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로운 푸른빛에 휩싸인 ‘엄마’

여러 해 전 일이다. 그날도 사사건건 제대로 되는 일 하나 없는 힘겨운 일상에 잠 못 이루고 뒤척이다가 불면이 안겨준 피로감에 기절 하듯 겨우 잠들었던 것 같다.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누군가 익숙한 시선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세상을 향해 온갖 불평불만을 늘어놓던 나는 자꾸 의식되는 누군가의 시선 쪽을 바라보았다. 연화대에 걸터앉아 오른쪽 다리를 왼쪽 허벅다리 위에 수평으로 얹고 오른손을 받쳐 뺨에 댄 채 생각에 잠긴 희미한 그 모습은 국보 금동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었다.

자세히 보니 눈에 익은 금동미륵보살보다 더 자애롭고 친근한 웃음을 머금은 그 반가사유상은 신비로운 푸른빛에 휩싸인 ‘엄마’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고요히 웃으며 바라보는 ‘엄마 반가사유상’ 앞에 엎드려 오래 울었다. 울다가 스스로 그 울음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자고 일어났을뿐 아무 것도 달라진게 없었는데 기이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꿈속의 ‘엄마 반가사유상’이 건네준 미소와 그 앞에 엎드렸던 오열의 ‘정화 (淨化)’ 작용일까. 그때까지 머릿속을 횡행하던 모든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시를 한 편 썼고 그 시는 나의 두 번째 시집의 제목이 되었다. 『엄마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이다. 오랫동안 ‘비움’의 참뜻을 잘못 알고 살았다. 누군가 내게 ‘비우라’고 하면 ‘지금도 가진 것 하나 없는 빈 그릇인데 뭘 더 비우라는 말이냐?’라며 반발했었다. 물질이 아닌 욕망으로 마음을 채우고 살았다.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탐진치(貪瞋癡)’, 과도한 ‘탐욕’과 불특정 대상을 향한 ‘노여움’과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끝없이 일으키는 욕망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고 괴로워했다.

투명한 평안을 가져다준 ‘엄마의 미소’

꿈에 본 ‘엄마 반가사유상’의 미소는 나를 오랫동안 잊었던 어린 시절로 데려갔다. 아득 한 유년기에는 자주 엄마 손에 이끌려 절에 다녔는데 엄마는 보살님들의 방에 나를 재운 뒤 새벽 불공을 드리러 법당으로 건너가 셨다. 어렴풋이 잠에서 깬 아이 눈에 비친 작은 들창 너머 푸른 새벽하늘, 바람에 흔들리는 검은 나뭇가지들, 법당 추녀 끝의 풍경 소리, 가까이 다가왔다 멀어지는 목탁 소리, 큰 스님 독경 소리……. 손에 잡히지 않는, 가질 수 없는, 그럴 필요조차 없는 모든 사물과 소리가 아름다웠다. 어쩌면 그때 아이가 느낀 그 아늑한 기쁨은 수 행자들의 법열(法悅)과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꿈에 본 ‘엄마 반가사유상’의 미소는 그때 어렴풋이 깨었다가 다시 잠든 아이의 입가에 걸린 작은 웃음과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마음을 텅 비운 어린아이 같은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웃음. 모든 욕망을 내려놓게 하는 ‘방하착(放 下着)’의 미소다.

힘겨운 일상에 마음이 어지러워지면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을 찾아보라 권하고 싶다. 그곳에 가면 다르되 같은, 은은한 웃음을 머금은 두 국보 반가사유상이 반겨준다. 누구에게나 무차별한 넉넉한 ‘비움’의 미소는 그 동안 잊고 지냈던 마음의 평화를 안겨줄 것 이다.

손종수 시인
1999년 일간스포츠 바둑 관전 기자로 시작해 2010년 월간 『바둑』 편집장, 2015년 중앙일보 객원기자를 거쳐 세계사이버기원 상무로 재직했다. 2014년 『시와 경계』 가을호 신인상으로 데뷔했으며 2017년 출간한 첫 시집 『밥이 예수다』가 세종도서 문학나눔에 선정되었다. 2019년 시집 『엄마 반가사유상』을 출간했다.

글. 손종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