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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 동맹 선택 잘못한 약소국… 천재 아르키메데스도 멸망 막지 ...
글쓴이 tntv 등록일 [2019.06.27]
시라쿠사 

[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 [32]
 
동맹 선택 잘못한 약소국… 천재 아르키메데스도 멸망 막지


못했다

조선일보
  • 시라쿠사=송동훈 문명탐험가
  •  
 
입력 2019.06.27 03:00

카르타고와 손잡았다 로마에 정복된 시라쿠사

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
제국은 투쟁하고, 문명은 충돌한다. 인류 역사에서 무수히 반복되는 보편적 현상이다. 로마와 카르타고의 전쟁도 그중 하나였다. 성격이 전혀 다른 두 제국은 애당초 서(西)지중해를 나눠 가질 수 없었다. 전쟁은 불가피했다. 이때 가장 힘든 것은 충돌하는 제국들이 아니다. 제국들 사이에 낀 중소 국가들이다. 중립은 죽기 살기로 싸우고 있는 제국이 허용하지 않는다. 한 편에 줄을 설 수밖에 없다. 쉬운 선택이 아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지지 않으려면 각별한 노력과 냉철한 판단이 필요하다. 문제는 그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국 간의 거대한 전쟁이 끝나고 나면, 승자와 패자가 결정되고 나면 중간에 낀 많은 나라가 사라지거나 예전만 못하게 된다. 포에니 전쟁 때도 그랬다. 대표적인 나라가 도시국가 시라쿠사(Siracusa)였다.

번영하는 시라쿠사

시라쿠사는 항구다. 지중해의 심장이라는 시칠리아의 동쪽에 있다. 그리스인들은 일찍이 지중해 전역에 진출해 식민 도시를 세웠다. 시라쿠사도 이때 그리스 본토의 주요 폴리스 중 하나인 코린토스의 개척자들이 만들었다(기원전 734년경). 거대한 지중해 교역 체계의 중심에 있는 덕분에, 개척자들의 열성적 노력 때문에 시라쿠사는 거대 도시로 성장했고 번영을 누렸다. 그때 흔적을 시라쿠사는 오늘까지 보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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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쿠사의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는 웅장한 그리스식 극장은 한때 이 도시가 지중해 세계에서 차지했던 비중을 상징한다. 시라쿠사는 아테네, 카르타고와 싸우며 성장하고 번영했으나 2차 포에니 전쟁 때 동맹을 잘못 선택함으로써 로마에 자유와 독립을 잃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항구 전면에 툭 튀어나온 작은 섬 오르티자(Ortigia) 초입의 아폴로 신전은 남아 있는 흔적만으로도 그 웅장함을 짐작하게 한다. 내륙의 나지막한 언덕에 있는 거대한 그리스 극장은 항구와 구(舊)도심을 향한 압도적 전망과 함께 시라쿠사가 한때 아테네와 자웅을 겨뤘던 자부심 넘치는 도시였음을 드러낸다. 번영은 시라쿠사가 자유와 독립을 잃고 로마에 무릎 꿇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그리스 극장 아래의 로마 원형극장 터가 그 증거다. 로마에 복속되기 이전 시라쿠사의 위세는 대단했다. 서지중해의 패자(霸者) 카르타고와 싸워 시칠리아의 동반부를 영향권 아래 뒀다. 아테네를 지지하는 세력과 스파르타를 지지하는 세력이 정면으로 충돌한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간에는 스파르타의 동맹으로 활약했다. 이때 시라쿠사는 시칠리아에 쳐들어온 아테네 군대를 몰살해 전쟁의 승패를 가르기도 했다(기원전 415년~기원전 413년). 그토록 대단했던 시라쿠사는 어떻게 멸망했을까? 왜 자유와 독립을 잃고 로마제국 속으로 사라졌을까? 어리석은 리더의 잘못된 선택 때문이었다.

하나 된 로마, 분열된 카르타고

시라쿠사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년~기원전 146년)은 고대 지중해 세계의 세계 대전이었다. 로마와 카르타고는 1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세 차례 격돌했다. 전쟁의 하이라이트는 '한니발 전쟁'이라고 하는 2차 전쟁(기원전 218년~기원전 201년)이었다. 천재적인 장군 한니발은 연이은 승리로 로마를 존폐의 갈림길로 몰았다. 칸나에 전투(기원전 216년) 직후가 그 절정이었다. 그러나 로마는 강했다. 군사력보다 정신 상태가 그랬다. 최악 상태에서 로마는 책임을 묻고 서로를 비방하기보다 하나로 뭉쳤다. 생존의 구원은 타협이 아니라 오로지 승전에 있다는 데 구성원들이 합의했다. 포로 문제를 구실로 강화의 물꼬를 트려 했던 한니발의 사절은 로마의 성벽 앞에서 되돌아가야 했다. 누구나 알지만, 아무나 선택할 수 없는 길을 로마는 선택한 것이다. 전쟁의 승패는 사실 이때 결정됐다.

카르타고는 반대의 길을 갔다. 그들은 약했다. 내부가 분열돼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에 반대하는 세력은 한니발이 승기를 잡았음에도 정적(政敵)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려 하지 않았다. 칸나에 전투 직후에 카르타고가 범국가적으로 한니발을 지원했다면 로마는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분열되고 서로를 시기하는 카르타고는 그러지 못했다.

결과론적으로 이 전쟁은 로마 대(對) 카르타고의 충돌이 아니었다. 국가 로마와 개인 한니발의 싸움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안다. 이 순간에 로마는 승리를 향해서, 카르타고는 패배를 향해서 착실하게 한 걸음씩을 내딛고 있었다는 것을. 그러나 당시를 살아가던 사람 대부분에게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혼돈 시대였다.


로마를 버리고 카르타고를 선택하다

시라쿠사의 히에론(기원전 308년~기원전 215년)은 탁월했다. 50년 가까이 시라쿠사의 통치자로 시칠리아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카르타고와 로마 사이에서 고심했다. 평화 시에는 중립을 유지했고, 전쟁 시에는 로마에 붙었다. 두 제국의 충돌을 시라쿠사의 군주는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그에겐 충돌을 막을 힘이 없었다. 충돌이 시작되면 언제나 그의 선택은 로마를 향한 계산적 충성이었다(몸젠 '로마사'). 살아남으려면 강한 나라를 선택해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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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이자 공학자인 아르키메데스(그림 하단 오른쪽)가 로마군의 공격에 맞서 시라쿠사 방어를 지시하는 상상화. 그러나 천재의 방어 시스템으로도 시라쿠사는 멸망을 피하지 못했다. /위키피디아
칸나에 전투 직후에 찾아온 히에론의 죽음은 다가올 시라쿠사 멸망의 전조였다. 후계자인 손자 히에로니무스는 어리석은 십대 중반의 소년에 불과했다. 그에겐 로마와 카르타고의 국력과 전쟁 상황을 제대로 판단할 능력이 없었다. 소년은 '전쟁이 끝나면 시칠리아 전체의 소유권을 시라쿠사에게 넘기겠다'는 카르타고의 말에 속아 털컥 동맹을 바꿨다. 시칠리아의 절반은 카르타고인들이 개척한 땅이었다. 시라쿠사와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의 패권을 두고 수백 년간 싸워왔다. 카르타고와 로마의 충돌 또한 시칠리아를 둘러싸고 시작됐다. 그런 시칠리아를 카르타고가 숙적인 그리스계 시라쿠사에 넘기겠다는 발상 자체가 불가능했다. 자신의 할아버지가 왜 굴욕을 참아가며 로마 편에 섰는지를 손자는 심사숙고하지 않았던 것이다.

카르타고의 군대가 도시 안으로 들어왔고, 시라쿠사는 분열했다. 정치적 혼란 속에서 히에로니무스는 살해됐고, 도시의 지배권은 카르타고의 군인들 손아귀에 들어갔다.

시라쿠사 무너지다

로마는 한니발을 상대로 선전했던 백전노장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Marcus Claudius Marcellus)를 파견했다. 시라쿠사 공성전의 시작이었다(기원전 213년~기원전 212년). 전쟁은 치열했다. 군사력은 로마가 월등하게 우세했지만, 시라쿠사에게는 박식한 수학자이자 공학자인 아르키메데스가 히에론 시절에 구축해 놓은 완벽한 수비 체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승리는 로마군에게 돌아갔다. 전쟁 결과는 우수한 무기보다 총사령관의 능력과 군인들의 결기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마르켈루스는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500년 넘게 지중해 교역을 이끌어왔던 부유한 상업 도시는 약탈당했고, 사령관의 신신당부에도 불구하고 아르키메데스를 비롯한 수많은 시민이 살해됐다. 시라쿠사는 그렇게 멸망했다. 그들은 훗날 다시 번영하게 되지만, 그때는 단지 로마 제국의 식민 도시일 뿐이었다.

역사는 반복된다. 인간이 역사에서 많은 것을 배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2, 제3의 시라쿠사는 계속 존재했다. 오늘날에도 있고 내일도 있을 것이다. 어리석은 약소국의 숙명이 애달프다.


[한니발 대승 뒤, 카푸아도 反로마로 돌아섰다가 패망]

시라쿠사만 잘못된 선택을 한 건 아니었다. 카푸아(Capua)도 마찬가지였다. 시라쿠사가 시칠리아섬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국가였다면, 카푸아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로마 다음으로 강력했다. 보병 3만명과 기병 4000명을 파견할 수 있는, 로마 연방의 핵심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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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로 남은 오늘날의 카푸아 원형 경기장. 규모 면에서 로마의 콜로세움 다음으로 컸다. 이 도시는 한니발 전쟁에서 로마를 배신한 대가로 역사의 전면에서 물러나야 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그러나 칸나에 전투 이후 반(反)로마파는 친(親)로마파의 강력한 반대에도 로마를 버리고 한니발을 선택했다. 로마로서는 절체절명 순간에 다가온 뼈아픈 배신이었고, 한니발에게는 가장 강 력한 원군이었다.

카푸아의 종말은 시라쿠사와 유사했다. 한니발은 이 도시를 지켜내지 못했고, 결국 카푸아는 로마에 무조건 항복했다(기원전 211년). 벌은 가혹했다. 지도층은 참수당하거나 투옥됐고, 시민 상당수는 노예로 팔려 갔다. 도시의 부는 로마에 몰수됐다. 이때 카푸아는 역사의 2선으로 물러났고, 오늘날까지 이름 없는 이탈리아 중부 소도시로 남아 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6/27/201906270019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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