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백영미 기자 = "박물관에 근무하게 된 것도 굉장한 행운이지만 띠 동물을 연구한 게 더 큰 행운이지요. 민속박물관에 항상 빚을 지고 살았는데 이제 그 빚을 갚아야 할 시점이 왔습니다. 이 자리에 왔으니까 신세지고 빚진 것들을 민속박물관에 되돌려 주는 일들을 계속 해나가야죠." 국립민속박물관 천진기(49) 관장은 이 박물관 민속연구과장으로 일하다가 지난 9일 제13대 관장으로 임명됐다. 국립중앙박물관, 국립문화재연구소,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직을 두루 거친 천 관장은 열두띠 동물 민속을 전공, 매년 띠풀이를 하는 민속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논문은 한 번 쓰면 리바이벌이 자주 안 되는데 띠동물은 매년 새롭고 12년 단위로 내용을 바꾸면 새로운 논문이 되잖아요. 1988년 국립민속박물관과 인연을 맺으면서 그 해 겨울부터 띠동물과 관련된 자료를 정리하고 글을 쓰고 강연을 했어요. 자연스럽게 연말연시 띠동물에 관심을 갖게 됐고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더라구요. 굉장히 큰 행운이지요." 관장 의자가 아직은 편치 않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다면서도 의욕을 숨기자 않는다. 첫 번째가 박물관 이전이다. 경복궁 2단계 복원사업이 끝나는 2030년까지 경복궁 경내에 있는 현 국립민속박물관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
"한국을 방문하는 연간 관광객 600만~700만명 중에서 민속박물관을 찾는 사람이 약 130만명입니다.다섯명 중 한 명꼴로 우리 박물관을 다녀가는 셈이죠. 민속박물관은 외국인이 한국에 오면 꼭 와야 할 곳으로 인식할 만큼 전시 콘텐츠도 좋습니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저평가됐습니다. 60년간 제 집을 가져본 적이 없어요. 한국이 이 정도 성장했으면 이제는 전통생활 중심의 민속박물관을 되돌아 볼 때도 됐습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1966년 경복궁 수정전에서 한국민속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했다. 1975년에는 경복궁 옛 현대미술관 건물로 이전, 한국민속박물관으로 간판을 바꿔달았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으로 옮겨가면서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국격에 맞는 제 집을 지어보자, 셋방살이를 벗어나서 우리 집을 가져보자는 게 민속박물관 식구들의 큰 바람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용산 민족공원에 점을 찍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넘어야 할 산도 많겠지만 자연, 역사, 문화가 용산공원의 모토인 만큼 문화시설인 민속박물관이 결합되면 세계적인 건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국가적으로도 이익이 될 것 같아 본격적으로 주위를 설득해 나갈 생각입니다." 다양한 문화를 통합, 세계와 소통하는 박물관을 만드는 것도 목표다. 문화와 기술의 융합, 교육과 오락의 융합, 세계 문화와 지역 문화의 융합, 자연과 박물관의 융합 등이다. "박물관은 문화기관이면서 평생 교육기관이기도 합니다. 또 이제는 융합시대인 만큼 분절적으로 활동하는 것들을 합동, 결합, 융합해 종합, 총체적으로 해야 합니다. 박물관은 고리타분해서는 안 되고 재미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머물지 않고 근현대까지 확대하는 것도 숙제다. 유물 중심 전시가 아닌 위치나 상황 등 문화적 맥락을 보여주겠다는 각오다. 민속박물관이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의 대형 태극기를 유물로 보관 중인 것도 한 예다. "단순 골동품 수집이 아닌, 손때가 묻은 족보가 있는, 문화적 맥락을 가진 유물을 사라지기 전에 수집해 조사, 연구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확인가능한 문화적 맥락을 갖춘 전시가 이뤄져야 해요. 그래서 지금 시점이 참 중요합니다. 30세기 후손들이 역사를 뒤돌아 봤을 때 어느 시기 사람들이 가장 업적이 뛰어나다고 할까요? 월드컵을 치르고, G20 국가에 포함된 21세기입니다. 선조들이 꿈도 못 꿨던 세계사에 우뚝 선 시대를 민속박물관이 기록하고 조사해야 하지 않을까요?" 천 관장은 그동안 다양한 학문적 경험과 현장 실무경험을 쌓으며 업무수행의 기틀을 다져왔다. 1980년대 한국에서 유일하게 민속학과가 개설돼 있던 안동대 민속학과를 졸업한 다음 영남대, 중앙대대학원에서 민속학과 고전문학을 공부하면서 문학석사와 박사과정을 밟았다. 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5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5년간 학예연구사를 지냈다. 1999년부터는 학예연구사에서 연구관으로, 또 민속연구과장으로 국립민속박물관에 몸담아왔다.
약 100년 전 개화의 꿈을 펼치려던 한국 최초의 미국 유학생 유길준(1856~1914)의 발자취를 살펴본 '유길준과 개화의 꿈'전을 열고 무형문화재 제1호인 기와장 등을 만든 것도 천 관장 노력의 산물이다. '운명을 읽는 코드 열두동물', '한국동물민속론' 등 저술과 강의활동도 활발히 했다.
민속연구과장 5년 만에 박물관의 수장이 됐다. 일종의 수직상승이다. "초강고속 승진이라고 하는데, 하하…. 저는 민속학과 지방대학 출신입니다. 빽도 학연도 지연도 가문도 없습니다. 박물관 직원 전체가 저의 유일한 빽입니다. 그분들이 나의 빽이 돼주면서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나의 든든한 빽이 돼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민속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민속박물관의 관장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전생에 적선을 참 많이 한 것 같아요. 기획하면서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에 고맙고 감사하지요." 천 관장의 자택 화장실에는 매일 1장씩 넘길 수 있는 달력형식의 격언집이 걸려있다. 최근 '누군가 해야 할 일이면 내가 하자. 언젠가 할 일이면 지금하자'라는 문구를 읽은 후 자신의 상황과 묘하게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국립민속박물관장 천진기'의 좌우명이 될 듯하다.
"맹진할 겁니다. 민속박물관이 이전해야 할 때이기도 하고, 우리나라 문화를 중심에 놓고 타 문화도 공부해야 합니다. 과거형이 아닌 근현대형 박물관으로도 거듭나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아우르면서 모든 관원들과 맹렬하게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