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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국보 78호 반가사유상의 얼굴과 미소, 그리고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의 얼굴과 미소
글쓴이 tntv 등록일 [2020.03.01]

국보 78호 반가사유상의 얼굴과 미소1 국보 78호 반가사유상의 얼굴과 미소1


국보 78호 반가사유상의 얼굴과 미소1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의 얼굴과 미소2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의 얼굴과 미소2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의 얼굴과 미소2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은  영국 런던의 브리티시 뮤지엄(영국박물관, 일명 대영박물관),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으로 꼽힌다. 이곳에선 2013년 10월말부터 2014년 2월말까지 ‘황금의 나라, 신라’ 특별전이 열렸다. 신라인들이 황금으로 만든 금관과 장신구, 불상, 토기, 공예품 등 신라의 문화재 130여 점을 선보이는 자리였다.

이 전시에서는 여러 황금 유물이 관람객들을 사로 잡았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단연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7세기 전반, 높이 93.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었다. 미국 언론은 이 반가사유상을 두고 “세계적 수준의 세련미. 그 아름다움이 할 말을 잃게 만든다”고 평가했다.


국보 83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의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전시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국보 83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의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전시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국보 83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의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전시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2013년 여름,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전시를 앞두고 논란이 뜨거웠다. 그건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을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전시에 내보낼 것인가, 말 것인가의 논란이었다.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의 소장자인 국립중앙박물관이 미국 전시에 출품하기로 하고 문화재위원회의 국보 반출 승인을 받았다. 그런데 이를 두고 찬반 논란이 벌어진 것이다. 찬성론자들은 “세계 최고인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열리는 신라특별전에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을 출품해 우리 문화재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자”고 주장했다. 이와 달리 반대론자들은 “우리 최고 문화재를 해외에 너무 자주 내보낼 경우 훼손될 우려가 크다. 국보 83호는 그동안 해외전시에 너무 많이 출품되었기 때문에 안전을 위해 이번에는 내보낼 수 없다”고 반박했다. 찬성 의견이 관람객을 위한 문화재 활용과 홍보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반대 의견은 문화재 보존에 우선을 둔 것이었다.

논란 속에서 최종 결정권자인 문화재청장이 해외 반출에 반대했다. 문화재청이 불허 결정을 내리면 국립중앙박물관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사안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의 토마스 캠벨 관장은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이 빠질 경우, 특별전 자체를 열 수 없다”며 청와대에 출품을 허락해달라는 내용의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치열한 논란과 우여곡절 끝에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바다 건너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전시에 출품되었다. 문화재청은 “문화재 보존관리가 가장 중요하지만 특별전이 우리 전통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좋은 기회라는 점을 고려해 해외 반출을 승인한다”고 승인 이유를 밝혔다. 그렇다면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 우리의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을 그렇게 원했던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그건 간단하다. 매력적인 걸작이기 때문이다.




● 중생을 위해 사색에 빠진 미륵보살

국보 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6세기 후반, 높이 83.2㎝,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석굴암과 함께 한국 불교조각의 최고 작품으로 꼽힌다. 불교조각 가운데 최고일 뿐만 아니라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문화재로 내놓기에 전혀 손색이 없다. 국보 78호 반가사유상은 삼국시대 6세기 후반에,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은 삼국시대 7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삼국 가운데 정확하게 어느 나라에서 만들었는지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달라 단정 지을 수는 없다.


 2004년 경복궁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국보 78호와 국보 83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을 함께 전시할 때의 모습. 두 반가사유상을 한 자리에서 전시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2004년 경복궁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국보 78호와 국보 83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을 함께 전시할 때의 모습.


두 반가사유상을 한 자리에서 전시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우선 그 이름의 의미부터 알아보기로 하자. 한쪽 발을 올려놓았다고 해서‘반가’, 깊이 생각하고 있다고 해서‘사유’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들 두 반가사유상은 모두 오른쪽 다리를 왼쪽 무릎에 올린 채 깊은 사색에 빠져 있는 모습이다. 오른 뺨에 살짝 갖다 댄 손에서 사유의 분위기가 깊이 전해져 온다.

두 반가사유상은 사색에 빠진 미륵보살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미륵보살은 56억7천만 년이란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이 세상에 찾아와 부처가 되고 많은 중생들을 구제하도록 되어 있는 보살을 말한다. 그렇다보니 이 미륵보살의 책임은 막중하고 그로 인해 어깨가 무겁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지금은 저 도솔천(兜率天)에서 수행하면서 깨달음을 위해 고뇌하고 사유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 땅의 중생들을 모두 불교의 가르침으로 이끌 것인지, 그들에게 어떻게 환희와 영광의 세계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인지, 깊이 사색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고대 불교에서 반가사유상은 독립된 예배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반가사유상은 독자적인 불상으로 자리 잡았고 그로 인해 독자적인 조형미의 불교조각으로 발전해나갔다.

국보 78호와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모두 서울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이곳의 독립된 전시실에서 두 반가사유상을 몇 달씩 교대로 전시한다. 그 전시실에 들어서면 심오한 사색의 분위기가 단연 압권이다. 이곳은 어둑어둑하다. 그래서 전시공간에 들어서는 순간엔 잘 보이지 않는다. 잠시 후 반가사유상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곧이어 진열장 유리벽에 비쳐 사방팔방에서 하나둘 반가사유상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신비로운 만남이다.




● 불교적 조형미의 정점

국보 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전체적으로 여성적이면서 장식이 화려하다. 이 미륵보살은 태양과 초승달이 결합된 모양의 화려한 보관(寶冠)을 쓰고 있다. 이 보관은 태양과 초승달을 결합했다고 해서 일월식(日月蝕)이라고 부른다. 일월식의 보관 장식은 원래 사산조 페르시아의 왕관에서 유래했다. 이것이 실크로드(비단길)를 통해 동쪽으로 전해지면서 보살상의 보관으로 활용된 것이다. 보관에서 흘러나온 두 가닥의 장식은 좌우로 어깨로 길게 늘어져 있다. 얼굴은 비교적 넉넉하며 상체는 곧고 늘씬하다. 상체에서 하체로 이어지는 곡선미가 유려하고 우아하다. 목 뒤로 돌아 두 어깨를 감싼 천의(天衣)는 역시 부드럽고 유연하다. 치마에 드러난 U자형 주름 역시 마찬가지다.


국보 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국보 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국보 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국보 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국보 78호 반가사유상은 두루두루 여성적인 분위기가 강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힘이 넘친다. 특히 옆 모습을 보면, 신체의 곡선과 곡신이 주는 탄력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힘이 위로 솟구쳐 오르는 듯하다. 양 무릎과 의자 덮개에 새긴 주름의 경우, 타원과 S자형 곡선이 서로 어우러지면서 역동적인 흐름을 보여준다. 뺨 위에 살짝 갖다댄 오른손 손가락은 국보 78호의 절정 가운데 하나다. 손가락 하나하나가 정적이면서 동적이다. 거기 내면의 깊은 깨달음이 달려 있다.

어찌 보면 국보 78호는 그 신체의 비례가 다소 비사실적이다. 사유하는 보살의 특징을 드러내기 위해 팔과 허리 등을 약간 과장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흠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를 두고 “오히려 그 비사실적인 비례를 통하여 가장 이상적인 사유의 모습을 창출한 것”이라고 평가하는 것이다.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그 높이가 93.5cm로, 금동으로 만든 반가사유상 가운데 가장 크다. 이 미륵보살은 봉우리가 셋인 산의 모습을 한 보관을 쓰고 있다. 그래서 이 보관을 삼산관(三山冠)이라 부른다. 그 모습이 연꽃을 닮았다고 해서 연화관(蓮花冠)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관의 표면에 아무런 장식이 없어 단순하지만 그 단순함 덕분에 오히려 더 강직한 분위기가 전해온다.

국보 83호는 목에 두 줄의 목걸이만 있을 뿐 국보 78호에 비해 별다른 장식이 없다. 얼굴은 볼이 통통해 다소 풍만한 느낌을 준다. 눈썹의 선은 원을 그리며 콧등으로 이어졌다. 입은 살짝 다물었다.

이 미륵보살은 벗은 몸이다. 가슴의 근육이 살짝 도드라지고 허리는 잘록하다. 얼굴에 살짝 대고 있는 오른손 손가락 표현을 보면 그 움직임이 매력적이다.  네 번째 약지와 새끼손가락이 안쪽으로 굽어있는 모습에서 묘한 율동감을 발견할 수 있다. 손가락만 보고 있어도 경쾌하고 동시에 심오하다. 손가락 뿐만이 아니다. 오른쪽 발의 발가락을 보면 잔뜩 힘을 주었는지 굴곡이 생겼다. 손가락의 굴곡이 섬세하고 부드럽다면 발가락의 굴곡은 어딘지 힘이 있어 보인다. 이 대비가 재미있게 다가온다. 치맛자락은 매우 얇아 몸의 굴곡이 다 드러났고 옷자락은 윤곽이 뚜렷하면서도 부드럽고 자연스럽다.

국보 83호 미륵보살은 단순하지만 경쾌하고 생동감 넘친다. 표현 곳곳에 강약과 완급의 조화가 잘 담겨 있다. 편안한 듯 하지만 그 안에 종교적 엄숙미가 절묘하게 구현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세속적인 궁금증이 하나 떠오른다. 이들 국보는 과연 얼마나 할까 하는 궁금증이다. 이들 국보는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얼마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간접적으로 그 가격을 추론해볼 수는 있다. 바로 보험가를 알아보는 일이다.

국보 83호 금동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1996년 미국 아틀랜타 올림픽 문화교류전에 출품할 당시 5000만 달러의 보험에 가입한 바 있다. 그 때의 환율로 계산해보면 약 400억 원. 2013년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특별전에 출품할 때는 보험가를 약 500억 원으로 평가했다.  국보 78호의 경우, 1998년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한국실 개관기념 특별전에 출품할 때 300억 원짜리 보험에 가입했었다. 우리나라 최고의 문화재답게 보험가도 엄청난 셈이다.




● 언제 어디서 만들었을까

그렇게 뛰어나고 아름다운 불상이지만 아쉽게도 어느 시대에 제작되었는지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고구려 백제 신라…, 전문 연구자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고구려 백제 신라라고 하면 일단 삼국시대에 만들어졌다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통일신라라는 새로운 견해가 추가되기도 했다. 

국적이 베일에 가려있게 된 것은 기본적으로 출토지 또는 전래 경위가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먼저 국보 78호 반가사유상(높이 83.2㎝)을 보자. 국보 78호는 1912년에 일본인이 입수해 조선총독부의 데라우치(寺內) 총독에 기증하면서 그 존재가 알려졌다. 이어 1916년 총독부박물관으로 옮겨 놓았고,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경북 안동 지역에서 발견되었다는 얘기가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그러니 국적에 대한 의견도 다양하다.

첫째, 신라설. “신라 불교의 초기 보급지역인 경북 북부의 안동 영주 봉화 지역을 배경으로 전해온 것 같다.”

둘째, 고구려설. “백제 신라라는 여러 설이 있지만 신체와 천의의 힘찬 기세, 중국의 북위(北魏) 등지의 불상 양식이 나타나는데 고구려에서 이러한 양식의 불상이 크게 유행했던 점, 고구려 고분 벽화의 사신도 양식과 흡사해 고구려 불로 생각한다.”

셋째, 백제설. 천의가 몸 뒤에서 U자 형으로 되어 있고 일월(日月)관식 즉 해와 달 모양의 관 장식에서 백제 요소가 발견되기도 한다는 견해다.

이처럼 국보 78호 반가사유상의 제작국으로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세 나라가 모두 거론되어 왔다. 이 얘기는 고구려인지 신라인지 백제인지 그 국적을 규명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삼국시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좀더 구체적인 제작 시대를 알아보면 6세기 후반. 전체적으로 균형 잡힌 자세, 아름다운 옷 주름, 명상에 잠긴 깊고 그윽한 얼굴 표정 등으로 보아 한국적 보살상이 성숙기에 접어든 6세기 후반에 제작되었을 것이란 견해다. 이 정도의 명품이 나오려면 그 시대의 불교조각 문화가 수준급이어야 한다. 한국의 불교조각사를 살펴볼 때 6세기 중엽 이전엔 국보 78호 같은 걸작을 만들어내기 어려웠다는 말이다.

다음은 국보 83호 반가사유상. 이 반가사유상은 일제강점기 초기 일본인들이 경주에서 약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인들은 그 후 서울로 옮겨 놓았고 이것을 1912년 이왕가(李王家) 박물관이 구입했다.

국보 83호의 출토지에 대해선 여러 얘기가 전한다. 당시 이 불상을 사들인 이왕가 박물관의 일본인 관장이“경주에서 출토된 것으로 짐작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충청도라는 말도 있고, 경북 안동지방이라는 말도 있다.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의 문화재를 조사했던 일본의 세키노 타다시(關野貞)는 경북 경주의 신라 오릉(五陵) 근처에서 출토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경주시의 남산에서 나온 것이라는 얘기도 전해오는 등 그 주장이 분분하다. 물론 이같은 주장들은 모두 전언에 의한 것이지 구체적인 물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출토지가 확실하다고 해서 이 반가사유상의 국적이 곧바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불상의 특징이나 양식 등을 정밀하게 고찰해야 한다. 이같은 고찰 결과, 그 국적에 대해선 신라설, 백제설, 통일신라설 등이 있다.

첫째, 신라설. 현재까지는 신라에서 만들어졌다는 견해가 가장 많은 편이다. 경북 봉화 북지리 출토된 신라의 반가사유상(상체는 사라졌고 하체 부분만 남아있음)과 양식적으로 유사하기 때문에 신라 불상일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다. 그리고 경주 사람의 증언에 기초해 신라 불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경주 남산의 선방골, 즉 배리 삼존석불 근처에서 출토되었고 이곳에서 가까운 망월사 경내의 주지실(住持實)터라고 일컫는 곳에 잠시 봉안되었다는 증언이 있기 때문에 신라 것일 가능성이 크다.”

또한 신라 화랑제도와의 연관성에 주목하면서 신라설에 무게를 두는 견해도 있다. 반가사유상은 기본적으로 미륵불이다. 신라에서는 화랑들이 정치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면서 이들이 미륵의 화신化身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다. 신라가 고구려나 백제보다 반가사유상에 좀더 중시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이럴 경우, 국보 83호도 이같은 정치사회적 배경 속에서 만들어졌을 수 있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둘째, 백제설. 백제설은 기본적으로 삼국 가운데 국보 83호 같은 걸작을 만들 수 있는 나라는 백제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즉 6세기 후반~7세기 전반, 백제의 불교미술은 뛰어났고 신라는 별로 뛰어나지 못했다는 말이다.

“6세기 전후 사유상 형식의 복잡한 불상을 조각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6세기경 백제는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세련되고 아름다운 예술을 꽃피운 나라다. 그러나 6-7세기 신라 불상은 다소 서툴다. 따라서 국보 83호는 7세기 초반 백제에서 제작된 것이다.”

셋째, 통일신라설. 이 통일신라설은 ‘삼국시대(신라 또는 백제) 7세기 전반’이라는 기존의 이론을 뒤집는, 다소 파격적인 견해다.

“한국의 반가사유상 발전 과정에서 7세기 초반엔 이같이 진보된 반가상이 제작되었다고는 도저히 생각하기 어렵다. 국보 83호는 삼국 통일 후 백제의 장인들이 경주 조각계에 편입되면서 제작한 반가사유상이다. 즉 통일신라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같은 통일신라설도 기본적인 출발은 백제설과 궤를 같이 한다. 국보 83호 같은 걸작은 신라에서는 제작이 불가능했고 백제에서만 가능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의 삼산관(三山冠), 천의(天衣), 장식, 기타 신체 표현상의 특징 등을 살펴볼 때, 양식적으로는 백제 조각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며 시대적으로는 한국의 반가사유상 가운데 가장 늦은 시대 즉 통일신라에 해당한다는 견해다.

이제 간단하게 정리해 보자. 국보 78호는 고구려설, 백제설, 신라설로 나뉘어 있다. 국보 83호는 백제설, 신라설, 통일신라설로 나뉜다. 아직 무엇 하나를 두고 명쾌한 정답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아쉽지만, 영영 그 비밀을 밝혀내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영원한 비밀이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이들 반가사유상에 매달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 국보 83호와 일본 고류지반가사유상

2005년 10월 서울 용산에 국립중앙박물관이 새로 문을 열었을 때,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의 영문 설명문을 놓고 논란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논란을 초래한 대목은 ‘This statue has remarkable similarities with a wooden statue at the Koryuji in Kyoto, Japan’이었다. 이 문장을 해석하면 ‘이 불상은 일본 교토에 있는 고류지(廣隆寺) 목조 반가사유상과 놀랍도록 흡사하다’란 뜻이다.

이를 놓고 일부 관람객이 “한국의 불상이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외국인들이 오해할 수 있다”면서 중앙박물관 측에 정정을 요구했다. “고류지 목조 반가사유상은 한국에서 만든 것인데 이렇게 설명을 해 놓는 건 곤란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중앙박물관은 처음에 “객관적인 사실을 소개했을 뿐”이라고 해명했지만 그래도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고 판단해 영문 설명문을 수정했다.


일본의 국보인 고류지(廣隆寺)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


일본의 국보인 고류지(廣隆寺)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




사실 많은 사람들은 일본 고류지 반가사유상이 삼국시대 때 한국에서 넘어간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의 국보 83호 반가사유상과 거의 똑같기 때문이다. 그럼 고류지 반가사유상이 한국에서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들어보자.

그 첫번째 근거는 고류지 반가사유상의 재료가 한반도에는 많지만 일본에는 별로 없는 붉은 소나무, 즉 적송赤松이라는 점이다.

두 번째는 일본의 고대 역사서인 『일본서기(日本書紀)』 가운데 ‘스이코(推古) 31년(623년)’ 에 나오는 내용.‘신라의 사신이 불상과 금탑 등을 갖고 왔으며 그 가운데 불상은 하테데라(秦寺, 고류지의 다른 이름)에 안치했다’는 대목으로, 여기서 말하는 불상이 바로 고류지 반가사유상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근거만으로 고류지 반가사유상이 한반도에서 제작했다고 보기에는 다소 부족하다. 객관적인 물증으로 보기에는 부족하다는 말이다. 적송은 일본에도 있으며,『일본서기』에 나오는 그 불상이 지금의 고류지 반가사유상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6,7세기 한국과 일본의 불상 제작 기법 및 수준이나 문화 교류 양상으로 보아 일본이 독자적으로 반가사유상을 만들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일본의 반가사유상은 어떤 식으로든지 우리 나라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한국과 일본 전문가 대부분의 견해다. 결국 우리의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을 모방해 고류지 반가사유상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볼 수 있다.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일본의 고류지 반사유상을 두고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가장 철학적인 예술품”이라고 칭송한 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야스퍼스는 우리의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을 보지 못하고 한 말이다. 국보 83호가 고류지 반가사유상에 지대한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전세계 불교미술 전문가들이 모두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칼 야스퍼스의 찬사는 고스란히 우리 83호 반가사유상의 몫이다.




● 그윽한 깨달음의 미소

두 불상에서 눈여겨 볼 것 가운데 하나가 얼굴의 미소다. 그 미소는 기본적으로 깊이 사유하는 종교적 미소여서 그 한없는 깊이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국보 78호 반가사유상의 얼굴과 미소1 국보 78호 반가사유상의 얼굴과 미소1


국보 78호 반가사유상의 얼굴과 미소1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의 얼굴과 미소2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의 얼굴과 미소2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의 얼굴과 미소2


원만하고 결 고운 얼굴선을 타고 눈매와 입가로 번져가는 고요하고 그윽한 미소. 저 내면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리와 영생을 깨친 깨달음의 미소. 인간사의 번잡함을 초월한, 선악(善惡) 미추(美醜) 애증(愛憎)을 넘어선 영원의 미소. 종교적 철학적 사유의 미소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두 반가사유상의 미소는 찰나적이거나 즉흥적이지 않다. 여운은 길고 감동은 깊다. 슬픈가 하면 슬프지 않고, 미소 짓는가 하면 가볍거나 경박하지 않다. 거기 진한 고뇌가 있다. 따라서 기쁘다, 슬프다, 너그럽다 하는 인간사의 감성을 벗어나 있다.

누군가는 국보 78호의 미소가 국보 83호의 미소에 비해 더 깊고 그윽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구분은 불가능하다. 우열을 기릴 수가 없다. 가린다는 것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




이광표 프로필
출처:문화유산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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