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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현대와 견줄 만한 조선 국왕의 민주적 민원 해결
글쓴이 문화재방송.한국 등록일 [2021.02.15]

현대와 견줄 만한 조선 국왕의 민주적 민원 해결 민주정치는 여론의 정치라 할 수 있다. ‘민심(民心)은 곧 천심(天心)이다’는 말은 여론정치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민주정치란 민주적 절차로 선출된 지도자가 국민들의 여론을 잘 듣고 참고하여 정책을 결정하며, 공무원이 이를 실행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따라서 참다운 민주정치가 이뤄지려면 올바른 여론이 형성되어야 한다. 조선의 국왕들은 백성의 소리를 제대로 듣고 직접 나서서 백성민원을 처리하는 적극적인 애민정책을 펼쳤다. 현대의 민주적인 방식에 못지않은 정책으로 백성과 소통하는 진취적인 성군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민주정치를 지탱하는 여론정치와 민원 해결

올바른 여론은 어떻게 형성될까? 이를 위해서는 국민에게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가 전달되고, 정보에 대한 정확한 해설과 자유롭고 책임 있는 비판이 이뤄지며, 모든 국민이 사회 전체의 복리와 이익을 고려하여 판단하는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오늘날 여론조사 기관이 계속해서 조사 결과를 알리는 것은 국민들의 의사를 파악하여 전달하려는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민원이란 국민이나 주민이 행정 기관에 원하는 바를 요구하는 일이다. 살다가 보면 어떤 일을 합법적으로 처리하려고 행정 기관을 찾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행정 기관에서 제때에 맞게 처리하지 못하면 생활에 큰 불편이 생기고, 민원 처리가 계속 늦어지면 행정기관을 원망하는 민원이 쌓이고 결국은 국가의 존립을 위협할 수도 있다.


현재 대한민국 정부는 ‘국민신문고’를 설치하여 민원신청과 부패신고를 받고 있다. 이는 국민권익위원회에서 주관하며, 민원인은 컴퓨터를 통하여 민원을 신청하고 처리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행정업무의 처리와 관련한 민원 사항은 ‘민원24’라는 포털 사이트를 통해 해결할 수도 있다.

01.영조가 청계천 준천과 관련해 백성에게 사업을 설명하고 노역을 당부한 희정당 ⓒ문화재청

조선의 왕들이 백성들의 의견을 물은 순문

순문은 국왕이 아랫사람의 의견을 직접 확인하는 것으로 주로 중앙 관리를 대상으로 하였다. 그런데 영조는 순문의 대상을 지방관과 백성으로까지 확대하고,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안을 결정할 때에는 백성들을 만나 의견을 들었다. 영조의 순문은 백성에게 자신의 입장을 소개하고 백성들의 의견을 직접 들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여론정치를 펼쳤다. 이보다 앞서 세종은 토지세인 공법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여론을 파악하기 위해 18만 명의 사람에게 설문조사를 했다. 그러나 세종은 백성들을 직접 만나 의견을 듣지는 않았다.


영조는 능행길에 백성들에게 농사의 풍흉을 물었고, 경기도의 지방관을 부를 때 현지 백성을 동행하게 하여 농사 형편이나 어려운 점을 물었다. 영조는 한양 백성이나 한양에 올라온 지방민을 불러와 의견을 들었고, 집권 후반기에는 거의 정기적으로 한양 백성을 불러들였다. 영조가 백성들에게 순문한 장소도 변화가 있었다. 즉위 초에는 행차한 현지, 궁궐 전각이나 뜰에서 만났지만 나중에는 주로 궁궐의 정문이나 중문을 이용하였다. 국왕이 백성들이 있는 쪽으로 더 다가간 것이다.


영조는 주요 정책을 결정할 때 순문으로 백성들의 여론을 확인했다. 영조는 균역법을 제정할 때 세 차례나 궁궐 문에 나가서 순문했다. 1750년(영조 26) 5월에 영조는 창경궁 홍화문에서 백성들을 만나 양역의 폐단을 말하고 호포와 결포의 장단점을 물었다. 대부분 호포가 편리하다고 하였고, 몇 사람만 결포가 편리하다고 답하였다. 두 달 후에 영조는 다시 홍화문에 나가서 성균관 유생 80여 명과 백성들을 만났다. 영조는 호포를 호전으로 바꾸고, 유생에게도 호전을 부과할 계획이라고 말한 후 답변을 들었다.


이날 유생들은 호전을 반대했지만 백성들은 더 편리하다고 대답했다. 두 차례 순문한 결과 양역으로 부담하던 포 2필을 1필로 감면하는 방안이 채택되었다. 1년 후 영조는 창경궁 명정문에서 지방 유생과 서리, 군인들을 소집하여 결전에 대한 찬반 의견을 물었다. 지방 유생은 결전을 반대했지만 향리와 향군은 이를 찬성했다. 이로써 양역의 반감으로 인한 부족분은 결전을 징수하는 것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영조는 청계천의 준천 사업을 벌일 때에도 백성들의 의사를 들었다. 준천 논의가 시작될 때 영조는 광통교에 가마를 멈추고 서울 시민들에게 준천 공사의 필요성을 물었다. 이들은 모두 준천 사업이 필요하다고 대답하였다. 수년 후 영조는 청계천 주변의 거주민들을 창경궁 숭문당으로 불러와 청계천 준설의 필요성을 들었고, 현 상태로 3~4년을 더 버틸 수 있는지 물었다. 준천 사업은 1759년 10월에 시작되었다. 이때 영조는 희정당에서 한양 백성을 만나 준천이 큰일이지만 백성을 위한 것임을 강조하고, 백성들이 자원하여 참여해 줄 것과 강제노역을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또한 상번군을 만나 자원하지 않는 사람은 준천 공사에서 빼주겠다고 알리고, 상번군들의 동참으로 준천 공사에 최초로 군인들이 투입되었다. 정조도 경기도 백성을 만나 농사 형편을 묻고 생활의 어려움을 청취하는 순문을 계속하였다. 정조의 순문은 경기도 일대를 능행하며 현지에서 백성들을 만나는 방식으로 영조처럼 궁궐 안이나 궁문 앞에서 행하지는 않았다.

02.김홍도의 거리의 판결, <행려풍속도병> ⓒ국립중앙박물관 03.백성의 요구를 담아 관리가 나라에 올린 상소문 ⓒ국립공주박물관 04.억울함을 호소하며 나라에 올린 상언 ⓒ국립중앙박물관

백성의 민원을 해결하는 신문고, 상언, 격쟁

조선시대에는 국왕이 직접 백성들의 민원을 처리하는 제도가 있었다. 오늘날 국민권익위원회에서 주관하는 국민신문고의 어원이 되는 신문고 제도가 그것이다. 신문고는 태종이 즉위한 직후 의금부에 설치되었고, 억울한 사정이 있는 민원인이 신문고 북을 친 후 민원을 접수시켰다. 접수된 민원은 국왕에게 보고되어 처리 방안이 결정되었고, 5일 이내에 담당 관리가 처리 결과를 보고해야 했다. 그러나 신문고를 칠 수 있는 사안이 제한되고, 지방에서 민원을 접수하려면 1차로 지방관이나 관찰사에게 알리고, 2차로 사헌부에 알리며, 3차로 신문고를 두드려 국왕에게 호소해야 했다. 쉽지 않은 방식이었다.


상언과 격쟁은 민원을 더욱 효과적으로 해결했다. 상언은 아랫사람이 국왕에게 올리는 글이고, 격쟁은 민원인이 궁궐 안이나 국왕의 행차 길에서 징, 꽹과리, 북을 쳐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다. 상언과 격쟁은 민원을 접수하면 3일 이내에 국왕에게 보고되었다. 그러나 처리 절차는 달랐다. 상언은 승정원에서 문서를 접수하고, 승지가 사안별로 국왕에게 보고하였다. 격쟁은 병조나 고훤랑(임금 거동 시 행차에 지장이 없도록 막고 살피는 관원)이 격쟁인에게 우선 형벌을 가하고 사안을 형조로 보내 국왕에게 보고하였다.


상언과 격쟁은 신문고를 대신하는 역할을 하였다. 상언과 격쟁을 하는 대상은 형벌이 자신에 미치는 일, 부자 관계, 적자와 첩자, 양인과 천인을 구분하는 일로 제한되고, 반드시 본인이 직접 신고해야 했다. 조선후기에 상언과 격쟁은 더욱 활성화되었다. 숙종 대에는 아들이 아버지, 손자가 할아버지, 아내가 남편, 아우가 형, 노비가 주인을 대신하여 상언과 격쟁을 할 수 있었다. 그러자 민원인의 숫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영조 대에는 이에 대응하여 창덕궁의 진선문과 경희궁의 건명문 남쪽에 신문고를 설치했다. 신문고를 설치하는 대신에 궁궐 안이나 행차 길에서 격쟁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정조 대에는 행차 길의 격쟁을 다시 허용하고, 백성들의 어려움에 대한 상언과 격쟁도 허용했다.


정조가 상언과 격쟁을 처리하는 방식을 보자. 정조는 1798년(정조 22)에 서오릉을 방문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상언을 접수하였고, 이틀 후 41건의 상언을 처리했다. 여기에는 거제도 유생 성응도가 올린 상언도 포함되었다. 비변사에서 성응도의 상언을 보고했다. ‘거제도 백성들이 역을 부담하려고 별도로 보민고를 만들어 그 이자로 충당했지만 효과가 없어졌다. 이에 백성들은 통영에서 관리하는 거제도의 어전에서 20곳을 보민고에 추가하고 거기서 나오는 세를 균역청에 납부할 것을 요청하였고 통영에서 이를 허락했다. 그런데 새로 온 통제사가 어전을 모두 없애버렸으니 예전대로 회복시켜 달라’는 요청이었다. 비변사에서는 경상감사가 이 일을 처리한 후 보고하게 하되, 어전을 보민고에 다시 붙여주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하였다. 정조는 이를 수락했다.


이를 보면 거제도 유생이 올린 상언은 승정원 → 비변사 → 국왕 → 비변사 → 경상감사 → 거제부사, 통제사 → 경상감사 → 좌의정 → 국왕으로 전달되면서 최종 조치가 이뤄졌다. 국토의 최남단에서 올라온 유생의 상언이 국왕에게 즉시 전달되고, 관찰사가 현지 상황을 파악한 후 즉시 조치가 이뤄졌다. 국왕에게 민원을 직접 전달하는 상언과 격쟁은 이처럼 효과가 빨랐다.


조선은 여론정치가 발달했다. 유교 정치는 ‘공론’으로 표현되는 여론에 입각한 정치를 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국왕과 관리들은 각종 국무회의를 통해 주요 정책을 논의하고, 삼사의 관리들은 언론을 고유의 직무로 하였다. 또한 현직 관리와 사대부는 경연, 구언, 상소 등의 방식으로 국왕에게 당대의 정책을 비판하거나 요청 사항을 건의할 수 있었다. 민원인이 신문고를 울려 민원을 접수하거나 국왕이 행차하는 길에 상언과 격쟁을 통해 민원을 접수시키기도 하였다. 이렇게 접수된 민원은 국왕이 직접 처리하고 처리 기간도 짧았다. 오늘날 한국의 민주주의가 급속도로 발달한 데에는 이러한 전통적 기반이 있었다.



글. 김문식(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출처:월간 문화재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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