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의 첫 백의종군

때는 1587년. 국토의 최북단 국경의 섬 녹둔도(鹿屯島)의 수비대장이었던 이순신은 섬에 침입한 여진족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 싸움에서 장수와 병사들이 죽고 이순신 자신도 크게 다친다. 그런데 그 당시 함경도 지역 군대 총사령관이었던 북병사(北兵使) 이일은 이 전투에서 졌다는 이유로 이순신을 잡아다 가두고 조정에 징계 여부를 물었다. 이에 선조 임금은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이경록과 이순신 등을 잡아 올 것에 대한 비변사의 공사를 입계하자, 전교하였다.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병사로 하여금 장형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종군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 - 『선조실록』 21권, 선조 20년 10월 16일 신미 첫 번째 기사

잘 알려지지 않은 이순신의 첫 백의종군이다. 그 당시 나이 마흔셋. 이 녹둔도 전투는 이순신의 생애에서 중요한 변곡점이었다. 이순신이란 지휘관의 존재를 국가가 처음으로 ‘인지’하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이순신을 모르는 한국인이 없지만, 그 당시 이순신은 변방의 하급 무관에 불과했다. 만약 임금이 녹둔도 전투를 패배로 규정했다면 이후 이순신의 운명은 어찌 됐을까. 5년 뒤에 조선을 불바다로 몰아넣은 참혹한 왜란을 생각하면 소름이 돋는다.

이순신 장군의 용맹과 기개 엿보인 녹둔도 전투

《북관유적도첩》은 고려 예종 때부터 조선 선조 때까지 북관, 즉 지금의 함경도 지방에서 용맹과 기개를 떨친 장수들의 업적을 묘사한 그림 여덟 폭을 글과 함께 모아 묶은 화첩이다. 이 책에 일곱 번째로 등장하는 그림이 바로 이순신의 녹둔도 전투를 묘사한 〈수책거적(守柵拒敵)〉이다. 목책을 지키며 적을 막아냈다는 뜻이다. 선조는 녹둔도 전투를 패전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더구나 왜란을 거치면서 이순신은 국가로부터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공식 추앙된다. 그래서 이 그림이 그려지고 오늘날까지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정부 주도로 그림이 그려졌다는 사실은 후대에 이순신의 녹둔도 전투가 ‘승전’ 또는 그에 필적하는 업적으로 평가됐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김탁환 작가가 역사소설 《불멸의 이순신》을 바로 이 녹둔도 전투에 관한 상세한 묘사로 시작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를 기념하는 비석이 1762년(영조 38년) 이순신 장군이 근무하던 곳에 세워졌다. 처음엔 주민들이 기념탑을 세우고 가까운 봉우리를 승전봉이라 불렀는데, 이순신의 5대손인 이관상이 관북절도사로 부임해 탑을 없애고 그 자리에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위치는 현재의 함경북도 나선시 조산리. 북한 쪽 기록을 보면, 지금 남아 있는 비석은 1882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조선 후기 문신 박래겸이 북평사로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에서 체험한 일을 적은 『북막일기』에 바로 이 승전비를 직접봤다는 기록이 나온다.

성문 밖에는 이충무공의 승전비가 있었다. 대개 충무공이 조산만호로서 일찍이 여기서 번호(蕃胡)를 깨뜨렸으므로 그 후손인 이관상이 북병사로서 비를 세웠고 판서 조명정이 음기(陰記)를 지었다.

비석을 본 사람이야 더 있었겠지만, 직접 봤다는 조선시대 기록은 더 찾기가 어렵다. 워낙 변방 중의 변방이었으니까. 세월이 흘러 일제강점기에 비석의 실물이 비로소 사진에 담기게 되는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사진을 찍은 건 일본인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유리건판 사진은 넉 점이다. 비석 앞면에는 승전대(勝戰臺) 세 글자가 적혀 있고, 뒷면에는 비석을 세운 내력 등을 자세히 소개한 글이 새겨졌다.

비석 글씨와 원문과 해석은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portal.nrich.go.kr)에서 볼 수 있는데, 요약하면 이순신 장군이 변방의 오랑캐를 물리친 업적을 기려 비석을 만들어 세웠다는 내용이다. 북한은 이 비석을 중요한 문화재로 지정해 보존하고 있다. 녹둔도 전투 이듬해인 1588년 이순신은 여진족 마을인 시전부락 토벌에 참전해 공을 세운다. 직함은 우화열장(右火烈將), 즉 우측 화기 부대의 대장이었다. 그 당시 조선군이 사용한 화약 무기는 승자총통이다. 원거리에서 적을 타격할 수 있는 화약 무기를 실전에서 운용해 본 이 경험은 훗날 이순신의 해상 전투에서 빛을 발한다.

위대한 영웅의 기록, 남쪽 바다에 세워져

한반도의 남쪽 끝 여수에 서 있는 또 다른 비석, 여수 통제이공 수군대첩비(보물)는 풍전등화와도 같았던 조선의 운명을 구한 이순신의 찬란한 업적을 기리는 유물이다. 비석을 보고 있노라면 실로 깊은 상념에 젖게 된다. 녹둔도에서 여수까지, 조선 반도의 끝에서 끝으로 내달린 한 위대했던 장수의 삶. 두 번째 백의종군을 굳은 침묵으로 감내하며 가진 배라곤 열세 척뿐인 압도적 열세를 우세로 바꿔낸 영웅의 마지막 날들.

이순신이 남긴 업적의 크기만큼이나 비석의 규모도 역대 최대이다. 그런데 이 비석은 하마터면 감쪽같이 사라져버릴 뻔했다. 일제가 1942년 해남 명량대첩비(보물)와 함께 서울로 운반한 이후 행방이 묘연했다가, 광복 이후 해남 지역 유지들이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경복궁 근정전 앞뜰 땅속에서 극적으로 찾아내 지금의 자리에 다시 세웠다. 일제로서는 지우고 싶은 치욕의 흔적이었을 것이다. 비석이 온전하게 남아있었던 건 기적이라 할 수밖에 없다.

무명 시절의 전공을 기리는 ‘이충무공 승전대비’와 구국의 영웅에게 바쳐진 ‘여수 통제이공 수군대첩비’. 수난의 역사를 웅변하는 두 비석 사이에 놓인 거리는 지금, 한없이 멀기만 하다. 2020년 서울시는 북한, 러시아와 함께 북방 지역에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순신 장군의 유적을 발굴하기로 발표했다. 코로나19 사태로 당장은 상황이 여의치 않겠지만, 잘만 된다면 남북 간 교류와 협력의 물꼬를 트는 실마리가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글. 김석(KBS 기자)

출처:월간 문화재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