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건너로 실어 보내는 슬픔의 시
삶의 행로는 리듬감 있게 흐르는 곡선 상에 있다. 그래서 좋은 일에 기뻐할 수 있고, 나쁜 일도 겪어낼 수 있는 것이다. 역사가 희비의 굴곡을 타고 흘러온 것처럼 말이다. 6월 마지막 주는 내내 장맛비가 쏟아졌는데, 운 좋게도 영월을 찾은 그 날 하루만은 거짓말처럼 날씨가 화창했다. 원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황학주 시인을 만나 함께 영월로 향하는 길, 그는 토지문화관에 머물며 그동안 써놓았던 글들을 시집으로 엮기 위해 퇴고작업을 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오늘 가보려는 강원도 영월 청령포(명승 제50호)에 얽힌 추억과 그동안 다녔던 유적지들에 대해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 한 시간 여 만에 도착한 청령포. 불운은 때마침 찾아왔다. 폭우에 강물이 불어 배를 띄우지 못한 지 닷새나 됐다는 것이다. 예기치 않은 상황이었지만 거대한 역사 속에서 본다면 이만한 일 쯤은 허허 웃어넘길 수 있는 에피소드다.

황학주 시인은 청령포가 잘 보이는 곳이 있다며 길을 안내했다. 청령포 주차장을 빠져나와 왼편 오르막길로 방향을 잡았다. 몇 미터 지나지 않아 시인은 차를 길가에 멈춰 세웠다. 노송들이 그늘 막을 드리운 그곳에 왕방연 시조비가 청령포를 향해 서 있었다. “왕방연이 단종에게 사약을 전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곳에서 강물을 보며 시를 지었다지요. 글씨를 예스럽게 새겨서 시조의 내용과 어우러지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너무 쉽게 만들어 놓은 비의 모양새가 안타깝네요.” 조선시대 문신 겸 시인인 왕방연王邦衍은 세조世祖의 명을 받아 금부도사로서 단종端宗이 영월로 귀양을 갈 때 호송을 하였고,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이 발각되어 단종에게 사약이 내려졌을 때 그 어명을 수행한 인물이다.

위로하고, 위로를 받는 치유의 장소
언덕 위에서 굽이치는 여울을 바라보던 왕방연의 비통한 심정이 전해오는 듯, 시구를 읽어 내려가는 시인의 표정은 쓸쓸했다. “참 우연하게도 오늘이 단종이 영월에 도착한 날짜와 같군요. 그날도 오늘처럼 더웠겠죠? 언제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 자신의 앞날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이곳까지 오면서 단종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하게 되네요. 어쩌면 어떻게 해야 할 지 아무 생각이 없었는지도 모르지요. 너무 일찍 세상과 정치와 권력에 중상을 입고 절망했을 테니까요.”

1457년 6월, 단종은 숙부인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되어 그해 10월, 17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이곳 청령포에서 머물렀다. 며칠 동안 퍼부은 비에 더욱 세차게 흐르는 물살, 청령포를 휘감아 흐르는 강물 너머로 어소가 보였다. 그 형상이 마치 고립무원에 놓인 단종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청령포에는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따라 당시의 모습을 복원한 어소와, 영조대왕의 친필로 ‘단종이 이곳에 계실 때의 옛터’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 단묘재본부시유지가 있고, 그 북쪽으로는 금표비가, 뒷산 육육봉과 노산대 사이 층암절벽 위에는 단종이 직접 남긴 유일한 유적, 망향탑이 있다. 단종은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근심 속에서 한양에 두고 온 정순왕후 송씨를 생각하며 이 탑을 쌓았다.

“4~5년쯤 됐어요. ‘우리문화사랑’이라는 모임에서 한 달에 한 번 씩 전국의 문화재를 찾아다니는데, 청령포에도 그렇게 해서 오게 되었죠. 멤버들 중에는 문인도 있고, 역사학자도 있고, 화가도 있는데, 그땐 무용수 한 분이 동행해서 어소 앞에서 살풀이를 했었어요.”

시인은 우리나라 곳곳에 아름다운 장소가 많지만 청령포는 왠지 모르게 신성함이 느껴지는 곳이라고 했다. 짧은 거리지만 배를 타고 어딘가를 건넌다는 것은 특별한 느낌이 있고,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청령포에서의 그 아날로그적인 행위는 역사와의 만남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먼저 고독과 아픔을 간직한 채 역사 속에서 사라진 단종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일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자신보다 더 깊은 아픔을 갖고 있는 존재를 통해 위로를 얻고 치유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예술이 그런 것처럼 글 쓰는 것의 본질은 결핍과 상처에 있다고 말하는 시인. 그는 역사의 장소에서 그 시대 그곳에 살았던 인물에 의지해 세상을 견뎌내기도 했다.

말없이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역사의 유물
강을 건너 청령포 안까지 가보지 못한 아쉬움에 시인은 장릉(사적 제196호)에 들르기로 했다. 장릉은 영월의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가 동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몰래 수습하여 동을지산 자락에 암장한 곳으로, 오랫동안 묘의 위치조차 알 수 없다가 1541년(중종 36년) 당시 영월군수 박충원이 발견하여 묘역을 정비하였고, 이후 상석?표석?장명등?망주석 등을 세웠다.

재실(제관들이 제사를 준비하는 곳, 평상시에는 능참봉이 상주하던 곳)과 엄흥도정려각(1726년 영조의 어명으로 세운 비각으로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는 정여문), 장판옥(충신위 32인, 조사위 182인 등의 합동 위패를 모셔놓은 곳)을 차례로 지나는 길. 며칠을 내리 쏟아진 비 덕분에 나무도 풀도 흙길도 싱그러웠다. 그 길 끝에 선 홍살문은 자물쇠도 문짝도 없지만 신성한 구역으로 통하는 경계처럼 엄숙함을 풍겼다.

참도(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길) 끝 정자각이 선 기단의 구릿빛은 긴 세월 속에 얽히고설킨 무수한 사연들이 정제되고 정화된 흔적처럼 깊고 은은했다. 그 위에 모셔진 단종의 신주는 아무 말 없이 시인에게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역사엔 가정이 없다지만, 이곳에 서니 많은 생각이 드네요. 세종대왕의 태평성대를 보며 자란 단종이 왕위를 지켰다면, 수양대군이 조카의 왕위를 빼앗지 않고 단종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도록 도왔다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장릉으로 오르는 언덕길, 하늘이 훤해지며 그를 반기는 듯 때마침 매미가 울기 시작했다. 산비둘기 울음소리도 듣기 좋게 귓전을 울렸다. 산보를 하듯 천천히 다가선 장릉, 무덤으로 이어진 길목에는 단종의 넋을 호위하는 듯 소나무들이 허리를 굽히고 서 있었다. 곡장에 둘러싸여 무덤은 자못 평화로워 보였다.  

“큰 슬픔이나 아픔, 절망 같은 것이 그 반대편에 있는 큰 기쁨과 즐거움과 섞여 흘러가는 것이 역사죠. 역사는 머물러 있지 않고 살아서 현대사회 속에 대입되고 있고 현대인과 함께 존재하고 있구요. 그런 것이 문화재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단종은 이미 죽어 없고, 추모비나 사당도 단종 사후에 만든 것이지만, 그런 문화재들을 통해 우리 마음에 단종이 영원히 살아있는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죠.”

세상의 주인은 우리 인간인 것 같지만 사실은 시간이 주인이라고 나지막이 말하는 시인. 어쩌면 역사는 시간의 흔적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기쁨과 슬픔의 굴곡이 그려진 역사는 죽어있는 화석이 아니라, 지금 우리와 함께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다. 생명 그 자체다. 그리움을 남기고 장릉숲 너머 하루해가 설핏 저물고 있었다. 

글· 성혜경   사진· 엄지민

 출처:월간 문화재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