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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신명호의 ‘조선왕조 스캔들’(18)] 조카(인조)의 왕권에 도전한 삼촌(흥안군)
글쓴이 tntv 등록일 [2019.12.07]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거처하던 충남 공주시 공산성(公山城)의 영은사.




[신명호의 ‘조선왕조 스캔들’(18)] 조카(인조)의 왕권에 도전한 삼촌(흥안군)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
 
인조반정 성공 후 모든 결실 능양군파가 독점하면서 명분파의 불만 폭발해… ‘이괄의 난’으로 알려진 역모사건의 본질은 반정주역들 간의 ‘후계왕’ 다툼

▎광해군 때 건축된 궁궐로 조선 후기 정치활동의 주무대였으나 일제 강점기 때 헐렸다가 복원된 경희궁. 사적 271호로 서울 종로구 신문로 2가에 위치해 있다.
조선왕조는 임진왜란 이후에도 300년 이상 ‘생존’했다. 이 기간 중 수많은 정변이 일어났지만 그중 압권은 단연 인조반정이었다. 1623년(광해군 15) 3월 12일 한밤중에 거사해 성공한 반정세력은 1910년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300년 가까이 국가권력을 장악했다.

그뿐만 아니라 주자절대주의(朱子絶對主義)를 내세운 이들의 이념과 노선이 조선후기의 국가이념과 국가노선을 강력하게 규제했다는 점에서 인조반정의 역사적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인조반정에 참여할 주역들이 확정된 시점은 거사 한 달 전인 1623년 2월이었다. 그런데 반정 주역들은 광해군을 타도한다는 점에는 합의했지만 다른 점에는 그러지 못했다. 가장 큰 이견은 다음 왕으로 누구를 추대하는가의 문제였다. 이 문제를 놓고 반정 주역들은 명분파와 능양군파로 나뉘었다. 양쪽 모두에 일장일단이 있었다. 우선 명분파는 광해군을 타도한 뒤 후계왕은 유교명분에 따라 광해군과 같은 항렬(行列), 즉 선조의 아들들 중에서 추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명분에서 앞서는 주장이었다.

생전의 선조에게는 왕비소생의 대군 1명과 후궁소생의 왕자군 13명 등 총 14명의 아들이 있었다. 이들 중에서 1623년 2월 당시까지의 생존자는 광해군을 위시해 왕자군(群) 7명 등 총 8명이었다. 생존한 왕자군 7명 중에서는 36세의 인성군이 최고 연장자였다. 따라서 광해군을 축출한다면 왕자군 7명 중에서 최고연장자인 인성군을 추대하든가 아니면 그 아래에서 추대해야 한다는 것이 명분파의 주장이었다.

문제는 아직 인성군의 내락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반정 주역들이 합의만 한다면 아무런 문제없다는 것이 명분파의 입장이었다. 이 같은 명분파의 대표자는 이괄과 김원량이었다.

반면 능양군파는 이미 능양군이 반정에 적극 개입하고 있는 현실을 인정해 능양군을 추대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1623년 당시 29세의 능양군은 거금의 재산을 풀어 거사자금에 충당했으며, 주요 반정 참여자들을 만나 결속을 다지고 있었다.

능양군에게 ‘대권’ 기울면서 생긴 불행의 싹


▎사극 <화정>에서 광해군. 광해군은 임진왜란 당시 세자에 책봉됐으나 영창대군의 탄생으로 자리를 위협받았고, 등극한 지 16년 만에 폐위됐다.
그러나 능양군은 선조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였기에 명분에서 크게 밀렸다. 능양군은 선조의 왕자군 13명 중에서 다섯째인 정원군의 큰아들이었다. 이런 능양군이 광해군 타도 후 왕이 된다면 수많은 문제점이 발생할 수 있었다. 우선 선조의 아들들, 즉 능양군의 삼촌이 되는 7명의 왕자군을 어떻게 할 것인지가 복잡했다. 능양군보다 항렬이 앞서는 이들이 불만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선조의 손자로서 능양군과 같은 항렬이 되는 사람도 수십 명이나 되는데 이들은 또 어떻게 할 것인지도 쉽지 않았다.

이런 복잡한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최고 연장자인 인성군을 추대하는 것이 편리하다는 것이 명분파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능양군파는 아직 인성군과 접촉이 없지만 능양군은 적극 개입하고 있는 현실을 들어 반대했다. 이 같은 능양군파의 대표자는 김류·이귀·신경진·김자점·최명길 등이었다.

이에 따라 거사 이전부터 명분파와 능양군파는 첨예하게 대립했다. 인조반정이 성공하고 2년째 되던 해, 이귀는 반정 전에 명분파와 능양군파가 어떻게 대립했는지를 회고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이귀가 말하기를 “광해군을 몰아내기로 결의했던 처음부터 이괄과 김원량은 인성군에게 뜻을 뒀습니다. 반정하기 직전에 우리들이 최명길의 집에 모여 회의했는데 김원량은 반드시 이괄을 대장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때 이흥립이 회의 자리에 와서 김원량에게 말하기를 ‘나가서 능양군을 한 번 만나보시라’ 했습니다. 그러자 김원량은 발끈하며 얼굴색이 변했습니다. 이에 김류가 또 권유하기를 ‘가서 능양군을 한 번 만나보시라’ 했더니, 김원량은 또 발끈하며 안색이 변했습니다. 반정하던 당일에 김류가 무슨 일로 늦게 도착했는데 그때 이괄이 이미 대장이 돼 김류를 죽이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김원량 또한 그날 거사하는 자리에 가지 않았습니다. 이로 본다면 이괄과 김원량이 인성군에게 뜻을 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했다.[<인조실록> 2년(1624) 12월 6일]

1623년 당시 반정주역들 중 최고령자는 67세의 이귀였다. 따라서 나이 순으로 하면 반정 대장은 이귀가 맡아야 했다. 하지만 이귀는 “이러한 때 대장은 나 같은 늙은이는 할 수 없소. 영공(令公, 김류)은 본래 대장 물망이 있어 병사들을 제압할 수 있으니 영공이 대장을 하는 것이 좋겠소”라며 김류에게 양보했다. 김류가 대장을 맡으면 왕으로 추대되는 사람은 자연히 능양군이었다.

그래서 김원량은 김류를 대장으로 추천하는 것에 강력히 반대했던 것이다. 그 대신 김원량은 이괄을 대장으로 추천했다. 그래야 반정이 성공한 이후 인성군을 추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정주역들 중 대다수는 능양군을 지지했다.

이 결과 반정 대장은 이괄 대신 김류로 결정됐다. 거사 일은 1623년 3월 12일 밤 2경으로 잡혔다. 이 시각에 홍제원에 집결했다가 일시에 궁궐로 쳐들어가 광해군을 잡은 후 능양군을 후계 왕으로 추대하기로 했던 것이다.

이괄은 아들 이전 그리고 군관 20여 명과 함께 약속된 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홍제원에 도착했다. 뒤이어 능양군·이귀·김자점 등도 각각 수백 명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왔다. 하지만 대장으로 추대된 김류는 약속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나타나지 않았고 주력군이 되기로 한 장단부사 이서의 병력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장유가 와서 알리기를 반정 사실이 노출돼 고발됐다고 했다. 반정군은 크게 동요했다. 누구보다 능양군이 불안해했다.

능양군은 그곳에 명분파의 대표자인 김원량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 무엇보다도 미심쩍었다. 혹 인성군을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미려고 사라진 것이 아닌지 의심했던 것이다. 만약 김원량이 반정 주력군인 장단부사 이서와 결탁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초조해진 능양군은 장단부사 이서를 만나기 위해 연서역으로 달려갔고, 남은 사람들은 더욱 불안해졌다. 뒤에 남은 이귀는 상황을 안정시키기 위해 이괄을 대장으로 추천했다.

반정 성공 후 찬밥 신세로 전락한 명분파


▎실학자 서계(西溪) 박세당의 아버지 박정의 인조반정 공신교서.
그런데 그 시각에 김류는 집에 있었다. 홍제원으로 출발하기 직전에 김류는 반정 사실이 고발됐다는 소식을 듣고 자포자기했다. 김류는 집에 머무르며 잡혀가기를 기다렸다. 바로 그때 심기원과 원두표가 달려와 말하기를 “이미 이렇게 된 판국에 왕의 체포 명령을 어찌 근심하며 의금부 도사를 어찌 두려워한단 말입니까?”라며 가자고 재촉했다. 생각이 바뀐 김류는 집을 나와 모화관으로 갔고, 그곳에서 전령을 홍제원에 보내 모두 자신이 있는 곳으로 집결하라 명령했다.

당연히 이괄이 크게 반발했다. 약속시간에 나타나지도 않은 김류는 대장 자격이 없었다. 그런 그가 느닷없이 전령을 보내 대장 행세를 하는 것이 이괄에게는 참을 수 없었다. 이괄은 김류를 목 베어 기강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귀는 이런 이괄을 달래고 달래 모화관으로 가서 합류하게 했다. 다시 대장은 김류 차지였다.

이날 반정은 성공했지만 이괄은 분노를 삭일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이괄은 “내가 남에게 속아서 이 일을 일으켰다”라며 눈물까지 흘렸다. 그날 이후 이괄과 김류의 갈등은 격화되기만 했다. 그것은 크게 보면 명분파와 능양군파의 갈등이기도 했다.

이들 사이의 갈등은 반정 이후의 결실을 능양군파가 독점하면서 더욱 격화됐다. 병조판서를 위시해 고위관직은 모조리 능양군파가 독식했던 것이다. 당연히 명분파의 불만이 고조됐다. 특이 이괄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인조반정 이후 이괄 이상으로 불만을 품은 사람은 흥안군이라는 왕자였다. 흥안군은 선조의 후궁인 온빈 한씨의 장남으로 이름은 제(瑅)였다. 나이는 20대 후반으로 능양군과 비슷했다. 그래서 능양군에 대한 경쟁의식이 더욱 강했다.

흥안군은 조카뻘인 능양군이 제멋대로 왕이 된 것이 못내 불만이었다. 명분으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자기가 능양군보다 뒤질 것이 없었다. 흥안군은 대략 2000명 정도의 군사를 동원한 인조반정이 성공한 것에 고무됐다.

이 정도 군사는 몇몇 실력자만 포섭하면 충분히 동원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흥안군은 마치 능양군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재산을 풀어가며 무사들과 결탁하기 시작했다. 자연히 흥안군 주변으로 불평·불만세력이 몰려들었다. 그렇게 모인 대표자는 윤인발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서자였으며 이괄의 아들인 이전과 친구였다. 양반체제에 불만이 많던 윤인발은 인조반정에도 불만이 많았다. 예컨대 윤인발은 “지금 주상은 여러 왕자 중 연장자도 아니면서 스스로 왕이 됐다”고 비판했다. 이런 비판으로 본다면 윤인발은 근본적으로 김원량·이괄 같은 명분파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처음에 윤인발은 인성군에게 접근했다. 하지만 인성군은 명확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가만히 있다가 성공하면 왕이 되고 실패하면 모른 체하겠다는 심산이었다. 이런 인성군에게 실망한 윤인발은 흥안군에게 접근했다. “지금 주상은 여러 왕자 중 연장자도 아니면서 스스로 왕이 됐다”는 윤인발의 비판은 바로 흥안군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 흥안군은 인성군과 달리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영변으로 좌천된 이괄의 분노


▎서울 은평구 역촌동에 있는 인조 별서 유기비(別墅 遺基碑) 비각. 인조가 반정 전에 살았던 곳을 기념해 세웠다.
인조반정은 조선후기 최대의 정변답게 수많은 피해자들을 양산했다. 반정 이후 사형된 사람이 80여 명이었고, 귀양 간 사람이 250여 명, 파직된 사람이 100여 명이었다. 이들을 합하면 440여 명이었다. 이들은 광해군 시대 15년을 떠받들던 실력자들이었다. 이들이 일시에 숙청되면서 그 공백을 반정세력들이 메웠다. 이는 반정세력들에게는 크나큰 기회였지만 숙청당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친인척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피해이자 원한이었다.

흥안군과 윤인발은 이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으로 포섭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은 반정주역들에게 낱낱이 밀고 되고 있었다. 반정 주역들은 의심스런 사람들에게 첩자를 접근시켜 정보를 빼내곤 했다. 이렇게 비밀 첩자를 운용한 대표인물은 이귀와 김원량이었다. 이귀를 위해 충성한 대표적인 첩자는 최홍성이라는 사람이었고 김원량에게 충성한 대표적인 첩자는 성철이라는 사람이었다.

1623년 7월쯤 이귀는 최홍성을 통해 흥안군이 무사들과 결탁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귀는 인조에게 “흥안군 이제에게는 해괴한 일이 많습니다. 주상께서 항상 편전에 자주 불러 엄하게 경계를 내리셔야 합니다. 그래야 흥안군이 흉악한 일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할 수 있고 또 친친(親親)의 도리에도 어긋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충고했다.

이런 충고로 본다면 반정 성공 이후 인조는 흥안군을 비롯한 삼촌들을 거의 만나지 않았다. 사실 그러기에는 인조 스스로 매우 민망한 일이었다. 스스로 나서서 왕이 된 인조가 삼촌들을 만나 무슨 말을 하겠는가? 기껏해야 의례적인 인사말이나 하는 수밖에 더 있겠는가? 그런 것이 불편한 인조는 아예 삼촌들을 만나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흥안군을 비롯한 삼촌들의 불만이 누적되고 있었다. 그래서 이귀는 비록 불편하더라도 흥안군을 비롯한 삼촌들을 자주 만나 이야기도 하고 정도 쌓으라고 충고했던 것이다. 하지만 인조는 그런 충고를 무시했고 흥안군과 윤인발의 음모는 지속됐다.

8월 7일 이후 그들의 음모는 더욱 구체화됐다. 이날 이괄은 평안도의 부원수가 돼 영변으로 좌천됐다. 이괄이 영변으로 출발하던 날, 인조는 이괄을 달래기 위해 직접 모화관까지 전송했다.

하지만 이괄의 얼굴에는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 이에 신경진이 이괄의 손을 잡으면서 “영감이 이번에 가는 길은 우리들도 모두 한 번은 거쳐야 할 길이니 영감 다음에는 내가 대신 가겠소”라며 위로했다. 그러나 이괄은 “나를 내쫓아 보내는 것이니 영감은 나를 속이지 마시오”라며 화를 벌컥 냈다. 이렇게 불만이 극에 달한 이괄에게 1만5000여 정예 병력이 맡겨졌기에 이병력만 이용해도 인조를 축출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흥안군의 역모 반신반의했던 인조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거처하던 충남 공주시 공산성(公山城)의 영은사.
윤인발은 음모를 성공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런 와중에 음모가 너무 노출됐고 결국에는 10월 1일 이시언이 고변하기에 이르렀다. 그 내용은 흥안군을 위시해 윤인발·이괄·이전·황현·이유림 등이 역모를 도모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같은 역모 내용은 이미 첩자들을 통해 이귀와 김원량에게 전달된 상황이었다. 다만 이 정보를 놓고 이귀와 김원량은 다르게 반응했다. 결론적으로 이귀는 흥안군의 역모를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김원량은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괄과 이전에 대한 믿음이 강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괄을 반정에 참여시킨 사람은 김원량이었다. 김장생의 제자이자 정경세의 제자이기도 했던 김원량은 반정 당시 36세로 서인과 남인 모두에게 깊은 신망이 있었다. 그래서 반정 주역 사이에서도 김원량의 발언권이 매우 강했다.

그런데 김원량에게 이괄은 5촌 외숙이었다. 김원량이 뛰어난 학자로 이름나자 이괄은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 이전을 김원량에게 맡겼다. 그래서 김원량은 인조반정 10년 전부터 이전을 가르쳤다. 비록 김원량에게 이전은 혈연으로는 6촌 동생이었지만 학연으로는 사제지간이기도 했다. 이런 이전을 김원량은 누구보다 신임했다.

이전을 반정에 끌어들인 사람도 김원량이었고, 그 이전을 매개로 이괄을 가담시킨 사람도 김원량이었다. 그런 김원량에게 이괄과 이전이 역모를 꾸민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김원량은 다른 사람들이 역모를 꾸미면서 반정 세력들을 이간시키기 위해 이괄을 이용한다고 판단했다.

한편 인조 역시 흥안군이 역모를 꾸민다는 사실을 믿고 싶어하지 않았다. 인조반정을 일으킨 지 겨우 반년 만에 삼촌 흥안군이 역모를 꾸민 것이 사실이라면 인조 자신에게 치명적이었다.

인조반정의 명분은 광해군이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저버렸다는 것과 함께 어머니를 내쫓고 형제를 죽였다는 것이었다. 이런 패륜아 광해군을 처단하겠다는 기치로 인조반정을 일으켰는데 만약 흥안군이 역모를 꾸몄다면 그 흥안군을 죽여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나머지 삼촌 6명도 살려두기 어려웠다. 나아가 5촌 당숙들 그리고 4촌 형제들도 모조리 죽여야 할 판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인조 자신이 광해군과 다를 것이 없게 된다. 아니 더 흉악한 왕이라 비판받을 수 있다. 그래서 인조는 흥안군에 대한 조사도 못하게 했고 나아가 인성군 등에 대한 조사도 못하게 했다. 그렇지만 나머지 사람에 대한 조사는 계속됐다. 수사망이 좁혀오자 윤인발은 특단의 대책을 강구했다. 강도를 만나 살해당한 척했던 것이다. 얼마나 감쪽같았던지 가족들도 모두 윤인발이 죽은 줄 알고 장례까지 치렀다. 인조가 흥인군에 대한 조사를 금지하고, 김원량 역시 이괄의 역모를 믿지 않는 상황에서 윤인발까지 강도를 만나 살해됐다고 하자 고변은 흐지부지됐다.

그 사이 윤인발은 영변으로 내려가 이괄을 만났다. 뒤이어 이괄의 아들 이전은 1623년 12월에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린다는 핑계로 영변에 왔다. 기록에 의하면 이괄과 윤인발 사이에는 부자지간 같은 정의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윤인발은 이괄 그리고 이전과 늘 귓속말을 해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게 했다고도 한다. 이로 보면 이괄이 8월에 영변으로 간 후, 뒤이어 10월에 윤인발이 오고 또 12월에 이전이 왔고, 세 사람은 한통속이 돼 음모를 꾸몄다고 하겠다.

그런 그들에게 흥안군은 계속해서 편지와 선물 등을 보냈다. 예컨대 흥안군은 윤인발에게 밀서가 적힌 달빛 전복(戰服)을 보내기도 했다. 이런 편지와 선물을 이용해 한양의 흥안군과 영변의 윤인발은 1624년 1월을 거사일로 정하고 음모를 구체화했다. 결국 1624년 1월 21일 한밤중에 이괄은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승승장구하며 한양으로 쳐들어왔다.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자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이괄이 어떤 작전을 펼지 걱정이었다. 당시 예상되는 이괄의 작전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는 한양을 점령한 후 그 기세 그대로 인조를 추격해 생포하는 작전이었다. 이것이 가장 좋은 작전이었다. 반란의 성패는 뭐니뭐니해도 왕을 잡아야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이런 작전을 쓸까 걱정이었다.

둘째는 명나라 또는 청나라와 결탁하는 작전이었다. 이렇게 되면 이괄의 반란은 내전수준을 넘어 국제전으로 확대될 여지가 많았다. 이 또한 방어하는 입장에서 몹시 걱정되는 작전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마지막은 한양을 점령한 후 인조 대신 흥안군을 왕으로 추대하고 그대로 눌러앉는 작전이었다. 이는 얼핏 성공한 듯도 하지만 반란군 측에서 보면 후환이 남는 작전이었다. 반면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인조가 안전지대로 피신한 후 반격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기에 가장 좋은 작전이었다.

하루 만에 막 내린 ‘영화(榮華)’

위의 세 가지 작전 중에서 어떤 작전을 쓸지는 이괄에게 달렸다. 이괄은 마지막 셋째 작전을 썼다. 2월 8일 오전에 이괄의 군대는 한양 가까이 접근했다. 이에 놀란 인조는 8일 오후에 부랴부랴 피란길에 올랐다. 그때 흥안군은 인조를 따라 피난하는 척하다가 이괄에게로 갔다.

9일 오전쯤 이괄과 만난 흥안군은 약속대로 인조 대신에 국왕이 됐다. 그날 저녁 이괄은 한양에 군사를 보내 “도성 안의 사람들은 놀라 동요하지 말라 새 임금이 즉위했다”고 선포했다. 그 다음날 이괄이 한양에 입성할 때 관청의 서리들은 의관을 갖추고 영접했으며 백성들은 길을 닦고 황토를 깔아 영접했다. 이괄은 경복궁에 주둔했고, 흥안군이 국왕으로서 조정 관료들을 임명했다.

그러나 이런 영화는 이날 하루뿐이었다. 다음날 이괄은 서대문 밖의 관군과 싸우다 패배했다. 그날 밤 한양을 탈출했던 이괄은 13일 저녁 이천에서 부하들에게 암살당했다. 흥안군 역시 한양을 탈출했다가 16일에 체포돼 돈화문 앞에서 사형 당했다.

이괄의 난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깊이 보면 반정주역들 간의 후계왕 다툼이 원인이었다. 그 다툼은 사실 인조의 정치력에 따라 미연에 수습될 수도 있었다. 후계왕 다툼은 결국 선조의 후손들이 관련된 문제이고, 그것은 인조의 입장에서는 집안사람들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대학연의> ‘제왕위치지서(帝王爲治之序)’에서는 “친친(親親)을 강조한다. 친인척을 친인척으로 친히 하는 것이 ‘친친’이다. 친인척을 친인척으로 친히 하지 않을 때 그들은 분개하고 거꾸로 친인척 이상으로 친히 하면 그들은 교만방자해진다. 이런 당연한 도리를 아는 것이 좋은 지도자의 기본 덕목이라 할 것이다.

신명호 - 강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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