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온갖 층과 켜가 겹겹이 쌓인 퇴적물과 같다. 어떻게 단면을 잘라내느냐에 따라 다양한 무늬와 결이 나타난다. 따라서 아름다운 무늬만을 찾아내 우리의 역사로 자랑할 수 없듯, 결이 밉고 추하다고 해서 우리의 역사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와 더불어 우리나라에 가장 부끄러운 역사 한 페이지를 다루고 있다. 바로 몽골제국의 칭기즈칸이 이룩한 원나라의 지배를 받던 고려 말 '충'자 돌림 왕들의 시대이다. 수치스러움의 정서는 자칫 역사를 외면하게 만들곤 한다. 이 시기의 연구가 외세에 대한 '독립의지'나 '항쟁'이 중심이 이루는 이유이기도 하다.
세계를 제패한 원은 황실의 공주를 고려에 시집보냄으로써 혈연관계를 통해 고려를 지배하려고 했다. 그래서 고려의 국왕은 몽골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고 그녀가 낳은 아들은 고려의 왕이 되었다. 국왕이 된 몽골여인의 아들은 다시 몽골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는 일이 거의 한 세기에 걸쳐 반복되었다. 물론 김수로왕의 비가 된 인도 여인 허황후와 고구려 유리왕의 계비인 중국 여인 치희도 다른 나라의 여인이 왕비가 된 경우이다. 그러나 이들은 일회적이며 자발적 의지에 의한 것이었다. 지속적이며 강제적이었던 몽골출신 왕비들과 다르다는 말이다. 물론 고려국왕들도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몽골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인 면이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저자는 '지속적인 자발적 강제성'이라는 어색한 표현을 쓰고 있기는 하다.
고려왕비가 된 몽골여인들은 고려 제25대 충렬왕부터 제31대 공민왕까지 총 여덟 명이었다. 충선왕은 두 명, 충숙왕은 세 명의 몽골여인과 혼인했다. 역사는 이들은 제국대장공주(충렬왕비), 복국장공주(충숙왕비), 덕령공주(충혜왕비), 노국대장공주(공민왕비) 등으로 부르고 있다. 이 이름들은 사망한 후 원나라로부터 받은 시호이다. 제국이나 노국은 식읍으로 받은 지역이며 대장공주, 장공주, 공주는 황제의 고모, 황제의 누이, 황제의 딸을 나타내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고, 모두 정 1품에 해당하는 일종의 품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홀도르게리미실(충렬왕비), 역련진팔라(충숙왕비), 역련진반(충혜왕비), 보탑실리(공민왕비)라는 우리들에게는 낯선 그녀들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비록 몽골어 발음이 아니고 한자 발음이지만 잊혀진 그녀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싶어서란다.
2006년 6월 11일 경북 안동에서 이색적인 미인대회가 열렸다. 이른바 '제1회 노국공주선발대회'다. 공민왕의 정비인 노국공주를 기리기 위한 행사였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노국공주는 몽골에서 시집온 여인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 얼마 전 방영된 '신의'를 비롯해 '대풍수', '신돈' 등의 드라마에서 각각 비중 있는 인물로 등장하기도 했다. 그런데 700여 년 전 몽골출신의 고려 왕비를 기리는 행사가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선비의 전통이 강한 안동에서 열렸다는 사실은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그러나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 7호인 '안동 놋다리밟기'의 유래를 알고 나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안동놋다리밟기는 안동지방에서 정월 대보름에 행해지던 여성들만의 민속놀이로 '놋다리놀이' 또는 '기와밟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려 공민왕(재위 1351∼1374)이 1361년 홍건적의 난을 피해 노국공주를 데리고 안동으로 피난을 와 임시 수도를 삼았다. 비록 그해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두 달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노국공주는 안동사람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공주가 개울을 건널 때 마을의 부녀자들이 허리를 굽혀 다리를 놓았다는데서 이 놋다리밟기가 유래되었다는 설이 힘을 얻는 이유다. 물론 정월대보름을 맞아 공주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놀이공연을 펼쳤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노국공주는 고려왕비가 된 마지막 몽골여인이다. 그녀는 원나라 황족 위왕(魏王)의 딸로서, 1349년 원나라에서 공민왕과 결혼해 왕비가 되었다. 그리고 1365년(공민왕 14)에 아이를 낳다 난산(難産)으로 죽었다. 그녀가 죽은 뒤부터 왕은 상심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고, 친히 왕비의 진영(眞影)을 그려 벽에 걸고 왕비의 죽음을 애도하는 한편 불사를 일으켜 혼제를 지내고 화려한 영전을 지었다. 지금까지 세기의 로맨스로 전해지는 이유다. 그러나 고려왕비가 된 몽골여인들이 모두 노국공주처럼 왕의 사랑을 받은 것은 아니다. 황제의 권력을 배경으로 고려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행사하거나 왕이 된 어린 아들을 대신해 섭정을 한 경우도 있지만, 정략결혼의 희생자들로 남편으로부터 사랑도 받지 못한 채 만리타향에서 외롭게 삶을 마감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책을 쓴 이한수는 고려대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정치학과에서 석사,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로 재직하고 있고, 2006년 6월 『세종시대 '가家'와 '국가國家'』라는 책을 냈고, 「 세종시대의 정치: 가와 국가의 긴장을 중심으로」「조선 초기 가와 국가에 관한 논쟁: 양녕대군 폐세자와 세종의 즉위과정을 중심으로」「조선 초기 변계량의 시대인식과 권도론」「조선 초 개국주도파와 개국 후 참여파의 정치사상적 갈등: 정도전과 하륜을 중심으로」 등의 논문을 쓴 바 있다. 이 책은 김영사에서 펴낸 '표정있는 역사' 시리즈의 하나로 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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