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난 하늘 금빛 모래… 눈부신 자연에 점점 빠져든다

고풍스러운 옛 건물들이
차츰 똑같아 보이기
시작한 건 유럽 여행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났을 무렵이다.

도시마다 하나씩은 존재하는
웅장한 대성당도,
유구한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박물관들도,
심지어 평생을 살아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며
호들갑을 떨었던 운치 있는 골목길마저
매일 같이 마주하다 보니
다 고만고만해 보이기 시작했다.

파격적으로 ‘새로운 것’이 필요했다.

◇기차를 타고 신트라에서 호카 곶까지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에서 기차를 타고 40분 남짓 달리면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신트라(Sintra)에 도달한다. 신트라와 호카 곶(Cabo da Roca)을 묶어 당일치기로 움직이기에
충분하기 때문에 리스본을 여행하는 여행자라면 반드시 들러야 할 필수 코스다.
기차역 앞에서 434번 버스를 타고 첫 번째 목적지인 페나 궁전(Palacio de Pena)으로 향한다.
해발 526m에 있는 성 주변에는 3000종이 넘는 짙푸른 수목이 빽빽이 들어차 있고, 그 한가운데에
보석 같은 페나 궁전이 우뚝 솟아 있다.

궁전을 올려다보는 순간, 요샛말로 '동공 지진'이 인다. 어딘가 익숙한 듯하면서 또 완전히 새롭다.
아름답다는 수식어보단 신비롭다는 말이, 동화 속이라는 말보단 신화 속 세상이라는 수식어가 잘
어울린다. 16세기에 지어진 방치된 수도원을 19세기에 페르난도 2세가 사들였고, 독일의 건축가
루트비히 폰 애쉬베게에게 상상 속 성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할 것을 지시하여 현재 같은 모습으로
재탄생되었다. 중세 유럽식의 성곽, 고딕 양식의 돔(Dome), 포르투갈과 아랍 양식의
아줄레주(Azulejo·타일을 이용한 벽면 장식), 이슬람 무어 양식의 문과 정원, 거기에 낭만주의 양식도
 함께 어우러졌다. 그 어디에서도 경험하지 못했던 건축계 퓨전의 최고봉이다.

켈트어로 신트라는 '달의 언덕'을 뜻한다. 녹음 우거진 고도 위 샛노랗게 채색된 페나 궁전과 딱
맞아떨어지는 단어다. 입장권을 끊고, 아치 형태의 정문을 통과하면 동남아 수목원에 온 듯한
착각이 드는 이국적인 나무와 꽃들이 가득하다. 우거진 숲 사이를 오르다 보면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강렬한 파사드와 마주하게 된다. 반은 사람, 반은 물고기. 돌 산호초 위에 버티고
앉은 트리톤이다.

궁전의 내부 또한 놓쳐서는 안 될 볼거리를 가득 품고 있다. 궁전의 실내는 왕정이 폐지되고 아멜리아
왕비가 떠났던 1910년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식탁 위 식기며, 침실의 취침등과 드레스룸의 거울과
퍼퓸, 욕실의 욕조와 세면도구까지도 방금 사용을 끝낸 것처럼 현실감 있다. 중앙 연회홀과 천장에
27마리의 백조가 그려진 '백조의 방', 176마리의 까치가 그려진 '까치의 방', 74개의 귀족 문장이
그려진 '문장의 방' 등 테마 파크 못지않은 다양한 콘셉트의 방들을 둘러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호카 곳. 신트라 역에서 403번 버스를 타고 30분을 달리면 대륙의 서쪽 끝에 서게 된다.
대서양을 바라보며 대모험을 꿈꾸는 이들이 모여들었던 곳, '꽃보다 할배'의 배우 신구가 일부러
찾아가 더욱 유명해진 곳이다. 신트라에서 해 지기 한두 시간 전 출발했다면 기막힌 타이밍에
이곳에 도착하게 된다. 푸른 바다가 수평선 너머로 붉은 해를 집어삼키는 시간. 호카 곶을 방문하기에
가장 아름다운 때이기도 하다. 호카 곶 한가운데의 십자가 탑에는 포르투갈의 유명한
시인 카몽이스가 남긴 글귀가 새겨져 있다. "여기가 육지가 끝나는 곳이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이다."

◇렌터카를 타고 떠나는 히든 비치, 베나길

여느 가이드북에서나 우후죽순으로 소개하는 관광지에 신물이 났다면, 지금 당장 베나길을
검색해보라. 베나길(Benagil)로 향하게 된 건 우연히 보게 된 한 장의 사진 때문이다.
상상 속에서나 있을 법한 반원형의 해식 동굴 안에는 금빛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고, 동굴
천장의 한가운데에 동그랗게 나 있는 커다란 구멍 사이로 조각난 하늘이 눈부시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곳, '히든 비치'라는 이름 그대로 어느 바다 위에 숨겨진 신비로운 해변
사진이다.

리스본에서 남쪽으로 약 2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천국으로 오르는 해변'이 존재한다.
단, 대중교통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렌터카를 이용할 것을 권장한다. 끝에서 끝까지 100m가
채 되지 않는 조그마한 해변에 도착했다면 제대로 찾은 것이다. 모래사장 한 귀퉁이에 자리한 한 평
남짓의 간이 매표소에서 표를 산 후 작은 보트에 몸을 싣는다. 하얀 모터보트는 흰 포말을 일으키는
파도와 혼연일체가 되어 거대한 바다로 나아간다. 몇 개의 거대 기암괴석을 지나면 사진 속
그곳이 나타난다.

처음 보는 광경에 입이 딱 벌어진다. 어느 누구의 발자국도 기록되지 않은 모래 위에 우두커니
남겨졌다. 30분 후에 돌아온다는 말만 남기고 보트는 떠난다. 입구로부터 불어 들어오는 시원한
바닷바람은 온몸에 자유를 불어넣고, 머리 위에서 내리쬐는 눈부신 햇살은 평화를 안겨준다.
어딜 가도 관광객에 치이는 여행지에 진저리가 난다면 반드시 둘러보아야 할 곳, 베나길이다.
한국인이 드문 곳, 세상사에서 온전히 벗어난 여행지를 찾고 있다면 역시 베나길이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