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부의 딜레마

조선시대는 강력한 힘을 가진 왕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왕권사회였다. 이러한 권력을 움직이는 이들은 양반이었는데 ‘사대부’로 불렸다. 사대부는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세상에 나아가 높은 벼슬에 올라 권력을 갖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본래 권력은 나누어 가질 수 없는 속성이 있어, 학연과 지연에 얽힌 사대부는 권력을 향해 대립과 갈등을 일으키며 늘 피바람을 몰고 다녔다. 당색(黨色)에 따라 벌어진 붕당정치는 조선시대 500여 년 동안 지속되었고, 사대부는 권력에서 벗어나 그늘로 밀려나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는 권세와 몰락의 시기를 반복해서 바꾸는 심술을 부렸다.

그래서 사대부는 세상에 나가 강한 권력을 얻는 출세를 꿈꾸었지만, 한편으론 벼슬을 마치고 물러나게 되면 속세를 떠나 처사(處士)가 되어 자연 속에 묻혀 살기를 바랐다. 현실에서는 어쩔 수 없이 출세를 꿈꾸는 유교주의자로 살았지만, 물러나서는 자연에 묻혀 신선처럼 사는 도교주의자가 되고자 한 것이었다. 이러한 소극적인 모습은 ‘현실 도피’라는 이유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자연으로 돌아가 살면서 이상향을 꿈꾸는 은일(隱逸)사상으로 우러러보기도 했다.

태도가 곧 그림이 되다

조선시대 회화에는 이러한 사대부의 ‘삶의 태도’가 반영되어 있는 부분이 많다. 특히 남종화로 불리는 화풍은 그 당시 양반 사고방식의 집약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계회도(契會圖), 심매도(尋梅圖),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 도석인물도(道釋人物圖) 등은 세상사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 묻혀 평안히 살기를 꿈꾸는 양반들의 사상을 담고 있다. 작품의 주인공으로는 중국의 허유와 소부, 죽림칠현과 도연명, 강태공이나 엄자능 같은 자연에 귀의해 산 전설적인 인물이 많이 등장했다.

조선시대 양반의 자연친화 사상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으로 인재 강희안의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를 들 수 있다. 시·서·화에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로 불린 강희안은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많은 벼슬을 거치며 성공적인 관료로 활약한 대표적인 문인이다. 1462년에는 사은부사로서 명나라에 파견되어 중국의 선진문물을 접했던 앞선 지식인이기도 하였다. 그의 글과 그림은 모두 격조가 높아 선비로서의 품격을 보여준다. 특히 대표작으로 꼽히는 [고사관수도]는 중국의 절파(浙派) 화풍을 바탕으로 그린 남종문인화의 표본이라 할 만한 솜씨를 보인다. 완결된 구성에 자연스러운 붓놀림, 자연스러운 인물 묘사와 옷 주름의 표현은 고수의 손길임을 보여준다.

[고사관수도]는 손바닥 크기만 한 아주 작은 그림이다. 가파른 절벽 밑으로 흐르는 물 위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한 선비가 엎드려 물을 바라보며 유유자적하는 모습을 그렸다. 넓은 소매가 있는 도포를 입고, 두 손을 모아 바위 위에 올려 두고, 그 위에 얼굴을 기댄 채 편안하게 앉아 있다. 그림 제목에서는 물을 바라보고 있다고 했지만 오히려 자연에 취해 속세를 잊고 잠시 졸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흐르는 물소리만이 선비의 마음과 호흡하여 고요한 정적을 만들고 있다. 이는 마치 세상사를 외면하며 귀를 씻는 허유, 소부이며 자연 속에 묻혀 사는 도연명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림의 솜씨가 얼마나 자연스럽고 조화로운지, 화면은 작지만 큰 그림처럼 보인다. 선비의 그림이라 높이 칭송하지만 높은 경지에 이른 전문 화가의 손이 아니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능숙함이 엿보인다.

[고사관수도]에 나타난 선비의 여유로운 모습은 조선 후기에 유행한 관수도(觀水圖), 관폭도(觀瀑圖) 계열의 작품에도 자주 등장한다. 모두 권력과 이익으로 얽힌 고통스러운 속세와 단절하고 이상향을 찾으려는 모습이다. 현실의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초월적인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조선시대 선비의 이상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현대에도 경쟁으로 가득 찬 각박한 현실에 염증을 느끼고, 도시를 떠나 자연에 몸을 맡기는 꿈을 꾸는 사람이 늘고 있다. 이른바 ‘자연인’으로 불리는 이들의 모습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이상향 추구와 다르지 않다. 결국 어떤 세상이든지 물질적 소유보다는 정신적 여유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고사관수도]가 보여주는 ‘쉼’의 미학은 자연과 인간이 하나 되는 순간임을 새삼 느끼게 한다.

글. 황정수(황정수 미술연구소 대표, 미술평론가)

출처:월간 문화재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