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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신명호의 ‘조선왕조 스캔들’(20)] 갑신정변 주역들의 오판
글쓴이 tntv 등록일 [2019.12.21]

▎시모노세키항(港) 입구의 아카마 신궁. 조선통신사의 숙소였던 아미다지는 메이지유신 이후 아카마 신궁으로 이름을 바꿨다.

[신명호의 ‘조선왕조 스캔들’(20)] 갑신정변 주역들의 오판 

‘적군’을 믿었던 예견된 실패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
 
박영효·서광범·홍영식·유대치 등 지휘부, 자금부터 전략까지 전적으로 일본에 의지… 김옥균이 맹신한 고토 쇼지로는 일본 위해 조선 공격해야 한다는 ‘정한론(征韓論)’ 핵심세력

▎민영익 일행이 갑신정변 직전에 촬영한 사진. 기념앨범을 들고 있는 이가 서광범, 중앙에 학모를 쓴 소년이 박용하다. 이외에도 유길준·홍영식· 김옥균 등이 있다.
1881년 3월에 이동인이 암살되자 박영효·김옥균·서광범·민영익 등이 개화정책의 전면에 나섰다. 그들은 1882년 7월에 함께 수신사 자격으로 일본에 갔다. 겉으로는 임오군란의 사후처리 및 일본의 실상 파악을 위해서였지만 내막은 이동인이 추진하던 정책 즉 일본정부의 도움으로 차관과 무기를 도입하려는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근대화된 일본을 둘러보면서 그들은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박영효는 “나의 일평생을 지배하는 기본 관념은 바로 이때 받은 충동으로 나온 것이니 훗날 개혁의 헛된 희생만 되고 만 것도 이 충동으로 인해 빚어진 일이요, 500년 종사에 천고의 유한을 품게 했음도 모두 이때 뿌린 씨로서이다”라고 회상했다.

1882년 한성판윤으로 개혁정책 추진, 1883년 광수유수로 수어청 병력 양성 그리고 1884년의 갑신정변 참여와 일본 망명, 1894년의 귀국과 개혁추진, 제2차 망명 등 박영효의 인생을 대표하는 굵직한 사건들은 이때의 충격으로 빚어졌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1882년 박영효·김옥균 등의 일본 방문은 이동인의 구상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긴 했지만 결과는 크게 달랐다. 처음에 박영효와 김옥균 등은 이동인과 마찬가지로 일본정부로부터 차관과 무기를 도입하고자 했다. 하지만 일본정부는 고종의 위임장을 받아 오라는 등 까다롭게 굴었다. 막후 실무를 담당했던 김옥균은 일본의 재야학자로 영향력이 큰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후쿠자와는 유력한 재야 정치인 고토 쇼지로(後藤象次郞)를 소개했다.

김옥균은 고토를 만난 후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 중에 “조선이 독립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정치와 외교를 자수자강(自修自强)한 다음의 일인데 지금 정부의 인물로는 절대 자수자강할 수 없으므로, 왕권을 위태롭게 하고 권세를 탐하며 구차하게 세월만 보내는 무리들을 한 번 싹 쓸어버려야 한다”는 언급이 있다.

김옥균은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가장 시급한 일은 민태호로 대표되는 보수파 일소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 방법에 대해서는 “두 가지 대책이 있는데 첫째는 국왕의 밀칙(密勅)을 받아 평화적으로 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국왕의 밀의(密意)에 의뢰하여 힘으로 하는 것이다. 만약 평화적으로 한다면 조선인을 모두 쓸 수 있지만 무력을 써야 한다면 형세상 어쩔 수 없이 일본인을 고용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내용에서 당시 김옥균은 보수파 일소의 방법으로 평화적인 방법과 폭력적인 방법 두 가지를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두 얼굴’ 중 한쪽밖에 보지 못했던 김옥균


▎서울 종로구 견지동에 남아 있는 우정국. 1884년 12월 4일 김옥균·박영효 등 개화파에 의해 일어난 갑신정변의 시발지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김옥균이 고토를 만난 이후 조선개혁의 후원자로 일본의 정부가 아닌 일본의 민간을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편지 내용 중 “각하가 지금은 비록 정부의 관직을 맡고 있지 않지만, 내일이나 모레라도 뜻하지 않게 관직을 맡을지 알 수 없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지금 나와 맹약한 것은 곧 허공(虛空)”이라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 내용으로 본다면 김옥균은 고토와 맹약을 맺었고, 그 내용은 일본의 민간을 대표하는 고토로부터 도움을 받아 조선독립을 추구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김옥균은 왜 고토를 조선독립의 후원자로 선택했을까?

그것은 당시 일본의 정치현실에 대한 판단에서 나왔을 듯하다. 1881년 10월 메이지(明治) 천황은 앞으로 10년 후 즉 1890년에 국회를 개설하겠다는 명령을 내렸고, 이 명령에 따라 민간에서는 국회 개설에 대비한 정당운동이 활발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정당은 고토가 주도하는 자유당이었다. 이 자유당의 맹약 1조는 ‘우리 당은 우리 일본 인민의 자유를 확충하고 권리를 신장·보존하고자 하는 자들이 서로 모여 조직했다’는 내용인데 이는 당시 동북아 전체에서도 가장 선진적인 내용이었다.

이처럼 선진적인 정치운동을 주도하는 고토라면 진정으로 조선독립을 후원할 것이라는 믿음이 김옥균에게 생겼을 것이다. 고토에게 보낸 편지에는 “각하와 내가 결합한 의기(義氣)는 즉 공생공사(共生共死) 4글자뿐입니다”라는 내용도 있는데 이는 김옥균과 고토가 생사를 초월한 의기로 맹약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정도로 김옥균이 고토를 신뢰했음도 보여준다.

하지만 고토가 주도하는 자유당의 뿌리는 정한론(征韓論)에 있었다. 1873년 조선이 일본의 국서를 접수하지 않음을 빌미로 일본의 국위선양을 위해 조선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이론이 정한론이었다. 이런 점에서 1882년 당시의 자유당은 동북아 최고의 민주주의 정당임과 동시에 일본 최고의 극우 정당이라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자유당을 주도하는 고토 역시 두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김옥균은 근대민주주의 정치가라는 하나의 얼굴만을 보고 고토에게 의뢰하고자 했을 것이다.

더구나 김옥균이 구상한 평화적인 방법과 폭력적인 방법 중에서 폭력적인 방법은 거의 전적으로 고용 일본인에게 의뢰해야 하므로 이것이 진정 조선독립에 합당한 방법인지 의문이 있을 수 있었다. 그것은 고토에게 보낸 편지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자기 나라의 일을 개혁하고자 하면서 왜 다른 나라 사람을 쓴단 말인가? 했는데 이것은 내가 설명할 수 있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조선의 벌래 같은 인물(朝鮮蠢蠕之物)들과는 진실로 더불어 대사를 도모할 수 없기 때문”이란 언급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김옥균을 만난 고토는 “만약의 사태가 발생하면 100만 엔의 군자금과 동지를 모은 뒤 조선으로 건너가 일거에 잡배들을 물리치고 조선을 태산과 같이 안전한 반석 위에 올려놓겠다”고 큰소리쳤다. 그러면서 고토는 조선이 안전한 반석 위에 올라서기 위해서는 자신이 조선의 고문(顧問)이 돼야 한다고 요구했다. 김옥균이 귀국해 뭔가 일을 일으키면 그것을 핑계로 고토가 자금과 무력을 가지고 조선에 와서 고문이 되겠다는 것인데 이는 사실상 전권을 달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김옥균은 고토에게 보낸 편지 말미에서 “옥균은 장차 대군주의 밀칙을 받아 각하에게 주겠다”고 했는데 이로 보면 김옥균은 고토를 고문으로 초빙하는 문제에 긍정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김옥균이 만약의 사태를 일으키고, 뒤이어 고토가 100만 엔의 군자금과 동지들을 가지고 조선에 와서 고문이 되면 사실상 그 후의 주도권은 고토가 장악할 것이 명약관화했다. 이를 모를리 없는 김옥균이었지만 고토의 선의를 깊이 믿었기에 밀약했을 것으로 보인다.

1882년 11월 박영효는 김옥균에 앞서 귀국했다. 한 달 후 한성판윤에 임명된 박영효는 박문국을 설치해 한국 사상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를 발간했고, 치도국을 설치해 도로정비에 힘썼는데 이는 김옥균이 구상한 개혁 중 평화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박영효의 평화적인 개혁은 오래가지 못했다. 박영효는 도로정비에 따른 민가철거 문제로 민원이 발생해 3월에 한성판윤에서 쫓겨나 광주(廣州) 유수로 좌천됐다.

실망한 박영효는 다른 대안을 구상했다. 바로 무력정변이었다. 박영효가 한성판윤에서 밀려나던 즈음 김옥균이 귀국했다. 그 당시 김옥균은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고종의 국채 위임장만 가져오면 300만 엔의 차관을 제공하겠다는 언질을 일본 고위관료들로부터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재야 정치인 고토와 밀약이 돼 있었기 때문이다.

좌천된 후 ‘대안’으로 무력정변 구상한 박영효


▎김옥균은 개화당을 조직해 양반 신분제도와 문벌의 폐지 등 개혁정책을 주창하면서 청나라·국내 수구파와 대립했다.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했으며 상하이에서 자객 홍종우에 의해 암살됐다. 왼쪽은 한국비림박물관에 입비된 김옥균의 필적.
그 당시 조선정부의 1년 예산이 150만 엔 정도였으므로, 300만 엔은 2년 예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일본 정부로부터 300만 엔의 차관을 받든지 아니면 고토로부터 100만 엔의 차관을 받든지 어느 쪽이든 성공 가능성이 높았다. 이 가능성을 믿고 김옥균은 고종의 국채 위임장을 받아 다시 일본으로 갔다. 그때가 1883년 5월이었다. 박영효는 바로 이 자금을 이용해 광주에서 쿠데타군을 기르고자 했다. 이와 관련해 박영효는 다음과 같은 회상을 남겼다.

“나는 다행히 광주 유수가 수어사를 겸직하므로 병권을 가진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후일의 계책을 위해 군사를 양성할 터이니, 김옥균은 모집된 채권 중에서 몇 만금을 군자금으로 밀송해주기로 단단히 서로 약속하고 나는 광주 유수로, 김옥균은 일본으로 각기 헤어졌다. 기다리는 군자금은 아니 오고 곤궁한 중에 겨우 1000여 명의 병사를 교련하니 당시 일본 사관학교 출신인 신석모와 나팔수 이은돌은 나의 수족과 같은 심복으로 일본식 교련에 진력하던, 잊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렁저렁 1년이 지나매 광주 유수의 정병 양성이 이상하게도 민씨 일파에게 위험하게 보여 민비의 말 한마디로 나는 곧 면직되고 내가 양성한 일본식 군병은 곧 경성으로 징발돼 전영(前營)과 후영(後營)에 속해 전영사(前營使) 한규직과 후영사(後營使) 윤태준의 영솔 하에 들어가고 말았다.”(박영효, <갑신정변> ‘신민’, 1926)

박영효가 유수로 임명된 광주에는 남한산성이 있었다. 인조반정 이후 청나라와의 대결구도가 강화되면서 남한산성은 한양의 배후 기지로 중요시됐다. 남한산성 주변의 병력을 중심으로 조선후기 5군영의 하나인 수어청이 설치됐고 광주 유수가 수어사를 겸임했다. 박영효는 바로 이 수어청의 병력을 쿠데타군으로 양성하려 했던 것이다.

심혈 기울여 양성한 병력, 민씨 척족 손아귀로


광복회 광주·전남지부가 ‘태극기 특별기획전’을 광주 광역시청에서 열고 미공개 사진을 대거 공개했다. 1885년 고종황제의 어가 행렬이 종로 거리를 지나는 모습.
박영효가 하필 1000명의 병력을 양성하려 한 이유는 쿠데타 성공을 위해서는 최소한 이 정도 병력이 필요였기 때문이다. 당시 한양의 주력군은 좌영 600명, 우영 600명 합해 1200명 정도였다. 박영효의 회고에 의하면 이 1200명 중에서 정복 군인은 400명에 불과하고 나머지 800명은 사복잡졸이었다. 이는 국가재정이 넉넉지 못해 400명만 정규 군인으로 채용하고 나머지는 비정규 군인으로 채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쿠데다가 성공하려면 한양의 1200명 병력을 제압할 수 있는 병력을 길러야 했다. 그러려면 최소한 1000명의 수는 돼야 하고 그것도 훈련과 장비 및 정신력에서 앞서야 했다. 이런 계산에서 박영효는 1000명의 정예병력을 양성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노력을 기울였다.

첫째, 일본에서 최신 군사교육을 받은 신석모와 이은돌에게 군사훈련을 맡겼다. 1881년 9월에 신석모는 일본육군 호산학교(戶山學校)에 입학했고, 이은돌은 일본육군 교련단(敎鍊團)에 입학해 군사교육을 받았다. 이들이 조선 사람으로서는 최초로 일본육군에서 정규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박영효는 일본에 갔을 때 조선의 빠른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유학생을 보내야 함을 절감했다. 그와 함께 조선 자체에서도 정예병력을 길러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박영효는 귀국할 때 신석모와 이은돌을 데리고 왔는데 광수 유수로 가면서 또다시 그들을 교관으로 데려갔던 것이다.

둘째, 수어청의 병력 중 상당수를 정규 병력으로 양성하고자 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당시 중앙정부의 병력 중에서 정규 병력은 400명 남짓 됐다. 이 병력의 전투력이 강할 리 없었다. 정부에서 중앙군을 이렇게 꾸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궁극적으로 부족한 국가재정 때문이었다. 돈이 없는데 무슨 수로 정규 병력을 늘린단 말인가?

이런 상황은 지방으로 가면 더하면 더했지 나을 리 없었다. 즉 광주 유수 박영효가 1000명의 정예 병력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이들을 정규 병력으로 전환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돈이 필요했다. 여기에 필요한 돈을 김옥균이 일본에서 밀송하겠다고 약속했기에 박영효는 그 약속을 믿고 대략 500명 정도의 정규 병력을 양성했다.

이는 정예병력 양성이라는 점에서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당시 살기 어려운 수많은 젊은이가 ‘입에 풀칠을 하고자’ 수어청 병력에 응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재정을 곤란하게 하는 주범이기도 했다. 아마도 한동안 박영효는 군사 훈련에 필요한 자금을 개인적으로 융통했을 듯하다. 물론 김옥균이 밀송하기로 한 몇만 금의 군자금을 믿고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 간 김옥균은 차관을 얻으려 동분서주했지만 연말이 되도록 소득이 없었다.

그 사이 박영효는 점점 더 곤경에 빠져들었다. 그의 회상에서 나타나듯 박영효는 목이 빠지게 군자금을 기다리면서 ‘곤궁한 중’에 1000명의 병사를 교련시켰다. 체면 때문에 ‘곤궁한 중’이라고 점잖게 표현했지만 실제는 돈 문제로 엄청난 시련을 겪었을 듯하다. 이런 상황에서 박영효는 김옥균에 대한 실망감도 커지고 신변에 대한 위기감도 커졌다. 결국 1883년 연말 박영효는 광주 유수에서 면직됐고 심혈을 기울여 양성한 1000병력은 민씨 척족(戚族)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변란 계획은 점차 구체화돼가는데…


▎일본 개화기 계몽사상가이자 교육가인 후쿠자와 유키치. 엔화 1만 엔 권에 그려져 있는 인물이다.
훗날 박영효는 김옥균의 단점으로 모략과 덕의가 부족함을 들면서 갑신정변이 실패한 원인으로 “조선 사람은 단결돼야 일을 하지 않소? 믿을 수 있어야 일을 하지 않소? 돈이 있어야 일을 하지 않소?”라는 말을 했다. 여기서 덕의가 부족하다는 것은 반드시 군자금을 밀송하겠다고 약속하고는 무책임하게도 1년 가까이 있다가 빈손으로 돌아온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 분명하다. 아울러 모략이 부족하다는 것은 그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군자금을 마련해 밀송했어야 한다는 의미다.

아마도 박영효는 그때 약속대로 군자금만 밀송됐다면 1000명의 정예 병력이 양성됐을 것이고, 그 병력이 있었다면 갑신정변이 그토록 허무하게 끝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회한에서 이런 말을 했을 듯하다.

광주 유수에서 면직된 후 박영효는 크게 절망해 미국으로 떠날 생각까지 했다. 아마도 김옥균에 대한 실망감 그리고 신변에 대한 불안감 등으로 그런 생각을 했을 듯하다. 하지만 주변 지인들과 일본 공사관의 만류로 미국 외유는 단념했다. 그러던 중 1883년 5월 26일에 김옥균이 귀국했다.

김옥균이 목도한 조선의 현실은 출국 때인 1년 전보다 더욱 참혹하게 변해 있었다. 무엇보다도 개화파 동지로 굳게 믿었던 민영익이 보수파의 수령이 돼 있었다. 그간 민영익은 개화파 사람들과 온갖 이야기를 나눈 터라 그들의 작전과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뿐만 아니라 광주 유수에서 좌천된 박영효는 실의의 나날을 보내며 암중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이런 현실을 일거에 뒤집을 수 있는 방법은 고토와 밀약한 ‘대사를 도모’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 대사란 무엇일까? 김옥균이 귀국하고 석 달쯤 지나 고토의 측근이자 후쿠자와 제자인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이 한양에 들어왔다. 그가 고토와 후쿠자와의 밀지를 김옥균에게 전하고 뭔가 일을 꾸몄을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이노우에의 일기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김옥균 씨는 근래 경성 북악산 중턱에 새로 별장을 지었다. 그 신축이 끝나자 한가위 보름달을 감상한다고 하면서 박영효·홍영식·서광범 세 사람과 나 그리고 유대치를 초대해서 연회를 열었다. 이 연회가 다가올 변란의 중요한 회합이 됐던 것으로 구체적 계획을 세워본 것은 이 회합이 사실상 처음이었다. 나는 북악의 회합이 끝나자마자 김옥균·박영효 두 사람의 부탁도 있었으므로 곧바로 선생(후쿠자와 유키치)께 보고했다.”[이노우에 가쿠고로, <정상각오랑자기연보(井上角五郞自記年譜)>]

이 글에 따르면 박영효·김옥균·서광범·홍영식·유대치 그리고 이노우에가 북악산의 김옥균 집에 모인 시점은 1884년 8월 15일이었다. 그 자리에서 다가올 변란의 구체적 계획이 세워졌다는 것인데 이로 미뤄보면 그 이전에 박영효·김옥균·서광범·홍영식·유대치 사이에 이와 관련된 논의와 합의가 있었음이 분명하며 이를 바탕으로 이노우에과 함께 변란의 구체적 계획을 세웠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8월 15일에 논의한 변란의 구체적 계획이란 무엇일까?

독립하겠다면서 외세에 의존했던 개화파의 말로


▎시모노세키항(港) 입구의 아카마 신궁. 조선통신사의 숙소였던 아미다지는 메이지유신 이후 아카마 신궁으로 이름을 바꿨다.
김옥균의 <갑신일록> 10월 1일 (양력 10월 31일) 기록에 의하면 이날 김옥균은 새로 부임한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를 만난 후 박영효·서광범·홍영식에게 그 사실을 전했다. 그때 홍영식이 “그렇다면 지난날 일본 사람을 고용하려던 계획 또한 있으나마나 하게 됐습니다”라고 언급했다. ‘일본 사람을 고용하려던 계획’에 대해 김옥균은 “우리들이 한번 거사하기로 한 뜻은 이미 전에 결정했다. 일본 용사 수십 명을 얻기 위해 지난달에 사람을 일본에 보낸 일이 있었기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는 주석을 붙였다. 이로 보면 박영효와 김옥균 등이 구상한 ‘대사’는 일본인 자객 수십 명을 불러들여 자신들의 정적을 암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작전은 기왕의 작전 즉 남한산성의 병사 1000명을 훈련시켜 이 무력을 기반으로 쿠데타를 일으키려던 작전보다 훨씬 외세 의존적이었다. 기왕의 작전은 일본에서 오직 군자금만 빌려 쓰는 것이었지만, 나중의 작전은 군자금은 물론 자객 그리고 고문까지 모두 빌려 쓰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개혁의 주도권을 일본에 넘겨야 할 것 역시 예상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번의 거사에서 일본에 대한 의존을 조금이라도 줄이려면 조선 자체에서 자객들을 모집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생각에서 박영효는 조선 출신의 자객들을 포섭하기 시작했다. 포섭 대상은 아무래도 믿을 만한 측근부터 시작될 수 밖에 없었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후 체포된 일본 유학 사관생도 출신인 신중모의 진술에 의하면 그는 박영효의 명령에 따라 9월부터 이인종·이규완·최은동·윤경순·고영석 등과 어울렸다고 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박영효 또는 김옥균의 최측근이자 무술로 이름난 사람들이었다. 예컨대 이인종은 박영효의 가인(家人)이었고, 이규완은 박영효의 겸종(傔從)으로 둘 다 최측근이었다. 고영석은 김옥균의 상노(床奴)였다.

박영효는 이들을 매개로 힘이 세고 무술이 뛰어난 장사들을 측근으로 끌어들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윤경순과 윤계완 형제였다. 이규완의 회상에 의하면 윤경순은 특히 날래고 용맹해 달아나는 개를 쫓아가서 한 번 걷어차면 그 개가 공중으로 수십 장을 올라가고 또 그 개가 내려올 즈음에 한 번 다시 차면 그 개가 아무 소리도 못하고 거꾸러져 죽었다고 한다.

이규완 역시 태껸의 명인으로 유명했다. 이렇게 박영효에게 포섭된 장사는 이규완을 비롯해 윤경순·윤계완 형제 그리고 최은동·황용택 등 30명 정도 됐다. 박영효는 이들을 이용해 정적을 암살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계획 역시 1884년 9월 30일(양력 10월 30일)에 일본 공사 다케조에가 부임하면서 일본 공사관에 의존하는 것으로 갑자기 바뀌었다.

돌아보면 박영효와 김옥균이 무력정변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몇 번의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일본에 더 의존하게 됐다. 처음에는 군자금만 의존하려 했지만 다음에는 군자금과 동지 그리고 고문까지 의존하려 했고 마지막은 아예 일본 공사관에 의존하려 했다. 처음 시작은 조선의 독립과 자주를 위한 독립심이었으나 그것이 갈수록 일본에 의존하는 의타심(依他心)으로 변질됐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대학연의>에는 ‘조존성찰지공(操存省察之功)’이라는 항목이 있다. 언제 어디서나 조심해서 초심을 잃지 말아야 공을 이룰 수 있다는 이 말은 대사를 앞둔 많은 사람에게 예나 지금이나 귀감이라 할 만하다.

신명호 - 강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원문보기

http://jmagazine.joins.com/monthly/view/312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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