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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힘 있었지만 정복 멈췄다 '평화·번영 낳은 '로마판 천리장성...
글쓴이 tntv 등록일 [2019.10.03]
하드리아누스 장벽 



[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 [37]

힘 있었지만 정복 멈췄다… 평화·번영 낳은 '로마판 천리장성'

조선일보
  • 영국=송동훈 문명탐험가
  •  
입력 2019.10.03 03:00

[잉글랜드 북부 '하드리아누스 장벽']

- 탁월한 전쟁지도자 트라야누스

로마 오현제 중 두 번째 황제… 적극적으로 정복 전쟁 나서 메소포타미아까지

원정

- 평화 정착시킨 하드리아누스 황제

전쟁 중단하고 속주도 포기… 반란으로 몸살 앓던 제국… 시스템 개편, 내치

안정시켜

- 통치기간 3분의 2를 외부서 지내

변방까지 제국 곳곳을 순행… 브리타니아 반란 현장 가본 뒤 북방 부족 막을

장벽 건설

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
영국을 여행하기에 제일 좋은 계절은 초여름이다. 비와 안개의 섬에 햇살이 가득해진다. 본격적인 더위는 아직 오지 않았고, 바람은 가을인 듯 시원하다. 매일이 푸른 하늘인데, 예쁘게 구름이 수놓여 있다. 만약 영국에 갈 일이 있으면 무리해서라도 6월에 가려고 기를 쓰는 이유다. 그렇다고 영국 전역의 6월이 그런 것은 아니다. 같은 섬에 있지만, 남쪽 잉글랜드와 북쪽 스코틀랜드는 다르다. 북쪽은 좀 더 을씨년스럽다. 비도 종종 온다. 풍광은 날씨와 상관없이 서늘하고 황량하다. 그 변화의 경계에 선이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장벽이다. 거대하지는 않지만 왜소하지도 않다. 로마 시대에 지어졌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잘 보존돼 있다. 그래서일까? 관광객은 물론이고 장벽을 따라 하이킹을 즐기는 사람도 많이 볼 수 있다. 장벽 사이로는 로마 군단이 머물렀던 요새와 당시의 유물을 전시 중인 미니 박물관들도 있다. 생각보다 유물이 많고 수준이 높다. 북해 쪽 타인강 하구의 뉴캐슬에서 아일랜드 앞바다의 솔웨이 만까지 이어진 117.5㎞의 장벽. 로마제국의 북방 경계다. 지금도 외진 이곳에 이 거대한 유적을 남긴 사람은 하드리아누스 황제였다.

제국의 황제가 되다

하드리아누스(Hadrianus·재위 117~138년)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뒤를 이었다. 두 사람은 핏줄과 혼인으로 맺어진 사이였다. 물론 그런 관계 때문에 하드리아누스가 제위를 물려받은 건 아니었다. 트라야누스(Trajanus·재위 98~117년)는 로마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네르바 황제의 후임으로 '오현제(五賢帝)'의 두 번째에 해당한다. 오현제 시대는 로마제국은 물론이고 서구의 역사에서 가장 좋은 정치가 펼쳐졌던 시대로, 장기간 평화와 번영이 유지됐던 시기로 평가받는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로마에 의한 평화)는 이때가 절정이었다. 제국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했고, 능력 있는 황제가 '연이어' 등장했기에 가능했다. 좋은 정치의 핵심은 책임이다. 능력 있는 후계자를 선택하는 건 황제의 마지막 책임이다. 트라야누스가 그런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하드리아누스의 경력과 품성은 트라야누스와의 인연과 별도로 위대한 황제의 선택을 받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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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북부의 낮은 구릉지대를 따라 끝없이 이어진 하드리아누스 장벽은 현존하는 로마 제국의 유적 중 가장 거대하고 인상적이다. 먼 옛날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경계로 인식됐던 장벽은 오늘날 평온한 침묵 속에 로마 제국의 영광을 기리고 있다. /Getty Images Bank
제국의 확장을 중단하다

트라야누스와 마찬가지로 하드리아누스도 스페인 세비야 근처의 식민도시 이탈리카 출신이다. 로마 출신도, 이탈리아 본토 출신도 아닌 속주 출신이 최고 권력 자리에 오른 것이다. '출생보다 실력'을 중시하는 로마의 전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 하드리아누스는 과감하게 전임자의 정복 전쟁을 중단했다. 어려운 결정이었다. 자신을 황제로 밀어준 트라야누스는 근면성실하고 검소하며 품위와 절제를 갖춘, 로마 황제의 모범으로 꼽히는 사람이었다. 동시에 그는 탁월한 전쟁 지도자이기도 했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재위 기원전 27년~14년) 이래로 로마제국의 유럽 경계는 라인강과 도나우강이었다. 동부 아시아 쪽 경계는 오늘날 흑해에서 시리아를 거쳐 홍해에 이르렀다. 한 세기 동안 안정적이었던 제국의 국경이 트라야누스가 재임하던 시기에 요동치기 시작했다. 트라야누스가 있었기에 로마제국 입장에서는 다행이고 한편으론 기회였다. 트라야누스는 적극적으로 정복 전쟁에 나섰다. 백년 동안 이어져 온 현상유지 정책의 폐기였다.

당시 제국의 가장 큰 위협은 도나우강 하류 일대의 다키아족이었다. 유능한 지도자 데케발루스의 등장으로 급성장한 다키아는 도나우강 북쪽 일대에 거대한 왕국을 세우겠다는 꿈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로마 입장에서는 용납하기 어려운 도전이자 위협이었다. 트라야누스는 격렬하게 저항하는 다키아족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고, 완벽한 승리를 거뒀다. 도나우 국경선은 안정을 되찾았고, 로마는 아우구스투스가 정한 국경선 너머로 제국의 영토를 확장했다. 트라야누스의 다음 목표는 동방의 파르티아였다. 오늘날 이란을 발판으로 성장한 대제국 파르티아(기원전 247년~224년)는 오랜 기간 로마의 숙적이었다. 로마는 여러 차례 파르티아와 전쟁을 벌였으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트라야누스 말년에 이르러 두 제국은 중간에 낀 아르메니아 왕국을 둘러싸고 충돌했다. 트라야누스는 무려 10만 대군을 몰아 파르티아로 갔다. 단순한 전쟁이 아니라, 고대 문명의 발생지인 풍요로운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완전히 제패하기 위한 원정이었다. 트라야누스는 파르티아 왕국의 수도 크테시폰을 함락했고, 메소포타미아를 새롭게 속주 목록에 추가했다. 성공적인 원정 직후 트라야누스는 죽었다. 뒤를 이은 하드리아누스는 전격적으로 트라야누스의 정복 전쟁을 중단했다. 애써 얻은 속주도 포기했다. 과감한 정책의 전환이었다. 왜 그랬을까?

제국을 여행하고 새판을 짜다

하드리아누스 장벽
로마제국은 곳곳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유대, 브리타니아, 북아프리카의 모리타니아가 대표적이었다. 다키아족이 사라진 도나우강 북쪽에서는 또 다른 게르만족이 로마의 영토를 위협했다. 반란을 진압하고 제국에 안정을 가져오려면 평화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하드리아누스의 판단이었다. 또한 내부 개혁을 위해서도 평화가 필요했다. 전쟁을 포기했다고 하드리아누스를 겁쟁이라 부를 수는 없다. 그는 제국의 시스템을 개편하고 내치를 안정시키는 데는 트라야누스를 능가하는 황제였다. 특히 하드리아누스는 그 일을 하기 위해 제국 곳곳을 순행했다. 20년이 넘는 통치 기간 중 3분의 2에 달하는 시간을 로마가 아닌 제국 어딘가에서 보냈다. 화려한 수도에서의 안락하고 평온한 삶 대신 척박한 변방에서의 거칠고 불편한 일상을 선택한 것이다.

특히 브리타니아 문제 해결이 시급했다. 하드리아누스가 즉위한 117년에 브리타니아에서 발생한 원주민들의 반란은 제9군단의 궤멸이라는 충격적인 사태로 이어졌다. 반란이 진압되기는 했지만 재발 방지를 위해 방위 체제 재구축은 불가피했다. 122년 봄 브리타니아에 도착한 황제는 반란의 현장까지 직접 갔다. 오늘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접경지대다. 장벽은 그때, 그곳에 지어졌다. 로마의 통치를 받는 섬 남쪽의 비옥한 지역을, 로마의 통치를 거부하는 북쪽의 반항적인 부족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서. 황제는 그런 식으로 제국 전역을 순행했고, 문제를 해결했다. 로마의 내부는 정비됐고, 로마의 평화는 지속됐다. 138년 제국의 권력은 평화롭게 안토니누스 피우스에게 이양됐다.

장벽은 호기심을 자극한다. 군사용이라기엔 너무 낮고, 비(非)군사용이라기엔 너무 육중하다.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상징적인 울타리였을까? 그렇다 한들 제국의 시각이다. 북쪽 원주민들에게는 억압과 자유를 가르는 경계였을 수 있다. 내게는 이곳까지 확장된 로마제국의 권력인 동시에 한계로 읽힌다. 제국이 아무리 방대하다 한들 한계는 반드시 있다. 전성기에 세워진 장벽이 증거다. 위대했던 로마의 평화! 무한하지 않았다. 영원하지도 않을 터였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예술가 기질… 그리스 열렬히 사랑]

안티노스
/송동훈
하드리아누스와 트라야누스는 뛰어난 황제였다. 그러나 캐릭터는 많이 달랐다. 트라야누스가 군인이라면 하드리아누스는 예술가다. 하드리아누스의 맹목적인 그리스 사랑은 어쩌면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었다. 황제는 순행 도중 아테네는 물론이고 델포이 신탁, 코린토스, 스파르타, 올림피아, 로도스섬 등 그리스 세계에서 유명한 곳은 모두 방문했다. 하드리아누스는 무너진 아테네를 재건해 학문과 관광의 중심 도시로 만들고자 했다. 하드리아누스는 로마 황제 중 옛 그리스인들처럼 구레나룻을 기른 최초의 황제이기도 했다. 이후 성년 로마인들 사이에서는 구레나룻을 기르는 것이 보편화됐다. 미소년 안티노스(Antinous·사진)를 사랑한 것도 그리스적이었다. 뛰어난 미모 의 소유자였던 안티노스는 7년 가까이 황제의 총애를 받았고, 이집트 나일강에서 익사했다. 황제와 함께하던 여행 도중에 일어난 비극이었다. 황제는 죽은 안티노스를 신격화하고, 그의 이름을 딴 도시 '안티노폴리스'를 세웠다. 그의 조각상을 대량으로 만들어 제국 곳곳에 뿌리기도 했다. 오늘날 유럽의 유수한 박물관에 전시된 많은 안티노스 조각상은 이때 만들어졌다.

원문보기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10/03/2019100300005.html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10/03/201910030000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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