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22대 왕 정조는 조선 후기 문화적 전성기를 꽃피웠던 왕이다. 11살의 어린 나이에 비명에 간 사도세자를 아버지로 두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에게 끝없는 연민을 느끼게 하는 왕이지만 실제 그가 남긴 여러 자취를 통해 볼 때 그는 권력의 정점에서 치밀하게 왕권을 강화시켜 나간 인물이다.

정조는 정치적 현안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자신이 원하는 정치적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 여러 신하들에게 비밀 편지를 보낸다. 그 편지들이 수신자의 집안에 대대로 보존되어 지금까지 많은 양이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 소개하는 것은 정조가 노론 벽파의 거두 심환지와 외삼촌인 홍낙임에게 보낸 편지들이다. 이 편지들은 용의주도하게 정국을 운영해가는 개혁군주 정조의 모습과 고뇌하는 정조의 인간적인 숨결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생생한 자료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두 종류의 정조 임금 편지가 소장되어 있다. 하나는 정조의 신하인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첩(정조어필(正祖御筆), 2첩 36건)이고 다른 하나는 정조의 외삼촌인 홍낙임에게 보낸 편지첩(정조신한(正祖宸翰), 첩과 두루마리 30건)이다. 보낸 사람은 한 사람이지만 수신자에 따라 편지의 내용이 많이 달라지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두 종류의 편지들은 모두 다른 날짜의 편지들을 수신자쪽에서 받은 후 모아 두었다가 어느 시점에 첩으로 만든 것이다.

홍낙임의 편지들은 정조 시대에서 멀지 않은 때에 쌍용 문양의 쪽빛 비단으로 봉투와 함께 성첩되었다. 이와 같은 장황(粧潢: 비단이나 두꺼운 종이를 발라서 책이나 화첩(畫帖), 족자 따위를 꾸미어 만든 것)은 1806년 혜경궁 홍씨가 비용을 대어 영조, 장헌세자(사도세자), 정조의 3대 어필을 모아 성첩할 때의 것으로 혜경궁 홍씨 집안의 다른 수신자 편지첩에서도 확인된다. 또한 외삼촌에게 보낸 편지의 봉투에는 외삼촌이 살았던 마을 이름을 따서 ‘번리(樊里)’나 ‘번촌(樊村)’이라고 써서 수신자를 확인할 수 있게 하였다.

이와는 달리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첩과 두루마리는 비교적 최근 들어 장황을 한 것으로 보인다. 첩에는 봉투가 함께 들어있지만 두루마리에는 모두 봉투가 제외되어 있다. 그리고 대부분 날짜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수신인 쪽에서 받은 이후에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심환지에게 보내는 봉투에는 대부분 ‘삼청동(三淸洞)’이나 ‘청동(淸洞)’ 등 삼청동에 살았던 심환지를 나타내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할아버지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정조의 왕위 계승이 그다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정조는 11살의 어린 나이에 뒤주에 갇힌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채 자신의 즉위를 반대하는 세력들의 음모를 이겨내고 어렵게 즉위하였다. 왕위에 오른 정조는 자신들의 정적을 제거해 나가고 노론·소론·남인 등 각 붕당 사이에서 탕평론을 주장하여 정권을 안정시키며 왕권을 강화해 나간다. 이를 위해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으로 옮기고 그곳에 화성신도시 건설을 추진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정조는 왕으로서의 초월적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해 자신을 '만 갈래 시내에 비치는 밝은 달과 같은 존재'라는 의미로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란 자호를 사용한다. 두 종류의 편지첩에도 이 자호를 새긴 인장을 사용하고 있다.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첩은 1796년 5월부터 1800년 윤4월에 보낸 편지들이다. 4년 동안 30건의 편지가 묶여 있는데 이 편지들은 정치현안에 대하여 정조가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거나, 심환지에 대한 당부나 질책, 정국을 주도하기 위한 구체적 지시 등을 내리는 내용이다. 심환지(1730~1802)는 본관이 청송(靑松)으로 정조 대에는 이조참판, 규장각제학을 거쳐 이조·병조·형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798년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다. 정조가 승하한 뒤에는 정순왕후에 의해 영의정에까지 제수되었다.

정조는 심환지에게 보낸 위의 편지에서 “내가 사류(士流)의 두목이니, 지금 사류의 전형을 구한다면 형편상 경을 먼저 꼽을 것이다. 경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나의 마음은, 서야(徐也)에게보다 열 배가 넘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즉 정조는 자신을 사류의 두목으로, 심환지는 사류의 전형으로 꼽고 있다. 이것은 자신이 정국을 주도하는 감독이 되고, 심환지를 주연 배우로 삼아 정국을 끌고 가겠다는 단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로 인해 심환지가 받을 상처를 생각하면 두렵지만 자신이 그를 늘 잊지 못하고 그를 생각하는 마음이 누구보다도 크다고 언급하고 있다.

정조는 자신이 주도하고자 하는 정국의 모습이 있었으며, 심환지의 입과 글을 빌려 자신이 주장하고 싶은 것을 피력하고, 그 언급의 시기와 내용까지도 조정하고 있다. 자신이 의도한 대로 심환지가 움직이도록 그에게 여러 주의해야 할 행동을 각별히 부탁한다. 심환지가 중진(重鎭)으로서 ‘준엄한 기상’으로 위엄을 보이며, 흔들리지 않고 한결같을 것을 강조한다. 정조는 심환지에게 당부하는 차원에 그치지 않고 때로는 그의 잘못을 통렬히 꼬집으며 꾸짖기도 한다. 특히 정조는 마치 각본처럼 꾸며진 자신의 편지가 사전에 발각되지 않도록 읽고 나서 바로 찢어버릴 것을 강조하고 당부하였다. 정조는 심환지에게만 편지를 쓴 것이 아니라 당시 자신의 측근에 있던 여러 명에게 편지를 보내고 이 편지 왕래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의지를 확실하게 전달하고, 상대방과의 의견을 조율함으로써 정국 운영의 수단으로 이용하였던 것이다.

정조는 편지에서 자신의 성격을 조급하고 괄괄한 태양증(太陽症)이라고 하며 이런 연유로 밤에 가끔씩 벽을 돌 때도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성격 탓에 정조는 국가의 대소사와 책의 편집, 여러 친인척들의 소식들을 자신이 간여하여 처리하고자 하였다. 정조는 밤을 새면서 날마다 끊임없이 고심하였고 공무로 인해 정력을 소진해 버렸다. 그런 가운데 그에게 유일한 위안은 독서였다. 정조는 독서가 가슴의 막힘과 답답함을 사라지고 흩어지게 해준다고 하였다. 그는 이렇게 많은 책을 읽었고, 다독을 바탕으로 많은 책을 저술하였다. 특히 외삼촌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에는 정조가 꼼꼼하게 관여했던 서적의 편찬과정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정조는 세손으로 있을 때 외할아버지 홍봉한에게 많은 편지를 보냈으나 그가 정조 2년(1778)에 죽은 뒤에는 외삼촌들, 그 가운데 홍봉한의 셋째 아들 홍낙임에게 많은 편지를 보냈다. 정조는 외삼촌에게 지나간 일에 대한 그리움을 말하기도 하고, 어머니의 환후에 대한 걱정과 문안을 청한다거나, 혼사나 출산 등의 집안의 경사에 어머니가 소식을 궁금해 하니 궁궐에 와서 집안의 일들에 대해 어머니께 들려달라는 당부도 빠뜨리지 않는다.

정조는 태종릉인 헌릉에 행차할 때 어머니의 종기가 심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홍낙임에게 편지를 보내 홍낙륜·홍취영 등을 들여보내 어머니의 환후를 살피라는 당부의 편지를 계속해서 보내고 있다. 홍낙임의 셋째 아들 노영이 과거 시험에서 일등을 차지한 것, 홍낙임이 증손녀를 얻게 된 것, 홍낙윤이 사위를 맞게 되는 것 등 집안의 대소사에 대해 매우 기뻐하며 조만간 궁궐에 와서 결혼 잔치 치룬 이야기를 어머니께 들려 달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정조는 왕실 친척끼리 함께 모여 여는 잔치인 화수회 날짜를 기다리는 마음을 편지 곳곳에서 언급하고 있다.

정조의 내밀한 이야기를 담은 편지는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내각일기], [일성록] 등 정조시대의 관찬서에서는 접할 수 없는 다른 면들을 보여주고 있다. 정조의 내면적 고뇌라든가 특정 사건의 배경과 전개과정 등을 보다 생생하게 접할 수 있게 해준다. 지금까지 공개된 정조의 편지도 많지만 아직도 공개되지 않은 편지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정조의 당부대로 이 비밀스런 편지들을 찢어버렸다면 이 편지들은 우리들에게 정조시대의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지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정조의 개인적인 편지들과 관찬서들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그 시대를 엿본다면 훨씬 풍부한 당시의 이야기들을 풀어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