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과 설움을 치유해 준 조선백자 항아리

1918년 경북 예천군 풍양면 우망리에서 태어난 정조문 선생은 그의 나이 6세 때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와 가족 모두가 일본 교토에 정착했다. 매 끼니를 걱정해야 할 만큼 경제적으로 궁핍했고 소학교 졸업식 대표로 단상에 올랐음에도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에 가는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이후 거주지를 교토에서 오사카로 옮기고 살던 정조 문 선생은 강제징용으로 도쿄 군수물자 공장에서 일하다 1945년 3월 10일, 전쟁의 조기 종결을 위해 미군이 도쿄와 그 주변 일대에 대량의 소이탄을 투하한 도쿄 대공습을 겪고 다시 오사카로 돌아왔다.

전쟁이 끝난 후 아버지는 조국 재건을 위해 정조문 선생의 새어머니와 이복동생을 데리고 한국으로 먼저 귀국했다. 청년 정조문 선생은 형 정귀문과 함께 아버지의 부름을 기다렸지만, 대구 10·1 사건에 휘말려 돌아가셨다는 부친의 부고를 듣고 결국 귀국을 포기한다.

이후 교토에서 파친코 사업을 시작하며 성공 가도를 달리던 정조문 선생은 1951년, 운명처럼 고미술 상점에 전시된 조선백자 항아리를 만나게 된다. 첫눈에 반한 항아리의 가격은 50만 엔, 현재 한화로 480만 원이 넘는 고가였다. 선생은 너무나 갖고 싶던 마음에 할부로 항아리를 구입하는 데 훗날 그는 이 순간을 “조센진이라 멸시받던 그간의 아픔과 설움을 치유받았다”라고 회상했다. 이후 선생은 일본인들에게 귀하게 여겨지던 조국의 문화재를 하나하나 수집했고, 조국의 문화재로부터 상처를 치유받았던 자신처럼 동포들에게도 조선의 자랑스러움을 보여주고 싶었다.

선생의 꿈과 바람을 담은 교토 고려미술관

이 같은 선생의 마음은 1988년 10월 25일, 교토에 ‘고려미술관’ 건립으로 이어졌다. 해외에서 유일하게 한국문화재만을 전시하고 있는 고려미술관은 고려청자부터 조선백자와 토기, 고고 자료와 회화, 민속자료 등 국보급 문화재를 포함해 1,700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고려미술관은 매년 1~2회씩 특별전을 개최하고 다양한 교육활동도 펼치는 등 일본 교토에서 한국문화재를 소개하고 자연스럽게 한국문화를 즐길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재일동포 후세들의 교육에도 관심이 많았던 정조문 선생은 교토 조선학교 건립에도 앞장서는 등 여러 방면으로 지원했다. 또한 일본과 한국의 유명 지식인들과 교류하면서 잡지 『일본 속의 조선문화』를 창간하며 한국의 고대문화를 알리고 왜곡된 한국문화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다. 이 같은 선생의 노력으로 이후 재일동포와 일본인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문화답사단이 꾸려지기도 했다.

“재일교포 3세, 4세가 태어나고 있습니다. 여기에 놀러 와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이런 도구를 써서 생활했다는 것을 보았으면 합니다. 책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직접 보여주고 싶습니다.” - 1988년 정조문 선생의 NHK 방송 인터뷰 내용 중 -

해외 소재 한국문화재와 문화재 환수에 대한 관심은 1990년대부터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그간 정부의 외교적 노력으로 중요한 문화재를 국내로 환수한 성과도 여럿 있었고, 2000년대부터 시민사회와 종교기관, 지방정부 등도 환수에 앞장서며 크고 작은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해외에 소재하는 우리 문화재는 현지에서 다양하게 활용되며 한국문화를 알리는 길잡이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정조문 선생이 세운 고려미술관도 일본 현지에서 지금처럼 꿋꿋하게 그 자리를 지키며 선생이 꿈꿨던 것처럼 한국문화의 메카로 거듭나길 바란다.

글, 사진. 신정아(사단법인 한국국외문화재연구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