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유산 답사기 입선 수상작]    
 

족제비가 일러준 배다리 건너 명당터-선교장에서

김계점


어느 사람이 “집 앞에 넙데데한 바위가 있어 거기서 심심하면 놀고 음식도 먹고 하였는데, 어느 날 스님이 지나다가 이 바위가 예사롭지 않다는 말을 듣고, 그 다음부터는 그 바위가 갑자기 위대하게 보여서 다시는 올라가지도 놀지도 못했다” 하더니 바위는 같은 것일지라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달라지는 이치처럼 우리나라의 가옥 답사기를 써야겠다고 나선 길, 그저 술렁술렁 답사를 다닐 때와는 사못 다른 느낌으로 이곳, 선교장에 다다랐다.

머릿속에 가득했던 이곳에 오려고 남쪽지방에서 어제부터 올라와 봄비에 낙화하는 꽃잎을 맞으며 하루 동안 근처 폐사지를 훑어보고 담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 바로 한걸음에 다다른 곳이 이 곳이다.

                                           활래정-여유로움의 공간
 

멀리 길게 앉은 하얀 담벼락을 바라보며 느린 걸음으로 봄볕에 이제 붉은 새순이 막돋기 시작한 연못가의 배롱나무를 옆에 끼고 여름에나 꽃피울 마른 연꽃의 봄날을 지나 활래정 입구 월화문을 들어선다. 보는 사람을 배려하여 열어둔 정자의 문을 눈길로 건너가, 이쪽에서 건너편 연못 쪽을 바라보니 연못 가운데 소나무가 세한도 한 폭을 그려놓은 듯 여유 있는 자태로 눈에 들어온다. 온돌방과 누마루, 다실로 이루어진 이곳은 연못아래 그 기둥을 내려놓고 단정하게 지어져 선교장 서쪽으로부터 흘러내려오는 活水 즉 생명수가 경포호로 흘러가기 전에 잠시 와서 머물렀다 가는 곳으로 이 집이 길지임을 증명하듯 이름도 신경 써 “활래정”이라 생동감이 넘치고 현판 글씨도 해강 김규진의 글씨답게 힘차게 살아서 움직인다. 이 정자는 이집에 터를 잡은 이내번의 손자인 오은거사에 의해 지어졌는데 그의 座右銘이 “평생 눈썹 찌푸리는 일을 하지 않으면 세상에서 응당 이빨 가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하였으니 그 인생관처럼 여유로운 공간이다.

                      
                                          활래정의 열린 문사이로....  
 

활래정을 지나 흙길을 걸어가며 저 앞을 바라보니 너른 저편에 그 옛날 선교장의 밥을 같이 나누며 살았던 사람들이 살았던 터에 몇 채의 기와집이 눈에 띈다. 저 곳은 예전과 달리 우리 문화체험공간으로 꾸며져서 동쪽을 향해 앉아있다. 선교장의 밥을 나누어 먹으며 살던 마을 사람들은 얼마만한 규모였을까? 자못 궁금하다. 그만큼 그 많은 사람이 이 선교장을 드나들면서 먹고 살았으니, 재물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이는 것도 하나의 이치이지만, 재물이 있다하여도 인심이 없으면 사람이 모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터, 선교장 주인의 넉넉한 인심을 느껴서일까? 선교장 바깥 세상의 풍경이 더 따사롭게 와 닿는다.
 

선교장은 고개를 서쪽으로 약간 돌린 남향이어서 봄날 아침에 따사로운 햇살이 행랑채 쪽으로, 바라보는 사람의 위치에서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그늘과 햇살을 반반씩 보여주며 우리나라의 최고의 가옥답게 점잖고 여유롭게 앉았다.

행랑채에 다다라서 먼저 동편 쪽으로 발길을 하니, 외별당이라 이름하는 공간이 있고, 지금 후손이 거주하고 있어 외부인 출입금지로 막아두었는데 마루에는 이쁜 꽃이 놓여있어 비록 출입금지이지만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배려한 맘이 느껴지는데 그 옛날엔 이 공간은 출가한 맏아들과 손자, 출가하지 않은 아들의 공간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선교장 솟을대문의 현판-선교유거
 

외별당 문간에서 서쪽으로 발걸음을 옮겨놓으니 길다란 행랑채가 가로막고, 대문이 두 곳으로 나있다. 마치 미로를 들어가기 전에 고민하듯, 어디로 갈까? 그러나 갈등도 잠시, 군자는 대로행이라고 우선 더 커 보이는 문, 솟을 대문을 들어서본다. 대문입구 현판에는 선교유거라 쓰여 있어 그 뜻을 새겨보니 한량없이 깊다.

대문을 들어서니 활짝 문을 열어젖혀둔 행랑에 눈길이 먼저 올려진다. 열어놓은 방문의 수를 세어보니 아홉 개, 밖에서 세어본 창문은 열 두개다. 길다란 행랑을 왼편에 두고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리니 선교장의 사랑채가 그 모습을 드러내는데, 보통의 집에서는 문을 들어서면 사랑채가 정면으로 보이는데, 약간 꺽여 들어가 앉은 모습이 구조면에서 보기 드문 형태이다.

사랑채에서 먼저 눈 맞춤한 것은 색 바랜 옥빛 지붕, 베이지색 기둥 파스텔조의 현대식 테라스 즉, 사랑채끝의 외부 공간, 차양막이다. 테라스형식으로 앞부분도 보아지가 달려 모양을 낸 이것은 어디서 봤드라? 생각해보니 덕수궁 정관헌의 앞쪽부분과 닮았다. 궁궐의 그것과 닮아있고, 러시아 공사관에서 차양을 해줄 정도의 집이라면, 그 권세도 당시의 최고가 아니었을까? 굳이 알아보지 않아도 집주인이 상당히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을 것이라 애둘러 짐작할 수 있다.

사랑채는 상류층의 주택임을 자랑하듯 단을 세벌대로 쌓아올리고 마루 끝에는 길상의 표시인 卍 자를 새겨 넣은 완자교란을 설치하여 마루하나에도 한껏 멋을 부렸고 기역자로 꺽인 누마루로 연결하여 정자를 사랑채로 끌여 들였다.

 
                                            선교장의 사랑채-열화당
 

사랑채의 이름은 열화당, 모두 모여 이곳에서 정담과 기쁨을 함께 나누자는 이름이니, 이름 하나 하나도 소홀함 없는 가화만사성을 표본이다. 정담을 나누었다는 이야기는 가족 개개인의 의사를 존중하는 열린 가족회의의 의미로 나름 재해석해본다.

한걸음, 두걸음 돌계단을 올라 사랑채 입구에 서본다, 거기서 마당을 내려다보니 시원하게 시선이 꽂히는 서쪽 방향에 중사랑이 있고 행랑이 마주 보이게 되어있다.

사랑채 서편으로 중사랑은 바깥어른의 손님의 자격으로 온 사람들이 묵어가는 공간으로 방이 다섯 개이니 드나드는 손님도 많았을 터, 선교장의 중심적인 교류공간이 아니었을까?

사랑채를 내려서면서 마당을 보니 나무가 중간에 크고 있었는데, 그 옛날엔 마당에 나무를 심으면 네모난 口 에다가 나무 木을 심으면 빈곤할 困 이라 하여 나무를 심지 않았다하는데, 마당 자체가 사각구조를 가지지 않고, 넉넉한 집터에 재물이 넘쳐난 공간이어서 나무하나에 연연할 이유가 없지 않아 여유를 부릴 수 있었을까? 크기로 보아 최근에 심어진 듯 느껴지기도 하다.

사랑채를 나와서 별당의 공간으로 들어선다.

보통은 사랑채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문이 연결이 되어 있지만, 선교장에는 중간에 또 다른 건물-별당이 끼여 있고 그 다음에 안채가 있어서 정면에서 보면 맨 끝 쪽 왼편이 안채, 중간은 바깥주인의 별당, 그리고 사랑채가 오른편에 있다.

별당은 이름이 각각 서별당, 동별당, 연지당이며, 올라서보니 이 집에서 이 쪽이 사랑채보다 높고 안채보다는 낮은 공간인 것 같다. 이 공간을 둘러보니 서별당을 안쪽으로 두고 오른쪽은 동별당 앞쪽에 니은자로 앉은 연지당 이렇게 세 개의 건물이 받재 마당을 사이에 두고 둘러 앉아있다. 받재 마당은 이름이 주는 의미 그대로 곡식이나 금전을 받아들이던 곳이며, 받재 마당 가장 앞쪽에 앉은 연지당은 사랑채와 뒤쪽을 면하여 앉아 집안 살림을 돕던 여인들의 거처이고 서별당은 공부방으로 사용되거나 할머니가 거주하는 공간으로 사용되었으며, 동편에는 동별당이 자리하여 집안에 잔치를 하거나 손님을 치를 때 사용하던 또 하나의 선교장의 손님접대공간이니 이집은 드나드는 객의 수가 집에 거하는 식구보다 많았을 것이란 생각, 또 별당의 마당인 받재 마당 역시 바른 네모는 아니어서 이 집은 자로 잰 듯 반듯함 보다는 유연한 사고가 집을 짓는데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추측해본다.

동별당 동쪽으로 안채가 있는데 바로 통하는 문은 역시 막혔으니 밖으로 나와 하나의 사잇문을 지나고, 또 위로 사잇문을 지나 계단을 몇 개 올라 안주인의 거처 안채에 다다랐다.

안채는 그야말로 안채였다. 아래로 나가면 아들들이 거처하던 외별당이 가로막히고, 대문을 두개 빠져나가 동.서별당 공간 앞을 지나야 비로소 바깥세상을 접할 수 있다. 예전 여인들이 쉽사리 바깥 출입을 하지 않으니 불편함이야 그리 없었겠지만, 요즘의 사고로 본다면 답답할 것이란 생각도 든다. 그러나 모든 것은 마음먹기 나름, 오히려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안채 앞뜰을 둘러보고 뒤편 후원으로 들어서니 소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싸인 산 아래 돌담이 보이고 비스듬한 동산에는 간간히 찾아드는 새들과 나지막이 민들레와 애기똥풀이 피어 노오란 질투심을 일으키니 가만히 안채의 뒤뜰 툇마루에 앉아서 이 문중과 상관없는 사람이지만 그의 일원이 되어 머물러 젖어본다.

안채는 앞쪽보다 뒤쪽에 더 신경을 쓴 듯 창문을 하나 달아도 율동감이 느껴졌다. 하나는 위로, 또 하나는 아래로 심심하지 않게 달았으며, 열린 부엌을 들여다보니 아궁이에 걸린 커다란 무쇠 솥이 세 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많은 식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잠시 머문 안채 후원을 돌아 나오며 후원동쪽을 보니, 돌계단 몇 개 올라야할 곳에 꽃 분홍 철쭉이 만발한 사이로 반쯤 몸을 드러내어 마치 일부러 반을 숨겨놓은 듯이 이씨가문의 사당이 앉아있다. 지금 피어있는 철쭉과 모란은 사당에 있는 조상신의 기분도 좋아지고. 살아있는 우리들도 좋아지게 하니 봄날의 꽃 잔치는 이 집의 가장 은밀한 곳에서 가장 화려하게 펼쳐진다.

 
                                        작약이 어우러진 선교장 전경 

안채를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사랑채 쪽으로 다시 발길을 한 이유는 안채의 후원이 맘에 들다보니 사랑채 후원도 뭔가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다시 발길을 하였는데 최근에 지어진 듯 후원에는 돌담을 쌓아올려 그 위에 초가 초당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왕 누릴 거 멋과 풍류를 다 누리자는 듯 노오란 볏집을 머리에 이고 소담스레 앉아있어 걸음하지 않았다면 후회할 길이다. 여기 초당을 보면서 박경리님의 소설속의 초당이 떠오른다. 그 초당은 대나무 숲 깊은 곳에 자리하였는데, 여기는 사랑채에서 바로 후원 뜰에 서면 오를 수 있으니 소설 속에 만난 초당은 생활공간과 동떨어져서 단순히 사색하고 구상하는 공간, 이런 식으로 본다면, 이 곳의 초당은 사랑채에서 그저 바깥바람 쐬다가 저 곳으로 차를 날라 오라고 할 수 있는 그야말로 생활과 사색이 한꺼번에 이뤄질 수 있게 접하고 있으니 더 풍요로운 삶이 연출되지 않을까?

이제 나오는 길, 처음 내딛었던 느린 발걸음으로 반대편으로 발길을 돌린다. 멀리서 바라본 하얀 담벼락과 바라보는 이곳에 핀 작약이 하얀 도화지에 빨간 꽃그림을 그려놓은 듯 아름다이 물들어 사랑스럽다.

선교장, 이 곳은 사람이 잘 살 수 있게 배려하고 다른 사람 눈에도 멋지게 보이는 곳, 두 가지를 충족된 명당에 앉은 명품 집이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최고의 전통가옥으로 칭송받았으니 후손 대대로 잘 지켜내길 바란다. 먼 훗날 손자 녀석의 손을 잡고 여기서서, 조선시대에 이런 명문의 가문이 있었고, 또 그리 집을 지켜왔고,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라고 이야기하면서 내 이야기도 들려주고 싶다. 할머니가 어느 봄날 작약이 담벼락에 그림을 그리고, 철쭉이 만발할 때 여기 다녀갔다고......

국가지정 중요 민속자료 제5호-선교장, 그 옛날 경포호수 저편에서 배로 다리를 만드니 선상의 다리로 걸어와 명문 풍류객의 발길이 스쳐지나간 곳, 이 곳에 시간 내어 들리니 오늘은 내가 이 집의 객이 되어 스쳐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