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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한국의 명당(名堂) - 롯데·금호·한화·임광토건 家 풍수 답사
글쓴이 tntv 등록일 [2020.05.17]
금호그룹 창업주 박인천의 증조부 묘


한국의 명당(名堂) - 롯데·금호·한화·임광토건 家 풍수 답사

안산은 크고 대범하게 보이나 봉우리 5개가 서로 외면하고 제각기 노는 형상이니...

글 | 김성수

  •  
 
한화 창업주 일가의 선영

지난 7월 하순 어느 날, 장마 끝 무렵의 궂은 날씨 중에 문득 갠 날이 있어 서둘러 서남쪽으로 가는 길을 잡았다. 도중에 천안을 지나다가 「청수지구 택지개발사업」을 알리는 큰 입간판과 울타리를 둘러친 광대한 공사현장을 지나게 되었다.
 
  낯익은 곳이었다. 10여 년 전 방문했던 기억이 살아났다. 한화그룹 창업주 金씨 일가의 선영(先塋)이 개발지구의 한가운데 있었다. 개발 예정지구는 이미 절반쯤 산을 깎아 싯누런 황토가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남아 있는 숲속에 金씨 일가의 선영이 있었는데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자동차를 세워 놓고, 불도저가 뒤집어 놓아 길이 끊어진 질퍽한 땅을 지나, 가랑이를 휘감는 잡초를 헤치고 숲속으로 들어갔다.
 
  한화그룹을 낳은 현암(玄岩) 김종희(金鍾喜·1922~1981)의 고향은 옛 천안군 천안면 부대리, 바로 지금의 천안시의 중심 부분이다. 지금 개발의 삽날 앞에 놓인 선영에는 현암의 증조부 묘소를 비롯하여 현암 일가의 묘소 10여 基(기)가 모여 있었다. 10여 년 전 이곳을 방문했을 때 그중 현암의 증조부(現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고조부) 묘소에 강한 생기가 있어 한화그룹의 오늘을 낳은 발복의 근원임을 확인한 일이 있었다.
 
한화그룹 창업주 김종희 일가의 선영이 있던 자리.
  한화그룹은 그 무렵 공주지역에 다른 가족 묘원을 만들어 별도의 선영을 축조하고 있었는데, 새로 만든 공주의 선영에는 생기 넘치는 진혈(眞穴)의 명당이 한 곳도 없었다. 즉 한화그룹의 명당 기운은 바로 이곳에 있는 현암의 증조부 묘소가 유일했다.
 
  질퍽거리는 황토지대가 끝나고 아직 솔숲이 남아 있는 야산으로 들어갔다. 조금 걸어 들어가니 한화그룹 선영이 나타났다. 묘소들은 모두 파서 이장(移葬)해 버리고 광(壙)이 있었던 자리마다 구덩이만 을씨년스럽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현암의 증조부 묘소가 있던 구덩이를 살펴보니 10여 년 전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강한 생기가 솟아나고 있었다. 묘소는 가고 기(氣)만 살아남아 있었다.
 
  한화 집안 묘소 중 유일한 명당이었는데 아까웠다. 윗대들도 대부분 이 부근에 있었는데 모두 이장(移葬)했다. 지방 장묘 전문업체에 확인해 보니 오래된 유해는 현장에서 화장(火葬)하고, 증조부까지는 공주에 있는 선영으로 이장했다고 한다.
 
 
  임광수 임광토건 창업주의 증조부모 묘
 
임광수 임광토건 창업주의 증조부모 묘.
  증조부 묘소가 있던 아래쪽에 현암의 형인 김종철의 묘소가 있었는데, 이 묘소는 현재의 개발사업과 관계없이 오래 전에 공주 선영으로 이장했다. 그 자리 역시 좋은 자리는 아니라는 것이 풍수계의 일반적인 평이었다. 무덤들이 사라진 빈 터에는 지난날 산신제를 지내던 제석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한화그룹은 청수지구 택지개발사업 중 한 지역을 맡고 있는데, 아이러니하게 선영을 없애고 그 위에 새 도시를 건설하는 공사의 일익을 맡은 셈이다.
 
  천안에서 남쪽으로 내려가 충남 조치원읍 외곽의 번암리 안동네 뒷산, 건설회사 임광토건의 창업주 대표인 임광수(林光洙)씨의 증조부모 묘소를 찾았다. 묘소는 번암리 안동네와 바로 이어진 야트막한 뒷산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마을과 머리를 맞닿을 정도의 거리인데 마을 사람들이 돌보아 주는 듯 잘 가꾸어져 있었다.
 
  「學部主事扶安林氏圭喆之墓, 配淑夫人金海金氏(학부주사부안임씨규철지묘, 배숙부인김해김씨)」
 
  임광수의 증조부모 묘소였다. 야트막한 산의 능선 위에 자리 잡은 건좌(乾坐)의 명당이었다. 생기가 있었고, 무덤에서 바라보면 특히 안산이 수려했다.
 
  풍수계에서 흔히 하는 말 중에 「명당집 자손」이라는 말이 있다. 조상 선영 중에서 명당 하나를 가진 집안의 자손들이 어딘가 모르게 혈색이 좋고 자신감과 창의력 넘치는 일을 벌여 성공하는 일이 많다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임광수씨가 「명당집 자손」의 특징을 지녔다면 그 근원은 바로 이 작은 음택이었다.
 
  증조부모 묘소의 우측 산록에는 조부 임헌록(林憲祿)의 묘소가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증조부보다 가까운 조부 묘소를 더 소중하게 여겨 치장하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林씨 가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증조부모 묘소에 비해 조부 묘소가 봉분이 거창하고 치장이 돋보였으나 안타깝게도 수맥(水脈)이었다. 즉, 발복의 근원인 명당은 허술한 모습 그대로였으나 수맥 위의 무덤은 상대적으로 장엄하게 가꾸고 있었다. 명당은 묘소의 겉모습 가꾸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허기진 스님께 공양하고 얻은 명당 터
 
  서울에서 새벽에 떠났으나 도중에 천안과 조치원을 들렀기 때문에 오후 늦게야 이번 여행의 목적지인 전남 나주시 공산면 송죽리 큰산골에 닿았다. 금호그룹 창업주 박인천(朴仁天·1901~ 1984)의 증조부모(합장) 묘소가 있는 곳이다.
 
  묘소는 산 아래 포장도로에서 한눈에 확인될 정도로 잘 보였고, 산 아래 마을 뒤편에는 제각이 있었다. 산중턱까지 가파른 길이었다. 오르는 길은 목조 계단으로 잘 다듬어 놓았으나 한여름의 염천 아래서 산으로 오르는 길이 쉽지 않았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산으로 오르는 길의 절반 정도는 길 옆을 신우대(海藏竹·해장죽) 숲을 만들어 놓아 여름 폭양과 겨울의 찬바람을 조금이나마 가려 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묘소에 오르니 멀리 좌측으로 영산강 허리가 잠깐 보였다. 물이 내 앞으로 들어와 산을 감싸고 가니 부자될 형국이다. 앞의 안산이 개발로 조금 손괴되었으나 큰 지장은 없고, 백호가 잘 돌아 명국을 빚어 놓았다. 석산으로 토질이 척박한 땅이라 봉분의 잔디가 따가운 여름 햇살을 힘겹게 견디고 있었다.
 
  먼 옛날의 일이 아닌데도 이 묘소가 여기 있게 된 인연설화가 전해 온다. 원래 영산강 건너편에서 작은 농토를 일구며 살던 가난한 농사꾼 박씨 총각은 어느 날 밭에서 일을 하다가 허기져 몸을 가누지 못하는 스님을 보고 자신이 먹으려고 가지고 간 밥을 내주었다.
 
  스님은 밥을 먹고 기운을 차린 후에도 떠날 기세가 아니었다. 할 수 없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집으로 모시고 와서 공양했다. 한동안 머물던 스님이 떠나면서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없다』면서 무덤 자리를 점지해 주었다.
 
  총각(박인천의 조부)은 이곳에 부친 무덤을 썼는데 바로 이 명당 자리였다. 뒤에 모친이 별세하자 합장했다. 『적선(積善)해야 명당을 얻는다』는 말 그대로였다.
 
  청룡의 허리가 끊긴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해방공간의 혼란 속에서 무덤 주인의 자손 중 非命(비명)에 간 사람이 있었으니 끊긴 청룡의 형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묘소는 「學生密陽朴公之墓 配 儒人 平海吳氏(학생밀양박공지묘 배 유인 평해오씨)」의 합장묘소였다. 합장을 해도 두 사람의 壙이 차지한 자리는 엄연히 다른데, 이 묘소는 부인 쪽이 眞穴이었다.
 
 
  水脈 위에 모신 박인천의 묘
 
금호그룹 창업주 박인천의 조부모 묘(위)와 박인천의 묘(아래).
  지맥(地脈)이 꿈틀거리며 내려와 하나의 국세(局勢)를 만들 때는 그 속에 생기 넘치는 진혈(眞穴)을 하나만 빚기 아쉬운지 주변에 다른 진혈이 있게 마련이다.
 
  朴씨 묘소 주변에서도 어김없이 그런 현상이 발견됐다. 금호 박인천의 증조부모 묘소의 지척에 증조부모가 누워 있는 현재의 자리보다 더 강한 생기가 나오는 진혈이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재 광주시 북구 광주중앙女高 뒤편에 있는 박인천의 묘소를 이곳으로 옮긴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정작 적선하여 부친 묘소를 명당에 모셨던 당사자, 즉 박인천의 조부는 그의 선친 묘소에서 약간 떨어진 나주시 왕곡면 박포리 마을 어귀에 있었다. 여기서도 영산강은 지척에 흐르고 있었는데, 높이 쌓은 제방이 아니었으면 강물이 보일 만한 위치였다.
 
  이 묘소 역시 氣가 살아 있는 명당이었다. 그러나 내 앞을 지나가는 영산강을 백호가 걷어 주고 氣가 살아 있는 자리라는 것 말고는 뒤가 없는 속발지로서 장구한 호흡의 발음지는 아니었다. 어쨌든 금호그룹은 명당 두 개를 가진 집안으로 확인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광주시 북구에 있는 광주 중앙女高 경내에 있는 금호그룹 창업주 박인천의 묘소를 둘러보았다. 기업을 일으켜 돈을 번 후 그 돈의 일부를 인재(人材) 양성에 투입하여 미래 국가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겠다는 강한 의지가 보이는 것이 朴회장의 무덤이었다. 공원처럼, 산 교육장으로 다듬어지고 꾸며진 묘역 앞에는 朴회장의 등신대 동상이 살아 있는 듯 생동하는 모습으로 서 있었고, 그 뒤편으로 잘 가꾸어진 잔디 동산 한가운데에 朴회장 내외가 잠들어 있었다.
 
  「錦湖密城朴公仁天之墓 配 全州李氏 雙兆(금호밀성박공인천지묘 배 전주이씨 쌍조)」
 
  안산이 없어 묘역 전체에 명당이라 할만한 자리가 없었고, 특히 박인천 묘소는 수맥(水脈)이었다.
 
  후세들에게 삶의 지표를 생생하게 전하려는 교육적 의지와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꼭 학교 부지에 신후지(身後地)를 잡아야만 했는지 아쉬움이 남았다.
 
  흔히 명당(明堂)이라고 하면 「背山臨水(배산임수)에 左靑龍 右白虎(좌청룡 우백호)가 뚜렷하고 안산이 수려한 땅」을 꼽는다. 그러나 아무리 형국이 좋아도 생기가 없으면 명당이 아니라 허화가국(虛華假局)이다. 「형국을 갖추었으면서도 생기가 솟아나는 진혈이 있는 곳(음택과 양택 모두 해당된다)」이 진정한 명당이다. 필자는 이를 일반적으로 말하는 명당과 구분하기 위해 「名堂(명당)」으로 표현해 왔다.
 
 
  롯데그룹 신격호(辛格浩) 일가를 낳은 5대조 묘소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5대조 묘(앞).
  방향을 돌려 국토의 동남쪽 끝자락인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로 향했다. 롯데그룹 창업주 신격호(辛格浩호·1922~ )와 농심그룹 창업주 신춘호(辛春浩·1930~ ) 등 다섯 형제의 기업인을 낳은 영산(靈山) 신씨(辛氏)의 근원을 찾아나섰다.
 
  먼저 이들의 생가(生家)가 보존돼 있는 삼동면 둔기리에 닿았다. 멀리 동쪽에서 서쪽 방향으로 내려온 용맥의 끝부분이 저수지(대암호)를 만나 멈추었는데 저수지 가까운 지점에 산을 등지고 정남향의 초가삼간이 옛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지붕은 억새로 이었고, 사립문(동남향)을 잘 엮어서 만들어 놓았다. 좌측에는 작은 헛간이 있었다. 모든 것이 옛 모습 그대로였다.
 
  산이 끝나는 지점으로 도로가 통과하는데 도로 저쪽에는 대암호가 펼쳐져 있고 辛씨 소유의 별장이 우람하게 서 있어 이 가문의 어제와 오늘이 한눈에 펼쳐졌다.
 
  대암호는 1969년에 만들어졌다. 둔기천이 태화강으로 유입되는 지점에 댐을 만들었는데, 辛씨 형제들이 태어나고 자란 옛 둔기리 마을은 이때 만들어진 저수지의 수면 아래로 영원히 묻혀 버렸다. 辛씨 형제들은 수몰지(水沒地)의 옛집을 고스란히 산 밑으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바로 새로 옮겨 놓은 그 집이 드물게 보는 명당이었다.
 
  삼간짜리 초가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한가운데를 가르며 氣가 있었다. 드물게 보는 경우였다. 대개 명당집이라도 안방이나 대청 또는 건넌방 등 어느 한 부분으로 생기가 솟아나는 경우가 많은데 복원해 놓은 辛씨 옛집은 氣가 집 전체를 횡으로 꿰뚫고 있으니 집안의 어느 곳에서도 氣가 넘치는 셈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사용하지 않고 그저 기념물로만 존재하니 이 집이 천하명당인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생가에서 제법 거리를 두고 삼동면 작동리에 신격호의 5代祖 묘소가 있었다. 辛씨 일가의 묘소들을 면밀하게 관찰해 본 결과 그중 명당은 5대조 묘소였다.
 
  가까운 조상일수록 장엄하게 치장하는 것이 모든 자손들의 공통심리인데 辛씨 일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발복의 근원인 5대조 묘소는 봉분이 낮았을 뿐 아니라 주변을 화려하게 단장하지 않았다. 다만 비석 하나만은 확실하게 서 있었다.
 
 
  안산 때문에 집안 화목에 문제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생가.
  정남향의 묘소에는 정중앙으로 강한 생기가 있어 영산辛氏 후손들의 역동적인 창조력의 원천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특징은 주작(앞)이 길고 두텁다는(長厚) 것이었다. 길게 내려온 용맥(龍脈)의 끝 부분에 진혈이 맺히는 것이 일반적이다. 특별한 경우 중간에 아주 큰 진혈이 맺히는 辛씨 5대조 묘소가 바로 이 경우였다. 穴의 기운이 매우 크다고 알려져 있다. 청룡 쪽(동쪽)에서 주산을 이루고 뻗어 와서 혈을 맺었는데 大穴(대혈)이었다.
 
  청룡은 내 본체보다 낮지만 혈 앞에서 水口까지 100m 이상을 감싸고 돌았다. 백호는 청룡보다 높고 아름다운 형상으로 잘 걷었다. 보은천, 둔기천을 비롯해 크고 작은 네댓 줄기의 물이 내 앞으로 들어와 뒤로 빠지니 풍수 용어 중 「청파수가 내 앞으로 들어와 뒤로 빠지는」 형상이니 대부(大富)가 나올 형국으로 매우 드문 대지다.
 
  내 앞을 돌아 뒤로 빠진 물이 대암호에 모인다. 물은 여자를 상징하니 시초에는 여자의 노력에 힘을 얻는다.
 
  「地無十全(지무십전)」이라는 말 그대로 국내에 몇 개 없는 큰 穴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아쉬운 것은 안산이었다. 안산은 크고 대범하게 보이나 봉우리 5개가 서로 외면하고 제각기 노는 형상이니 자손들의 화목이 이 가문의 큰 과제가 될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辛씨의 발복 근원을 두고 말하기를 신격호 형제의 조부(辛奭坤·신석곤·1872~1944) 묘소를 꼽는다(碧峯處士 辛公之墓·벽봉처사 신공지묘). 임금 王(왕) 字로 앞산이 들어오니 대지명당이라 하나 필자가 보기에 생기가 없어 자리가 아니었으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그냥 「무덤」일 뿐이었다. 증조부(辛·1826~1877) 묘소는 대암호 건너편에 있었는데 이 역시 명당이라 할 수 없는 「무덤」이었다.
 
  마지막으로 선친(辛鎭洙·신진수·1902~1973) 묘소. 장례 후 흉도가 시신의 목을 잘라 가서 돈을 요구한 엽기적인 사건이 있었던 바로 그 묘소다. 이 묘역 또한 청파수가 내 앞으로 들어오고 5대조 묘소 못지않은 진혈이 묘역 내에 있었으나 아깝게도 선친 묘소는 실혈한 채 수맥(水脈)에 있었다.
 
  그 때문에 하늘의 조화로 시신발동(屍身發動)의 해괴한 일이 벌어졌으나 문중에서는 이 소동이 암시하는 바(하늘의 뜻)를 알았는지 몰랐는지, 되찾은 시신의 머리를 원래 그 자리에 묻어 원상회복시켜 놓은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듯하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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