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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의상대사와 당나라 소녀의 애절한 전설이 깃든 부석사 무량수전
글쓴이 tntv 등록일 [2019.11.02]

무량수전 소조불상(국보 제 45호). 이 불상은 정면이 아닌 오른쪽을 향해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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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수전 소조불상(국보 제 45호). 이 불상은 정면이 아닌 오른쪽을 향해 놓여있다.

의상대사와 당나라 소녀의 애절한 전설이 깃든 부석사 무량수


  • 배한철
국보 제18호 부석사 무량수전을 창건한 의상대사 진영. 1206년 고잔지를 창건한 일본 승려 묘에는 의상과 원효를 흠모해 그들의 구도행을 글과 그림을 묘사한 화엄종조사회전을 조성했다. 이 절에는 의상과 원효의 진영도 모셔져 있다. 15세기 추정. 일본 고잔지 소장
▲ 국보 제18호 부석사 무량수전을 창건한 의상대사 진영. 1206년 고잔지를 창건한 일본 승려 묘에는 의상과 원효를 흠모해 그들의 구도행을 글과 그림을 묘사한 화엄종조사회전을 조성했다. 이 절에는 의상과 원효의 진영도 모셔져 있다. 15세기 추정. 일본 고잔지 소장
[국보의 자취-10] 한국 불교사상의 큰 줄기를 형성한 화엄(華嚴)종은 '삼라만상은 일체가 되어 융합하므로 번뇌가 곧 깨닭음이요, 생사가 곧 열반'이라고 가르친다. 화엄사상은 신라 의상대사(625~702)가 중국에서 처음 들여왔다. 중국 송대의 승려인 찬녕(919∼1002)이 저술한 '송고승전'은 한국 화엄종의 시조인 의상 등 신라승려 9명의 전기를 싣고있다. 여기에 의상과 관련한 기이한 설화가 소개돼 있다.

이에 따르면, 당나라 유학을 떠난 의상은 산동성 등주의 어느 신도의 집에 잠시 머무른다. 그런데 그 집의 딸 선묘(善妙)가 의상을 흠모한다. 그러나 이미 부처에게 몸과 마음을 바친 의상의 뜻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의상은 그녀와 이별하고 당나라 수도 장안 종남산의 지상사를 찾아 화엄종의 2조인 지엄(602~ 668)에게 7년간 화엄학을 배웠다. 그동안 선묘는 의상과의 재회를 고대하며 법복을 정성스럽게 지었다. 귀국 길에 의상은 선묘를 찾았으나 운명이 엇갈려 둘은 끝내 재회하지 못한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선묘가 의상에게 줄 법복을 들고 포구로 달려갔지만 야속하게도 배는 떠나고 없었다. 선묘는 "이 몸이 용이 되도록 해주소서. 그리하여 저 배를 따라가 지키고 저 나라에 가서 스님의 불법이 이루어지도록 돕게 해 주소서"라고 외치고는 바다에 투신한다.

신라에 무사히 도착한 의상은 이 땅에 화엄정신을 펼칠 도량터를 찾아 전국을 다녔다. 경북 영주의 태백산 기슭에 이르러 마땅한 장소를 발견했다. 하지만 이단의 무리들이 먼저 그 자리를 차지해 그의 불사를 훼방놓았다. 이때 용으로 변한 선묘가 거대한 바위를 공중으로 띄워 이교도들을 겁주어 쫓아냈다. 의상이 문무왕 16년(676) 그 자리에 절을 세우니 곧 부석사이다. 뜬바위, 즉 부석(浮石)이라는 사찰명은 이 선묘설화에서 유래한다. 지금도 바위는 부석사 본전인 무량수전 서쪽 암벽에 남아 있다. 의상은 부석사를 화엄종의 종찰로 삼고 그의 생전에만 10명의 고승대덕과 3000명의 문도를 배출했다.

의상은 원효와 함께 신라불교의 전성기를 연 인물이다. '삼국유사 의해편(의상전교)'에 의하면, 그는 성이 김씨('송고승전'은 박씨라고 기술)이고 29세에 황복사(경주시 구황동)에서 출가했다. 얼마 뒤 원효와 함께 구법을 위해 요동으로 가던 도중 고구려 병사에게 첩자로 잡혔다가 간신히 탈출했다. 650년 당나라 사신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갔다. 처음 양주(강소성 중부의 도시)에 도착해 그곳의 장수 유지인의 요청으로 관청에 머물렀다. 얼마 후 지장사를 찾아가 지엄을 만났다. 지엄은 전날 밤 해동의 큰 나무에서 가지와 잎이 퍼져 중국을 덮었고 그 가지 위의 봉황 둥지에서 여의주 빛이 먼 곳까지 비치는 꿈을 꿨다. 지엄은 "꿈은 그대가 올 징조였다"며 극진한 예로 의상을 맞아 제자로 받아들였다. 의상은 공부에 매진해 화엄경의 미묘한 뜻을 깊은 부분까지 깨달아 이내 스승을 능가한다. 그러는 사이 당 고종은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려 한다. 당나라에 갇혀 있던 승상 김흠순(김유신의 동생)이 의상에게 귀국을 권하니 670년 신라로 돌아와 조정에 이 사실을 알려 국난을 막았다. 의상은 태백산 부석사와 원주 비마라사, 가야산 해인사, 비슬산 옥천사, 금정산 범어사, 지리산 화엄사 등 열 곳의 사찰(화엄십찰)을 지어 교리를 전하게 했다. '삼국유사 탑상편(전후소장사리)'에 언급된 최치원의 '부석본비'는 생몰년 등이 구체적인데 "625년에 태어나 어린 나이에 출가했다. 650년에 원효와 당나라에 가려고 고구려까지 갔다가 되돌아왔고 661년에 당나라에 들어가 지엄에게 배웠다. 668년 지엄이 죽자 671년에 의상은 신라로 돌아와 702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78세였다"고 밝힌다.

의상대사를 사모했던 선묘녀의 상. 가마쿠라시대(1185~1333). 일본 고잔지 소장
▲ 의상대사를 사모했던 선묘녀의 상. 가마쿠라시대(1185~1333). 일본 고잔지 소장
의상과 선묘녀의 애틋한 전설이 깃든 부석사는 화엄종의 근본 도량으로 676년 창건된 이래 수차례 다시 지어지고 고쳐졌다. 법당인 무량수전(無量壽殿·서방 극락정토를 다스리는 부처를 모신 집)은 1016년(고려 현종 7) 중창됐으나 1358년(공민왕 7) 불타 1376년(우왕 2) 새로 건립했다. 의상의 사당인 조사당은 1377년 재건됐다. 일제강점기인 1916년에도 무량수전이 해체·수리 공사를 했다. 현재 무량수전은 고려말 우왕 때의 건물이다.

부석사 경내에는 귀중한 문화재가 널려 있다. 무량수전(국보 제18호), 소조여래좌상(국보 제45호), 무량수전 석등(국보 제17호), 조사당(국보 제19호), 조사당 벽화(국보 제46호) 등 국보만 5점이다.

한국 건축물의 백미로 불리는 무량수전.
▲ 한국 건축물의 백미로 불리는 무량수전.
이 중 배부분이 불룩한 '배흘림기둥'으로 유명한 무량수전은 한국미를 대표하는 문화재라는 찬사를 받는다. 고려말 재건립된 이후 지금까지 원형을 잘 유지해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목조건축물로 널리 알려져 왔다. 봉정사 극락전이 한국 건축의 구조미를 잘 보여준다면 무량수전은 한국 건축의 비례미의 백미라는 평가를 받는다. 건축물의 완성도면에서는 무량수전이 한수 위인 셈이다.

규모는 앞면 5칸, 옆면 3칸이며 기둥, 지붕, 공포(처마의 하중을 지탱하는 결구부재), 문창살, 문지방 등 각 부분은 장식적 요소를 최소화해 간결하지만 건물 전체의 조화를 극대화하고 있다. 주심포(공포의 양식)는 역학적이면서 기능에 충실한 기본 수법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다.

 간결미가 돋보이는 무량수전 주심포(지붕의 무게를 기둥에 전달하는 부분).
▲ 간결미가 돋보이는 무량수전 주심포(지붕의 무게를 기둥에 전달하는 부분).
배흘림기둥도 무량수전의 주요 특징 중 하나이다. 일자 기둥은 멀리서 보면 안쪽으로 굽어져 보인다. 배흘림은 이 같은 착시 현상을 방지해 건물을 안정적으로 느껴지게 했다. 무량수전은 주변 자연과도 하나로 어울린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 최순우는 "먼 산을 바라보면 산 뒤에 또 산, 그 뒤에 또 산마루,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 싶어진다"고 묘사했다.

무량수전 소조불상(국보 제 45호). 이 불상은 정면이 아닌 오른쪽을 향해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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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량수전 소조불상(국보 제 45호). 이 불상은 정면이 아닌 오른쪽을 향해 놓여있다.

국보 제45호 소조여래좌상은 무량수전 불상이다. 소조불상은 흙을 빚어 금칠을 해 만드는 것으로 우리나라 소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높이 2.78m) 오래됐다. 부석사에 있는 원융국사탑비 비문에 아미타불을 조성해 모셨다는 기록으로 미뤄 이 불상은 아미타불이 확실하다. 특이한 것은 불상이 정면이 아닌 오른쪽을 향해 놓여 있다는 점이다.

무량수전 뒤로 난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나오는 국보 제19호 조사당이 나온다. 조사당 처마 아래에 작은 나무가 있다.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았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내려온다.

부석사는 후고구려의 건국자 궁예와도 인연이 있다. 신라 왕족 출신인 궁예는 자신을 버린 신라에 대한 반감이 컸다. 삼국사기 열전 궁예편은 "(궁예가) 한 번은 남쪽을 돌아다니다가 흥주(興州) 부석사에 이르러 벽에 그려진 신라왕의 모습을 보고 칼을 뽑아 그것을 쳤는데, 그 칼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썼다. 삼국사기는 "'신라에 반드시 원수를 갚겠다'고 한 것은 아마도 태어났을 때 버림받은 것을 원망했던 까닭"이라고 설명한다.

무량수전은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훼손도 심하다. 벽체 부분의 배부름 현상이 매년 악화돼 벽체균열, 건물변형까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배부름 진행성 파악에서 매년 1㎜씩 수치가 증가하는 것으로 조사된 바 있다. 배부름은 벽체 속에 설치된 부재가 휘면서 생기는 것으로 판단된다. 균열 부분에 대해 연질의 흙으로 보강하고 벽체 변위 부위에는 보강 구조물 설치 등 대책을 강구하지만 임시변통에 지나지 않는다. 완전히 허물고 새로 짓는 게 답이지만 이도 쉽지 않다.

일제강점기 수리를 하면서 부실 복원한 게 원인이다. 일제는 1910년대 중반 조선을 병합한 뒤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무량수전 등 조선의 문화재를 대대적으로 보수한다. 당시 건물은 전면 해체됐다. 수리는 1916년 9월 21일부터 1919년 4월 20일까지 2년7개월간 이뤄졌다. 조선총독부는 2만3500엔의 예산을 투입해 초석 24개 중 5개와 상당수 목재·기와를 교체하고 벽의 전부를 채색했다.

총독부는 공사를 하면서 서까래와 추녀, 주심포 등의 목재를 고정하기 위해 인장볼트와 너트, 연결와이어 등 다량의 철물을 사용했다. 무리하게 건물을 허물어 놓고서는 다시 쌓아올리는 과정에서 목조건물의 구조적 불안정성을 해결할 자신이 없다보니 철물로 부재들을 고정했던 것이다. 복원이 아니라 문화재를 완전히 망친 셈이다. 같은 시기 석굴암, 미륵사지 석탑 등을 수리하면서도 다량의 콘크리트를 타설해 오랜 기간 논란이 되기도 했다.

더욱이 1916년 전 무량수전 상태를 알 수 있는 자료도 남아 있지 않아 애초 모습을 알 수도 없는 상황이다.

[배한철 기자]
원문보기
https://www.mk.co.kr/premium/special-report/view/2019/09/26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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