하였다.

이때 의병장으로 활동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최익현 신돌석 등을 들 수 있다.

평민 출신인 신돌석은 평해·울진·영해 등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는데,

의병수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항일의병 투쟁과정에서 평민 출신인 신돌석이 의병장이 되었다는 사실은

의병운동이 신분을 초월한 국권수호운동으로 전개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영해버스터미널에서 농어촌 버스를 타고 조금만 가면 영덕 아산병원 정류장에 이른다.

이곳에서 400m 정도 걸어가면 신돌석 장군 유적지를 만날 수 있다.

 

 

 

<신돌석 장군이 태어난 생가>

 

 

<그 당시 평범한 농가였음을 보여 준다.

전북 정읍군에서 보았던 전봉준 장군의 생가와 비슷하다>

 

 

 

 

 

1, 신돌석 장군의 유년시절

신돌석 장군의 유년시절은 육이당 이중립 선생에게 글을 배우고, 밤이면 남모르게 홀로 병서를 읽었다.

열 살이 지나면서 장대한 청년의 체격으로 성장하여 역발산의 힘을 지니게 되었고, 

15세에는 큰 기와집과  큰 마무를 뛰어 넘을 정도로 날렵하였다고 전한다.

 

 

 

2, 김하락 유시연 의병장과 영덕 연합전

1896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으로 을미의병이 일어나자 장군도 만 18세의 나이로

100여명의 동지를 규합해 영해에서 봉기하였다.

이때 의성과 이천지방의 의병장 김하락과 유시연이 경주에서 영덕으로 밀려와

연합전을 요청하자 ,이를 받아들이고 일본군과 강구에서 격돌하였다. 

이 전투에서 승리하던 의병이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에 밀려 패하고 (김하락 의병장 자결)

남은 의병은 일월산으로 후퇴하여 유격전으로 맞섰다.

 

 

 

3, 월송정의 시(詩)

고종황제의 권유로 영해의병진을 해산한 신돌석 장군은 10여 년간 전국을 떠돌며

우국지사들과 애국충정을 토로하며 동지들을 규합했다.

어느 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월송정에 올라 낙목에 가로 놓인 단군의 터전을 한탄하며,

조국의 앞날을 걱정해 우국(憂國)이란 시(詩)를 지었다.

 

 

 

4, 영릉의병진 창군

1904년 중기의병이 일어나고, 일제의 강압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

1906년 4월 신장군은 부모님과 협의하여 가산을 정리하고

군자금을 확보한 뒤에 영릉의병진을 일으키니 동지가 300여명에 이르렀다.

 

 

 

5, 영해읍성 공격

신돌석장군은 전열을 정비한 후 영해읍성을 포위하였다.

성읍에 관군이 사력을 다해 방어했으나 끝내 당하지 못하고 달아났다.

이에 놀란 적은 대구와 경주의 진위대를 영해로 급파했다.

 

 

 

6, 일본선박 9척 격침

영릉의병진 창군 후 영해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을 격파한 뒤 그 해 4월,

삼척시 근덕면 장흥관으로 이동하여 정박중이던 일본선박 9척을 격침시켰다.

이 무렵 각지에 격문을 뛰워 의병을 모으니 모여든 의병이 수백명을 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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