黃平雨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
지명은 일정한 지역의 명칭이다. 고대로부터 인류가 살아오면서 특정한 위치, 범위, 유형의 지리적 실체에 대하여 공동으로 약정한 고유명사이다.
한반도에 거주했던 민족들은 구릉 지형에 정착성이 강한 생활 형태를 유지했다. 정착한 곳에 삶을 전개했다. 좁게는 한 사람부터 가족, 집단, 넓게는 종족의 삶의 형태를 이루었다.
삶의 터전에 이름을 지었고, 지명은 인간들의 정착지에 대한 공동의 언어 기호라 할 수 있다. 지명은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공동 소유이기 때문에 특정지역 안에서 생활하며 창조하는 모든 문화가 그 안에 오래 남게 되며 면면히 이어나갈 수 있다.
사회적 측면에서 보면 인류 생활의 집단화 및 사회화는 지명이 발생하게 된 필연적인 조건이 된다. 지명은 사람들의 사회 활동과 생산 활동의 필연적인 산물이다. 지명이란 일정한 지역 안에서 사람들이 사회생활을 하고 사교를 하는 도구로서 중요한 사회적 표징이자 약정이기 때문이다. 지명은 어느 한 사람이나 일부 사람의 뜻에 따라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우연한 기회에 발생하는 사회적 산물이다.
언어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지명은 일종의 고유명사이다. 고유명사의 발생 요인은 하나의 사물을 다른 사물과 구별하기 위한 데 있다. 따라서 지명은 인간의 한 지점이나 지역을 다른 지점 또는 지역과 구별하기 위한 데서 발생하는 것이다. 마치 사람과 사물을 구별하기 위하여 사람마다 이름을 짓듯이, 땅도 곳곳을 구별하기 위하여 곳곳에 고유한 이름을 부여하는 원리이다.
내가 사는 고장을 다른 사람이 사는 고장과 구별하기 위하여 고유명사(地名)를 부여한 것이다. 가령 ‘하늘, 해, 달’은 모두 유일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하늘, 해, 달’은 보통명사이자 고유명사가 된다. 그러나 달은 유일하면서도 그 모양이 한 달 내내 바뀌기 때문에 모양이 다른 달과 구별하기 위하여 ‘초승달, 보름달, 반달, 그믐달’이라 부르게 된다. 그리고 별도 밤하늘에 수많이 존재하기 때문에 별마다 고유 칭호를 갖게 된다.
따라서 지명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부류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자연 지리적인 면에서 ‘대륙(육지), 바다, 산, 강, 하천, 구릉, 고원, 호수, 평원, 해협, 반도, 곶, 만, 섬……’ 등.
둘째, 인문 지리적인 면에서 ‘국가, 행정구역, 도시, 촌락, 항구, 거리, 도로, 시설물……’ 등.
셋째, 인류의 활동 영역에 따라서 ‘해저, 지하, 별나라, 우주……’ 등.
또한, 전통문화와 관련된 인근 학문과의 연관성도 매우 깊은데 첫째, 국어의 계통, 고대국어의 재구(再構), 국어의 어원, 국어 변천사 등의 연구에 지극히 귀중한 자료가 되어 준다. 둘째, 한국의 역사, 역사 지리, 민속, 민담, 신화, 전성, 제도 등 문화사 전반의 연구 자료가 되어 준다. 셋째, 우리 민족의 성립 및 이동은 물론 타민족과의 문화사적 교류 관계를 파악하는 데도 긴요한 자료가 되어 준다. 넷째, 역사학, 고고학, 지리학, 민속학, 사회학, 경제학, 설화문학 등에 대한 보조 과학이 될 수 있다. 다섯째, 지명을 접두(接頭)한 물명(産地名), 지명과 인명, 지명과 신조어 등과의 깊은 관계가 밝혀질 수 있다
지명과 지도의 관계는 손바닥과 손등만큼 가까운 사이다. 바닥과 등 어느 하나만 없어도 손이 성립될 수 없듯이, 지명과 지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지명 없이는 지도가 성립할 수 없다. 지명 또한 지도가 없다면 그 위치, 너비, 방면, 지세 등을 구체적으로 드러낼 수 없다. 언중이나 주민들이 막연하게 불러 주고 또한 막연하게 그 위치가 어느 곳이라고 인식할 뿐 그것을 일정한 위치에 구체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지도뿐이다.
가령 X란 지명의 위치가 어느 곳이며, 그 한계가 어디에서 어디까지라는 기록이 있다 하자. 이런 기록에 따라 지도 위에 그 위치와 한계를 잡아 표시하면 우리는 그 내용을 시각적으로 직감하게 된다. 따라서 지도는 지명을 구체적으로 배치하여 그 지명의 위치와 범위를 정해 주는 시각적 인식도(認識圖)라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지도는 지명과 지명 사이의 거리를 시각화한 것이다. 이렇게 지도는 개별 지명의 위치와 한계를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큰 지명 안에 배치된 더 작은 지명들의 위치와 한계를 알게도 한다.
지도는 지역을 투영하는 것이므로 지역을 표현하는 지명은 당연히 중요한 지도의 요소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지도는 지명의 기록을 수용하는 그릇(容器)이다.
한국의 지명이 지도에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고구려 영류왕 11년(628)부터인 듯하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낼 때 ‘봉역도(封域圖)’라는 고구려 지도를 보냈다는 기록이 《구당서(舊唐書)》에 나오기 때문이다. 《삼국유사》 권2 <남부여조>에도 ‘도적(圖籍)’과 ‘백제지리지’에 관한 기사가 있다. 《삼국사기》 권7 신라 문무왕 11년(671)에 ‘지도(地圖)’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 통일신라는 구주(九州)를 획정(劃定)하고 내용을 지도에 담아 <구주도(九州圖)>를 작성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고려 목종 5년(1002)에 거란에 <고려지도(高麗地圖)>를 보낸 일이 있다. 조선 태조 5년(1396)에 이첨(李詹)이 작도한 <삼국도(三國圖)>가 있고, 태종 2년(1402)에 이회(李薈)가 작성한 <팔도도(八道圖)>가 있다. 세조 9년(1463)에 양성지(梁誠之)는 정척(鄭陟)과 함께 <동국지도(東國地圖)>를 완성하였다. 지리지 안에 명도(明道·八道)의 강산(江山)과 현(縣) 단위 이상의 지명을 실은 지도(地圖)를 게재한 것은 《동국여지승람》(1481)부터이다. 그 이전의 《삼국사기》, 《고려사》, 《세종실록》 등의 지리지는 지명에 대한 기록만 남겼을 뿐 지도는 넣지 않았다. 현 단위 지명을 기재한 최초의 한국 지도는 너무나도 늦게 이루어진 셈이다.
그러나 비록 늦게나마 이지만 지도가 작성된 것은 다행한 일이다. 최초의 지도라서 그렇겠지만 《동국여지승람》의 지도는 지극히 소략한 것이었다. 이 책은 앞에다 지도를 제시하고 있다. 그 지도에 기록된 지명의 현(縣) 단위 이상의 행정구역명과 이름난 산 이름과 강 이름을 질서 있게 위치별로 명시하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 소개한다면 첫머리에 ‘팔도총도(八道總圖)’가 제시되었고, 각 도의 군현(郡縣)을 기술하기 전에 먼저 도별로 지도를 제시하고 그 지도에 기록된 군현과 그 군현에 있는 명산과 큰 강에 관한 설명을 하였다. 따라서 《동국여지승람》에 있는 최초의 지도는 ‘팔도총도’를 비롯해 각 도에 해당하는 지도 한 매씩을 합해 모두 아홉 매이다. 이 지도는 우선 강을 그리고 이름난 산을 그린 다음 그 이름을 밝히어 적었다. 그러고는 현(縣), 군(郡), 부(府), 주(州)의 위치를 찾아 배치하였다. 지극히 소박한 지도이지만 이만큼이라도 초기에 이루어졌음이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로부터 약 200여 년이 지난 후에 작성된 《여지도서(輿地圖書, 서기 1757~1765년)》에 이르면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던 지도는 더욱 구체적이고도 호화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각 도의 구성은 첫머리에 각 도의 전도(全圖·雙葉形色地圖一張)를 싣고 있으며, 개별 군지, 읍지의 내용을 싣고 있다. 그리고 그 각개의 지도에는 그 골 안에서 사용하고 있는 지명을 더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그러니까 《여지도서》는 그 책 이름 그대로 당시 전국의 도, 부, 주, 군, 읍, 현과 같은 수의 지도가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이르면 꽤 작은 지명까지 지도에 기록된다.
행정안전부는 1997년부터 준비한 도로명주소법을 2011년 7월 29일부로 시행하려다 큰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는 국민적 저항에 부딪혀 2년간 유보하기로 했다. 유보라기보다는 병기해서 사용하겠다는 것으로, 2014년부터는 전면적으로 도로명 주소를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새 도로명 주소를 추진했던 행정안전부의 논리는 국민의 생활 편의를 도모하고 물류비 절감 등 국가경쟁력 강화에 있다고 했다.
그러나 행정안전부의 논리는 모두 허구이다. 국민 생활 편의가 향상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살아온 땅이름(동, 리)을 모두 없애버림으로써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키고 있다. 또한, 물류비 절감을 구실로 택배를 예로 들었다. 한 국가의 도로명 주소를 개정하겠다면서 논리라고 내세운 것이 고작 택배비 절감이다.
토지 지번(地番)을 토대로 한 현재 주소로는 위치를 찾기 어렵다는 정부의 주장에도 동의할 수 없다. 왜냐면 우리나라는 구릉 지형이 약 70%다. 구릉지와 산악 형태 지번의 다양성과 복잡성은 촌락과 도시의 확장 역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하며, 도로명 주소는 길(도로)을 기준으로 삼아 목적지를 찾아가는 평지 지형의 국가들에게만 유리할 것이다.
일부 국가가 길을 중심으로 주소명을 부여했다고 해서 자국의 전통적 삶의 방식을 하루아침에 변경하겠다는 것은 신자유주의적 사대주의에 불과하다.
그리고 도로명 주소 작업이 시작되던 1997년에 비해 지금은 환경이 완전히 달라졌다. 물류비용을 줄여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논리를 내세웠지만, 이제는 내비게이션 덕분에 초보 택배기사도 집을 찾기 쉽다. 스마트폰 시대다 보니 누구나 위치를 찾을 수 있다.
전통적으로 한국의 지명문화는 사람이 사는 터(땅)를 중심으로 존재성과 정체성이 부여되었다. 풍수적 요인을 고려해서 지은 이름이 많고, 풍토와 특산품과 기후에 맞춰 작명하기도 했다. 또한, 미래를 예견하며 작명한 지명이나 역사적 사건에서 유래한 지명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우리 지명은 인문사회, 역사문화, 자연환경적인 문화의 소산물이다.
새로 도입되는 주소를 보면 4만여 개에 이르는 전국 각 시·군·구의 ‘동, 면, 리’ 등이 일시에 사라지게 된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듯이 이름이 사라지면 문화적 상상력도 사라진다. 자기 고향과 동네가 없어지게 됨으로써 새로 태어나는 우리 아이들은 땅의 뿌리를 잃고 ‘길에서 난 아이’가 되는 것이다.
과연 도로명 주소 사업이 문화적 뿌리까지 뽑아내고 시행할 정도로 중대한 문제인지, 막대한 돈과 행정력을 투입해야 하는 사업인지 원점에서 재고해야 하며, 도로명과 지명은 국민 정서, 역사성 등 문화적 특성을 면밀히 고려해야 한다.
2007년 정부(전 산업자원부)는 ‘평’, ‘돈’, ‘자’ 등과 같은 전통적 계량 단위를 사용하거나 홍보하면 과태료 2백만 원에서 7백만 원을 물게 하겠다고 했다. FTA 협정이 되고 나면 계량 단위를 통일해야 하고 불확실한 전통 단위 때문에 국민의 불편이 가중되고 있다는 논리였다. 미국의 마일, 미식축구의 야드, 피트, 영국의 파운드는 그대로 두면서 자국의 전통적 관습이자 인본주의에 입각한 계량 단위는 말살하려 하고 있다.
우리의 전통적 계량 단위는 문화요 전통이다. 즉 문화다양성의 일종이다. 오히려 잃어버린 우리의 시간(우리는 일본 기준 시간에 살고 있다)을 찾아야 한다. 음력을 포기하면서도 자신들의 연호를 쓰는 일본은 무엇인가?
천 년 넘게 이루어 왔던 전통의 콘텐츠를 일방통행식 관료주의가 파괴하고 있다. 지금부터라도 지역주민과 향토사학자, 역사학자, 문화전문가들에게 의견을 물어 역사문화의 진정성과 전통성을 살리면서 실리적으로 실생활에 편리한 주소를 만들기 위해 원점에서 재론해야 할 것이다.
출처:문화유산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