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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사형장의 살풍경…인간백정의 역사
글쓴이 문화재방송.한국 등록일 [2021.02.15]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사형장의 살풍경…인간백정의 역사

사회에디터 http://leekihwan.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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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보의 <형정도첩>에 묘사된 조선시대 참형 모습.참형은 사지를 찢어죽이는 능지처참에 이어 두번째로 혹독한 형벌이었다.

김윤보의 <형정도첩>에 묘사된 조선시대 참형 모습.참형은 사지를 찢어죽이는 능지처참에 이어 두번째로 혹독한 형벌이었다.

 

“옛날 요임금은 천하를 다스릴 때 한 사람 죽이고 두 사람에게만 형벌을 내렸는 데도 천하가 잘 다스려졌다.”(<사기> ‘서(書)’) 

“순임금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삼가야한다. 삼가야한다. 형벌을 행할 때는 가엾게 여겨야 한다.(欽哉欽哉 惟刑之恤哉)’”(<사기> ‘오제본기’) 

백성들이 고복격양가를 불렀다는 요순시대의 이야기다. 한마디로 형벌을 가볍게 해야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후대의 군주들도 요순을 따르려 무진 애를 썼다. 예컨대 한나라 효문제는 사람의 몸을 훼손하는 이른바 육형(肉刑)을 없애면서(기원전 168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육형이 있어도 간악함이 멈추지 않으니 그 잘못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 사람들에게 잘못이 있으면 교화를 베풀지 못하고 형벌부터 먼저 가하니…. 무릇 형벌이란 사지를 잘라버리고 피부와 근육을 도려내 죽을 때까지 고통이 그치지 않으니 얼마나 아프고 괴로우며 부덕한 것인가. 육형을 없애도록 하라.”(<사기> ‘효문제 본기’) 

 

효문제는 그러면서 “다정하고 자상한 군자여! 백성의 부모로다”라는 <시경>의 내용을 인용했다.

<사기> ‘혹리열전’은 “백성을 법으로 다스리면 무슨 일을 저질러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면서 “도덕으로 다스릴 때 백성들은 부끄러움을 알고 바른 길로 간다”고 충고했다.

어디 중국의 군주들 뿐인가. ‘해동의 요순’이라는 칭송을 받던 세종은 마찬가지였다. 세종은 1432년(세종 14년) 지방관 부임인사차 찾아온 정사와 양서적에게 신신당부한다.

“백성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사랑하라. 형벌은 중대한 일이니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부득이 형벌을 쓰더라도 구휼하려는 마음만 있다면 억울하게 죽는 자는 없게 될 것이다.”

■‘공자님 말씀일뿐’ 
그러나 이는 그야말로 요순시대에나 있을 ‘공자님 말씀’이다. 

예를 들면 공자도 “형벌 대신 도덕으로 다스리라”고 강조하긴 했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공자님 말씀’이시다. 

그런 공자였지만 한비자가 “옛날 상나라의 법도엔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으면 손목을 잘랐다”고 하자 이렇게 말했단다. 

“그것이 곧 치국의 도리(此治道也)이니라.” 

공자 뿐인가. 주문공(주희)도 이런 말을 했단다. 

“때때로 형벌을 가벼이 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형벌이 가벼울수록 패역(悖逆)하여 작난(作亂)할 마음만 자라게 된다.” 

대체 어쩌란 말인가. 요순을 닮으라면서 뒤에서는 ‘법대로 처단’을 외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도 극형 중의 극형이라는 능지처참형을 60번이나 집행했고, 190명에 달하는 사형수로 감옥이 넘쳐났다니…. 

■사람을 죽여 포를 뜨고 젓을 담가 조리돌렸다 
그랬다. 역사는 요순의 이상대로 펼쳐지지 않았다. 

돌이켜 인간의 역사를 곱씹어보면 그야말로 야만의 역사와 다를 바 없다는 자괴감이 든다. 법집행이라는 이름으로 자행 

갑신정변 이후 망명한 김옥균이 상하이에서 살해당했지만, 그의 시신은 다시 양화진에서 능지처참되고 목이 효수되었다.

갑신정변 이후 망명한 김옥균이 상하이에서 살해당했지만, 그의 시신은 다시 양화진에서 능지처참되고 목이 효수되었다.

되는 야만의 역사를 일별해보자.

예컨대 상나라 마지막 군주인 주왕의 만행을 보라.

“주왕은 충성스런 신하인 구후와 악후를 죽여 포를 뜨고 소금에 절여 젓을 담갔다. 그리곤 그것을 제후들에게 보내 맛보게 했다. 이를 ‘해형(해刑)’이라 한다. 또한 기름 바른 구리 기둥 밑에 불을 지핀 뒤 그 기둥 위에 죄인을 걷게 했다. 미끌어진 죄인들은 불에 떨어져 죽었다. 이를 ‘포락지형(포烙之刑)’이라 했다.”(<사기> ‘은본기’) 

그 뿐이 아니었다. 주왕은 숙부인 비간이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하자, “성인은 심장이 7개라 하는데, 한번 보고 싶다”며 비간의 심장을 꺼내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런 상나라를 멸한 주나라에 들면 형벌은 5가지로 요약된다. <상서(尙書)> ‘여형(呂刑)’을 보면 “주나라 시대에는 5가지 형벌, 즉 묵(墨)·의(의)·비(비)·궁(宮)·대(大)가 있었다”고 했다. ‘묵’은 이마에 먹물로 문신하는 형벌이다. ‘경(경)’이라고도 한다. 요즘 성범죄자에게 발찌를 채우는 형벌과 비견할 수 있겠다. ‘의’는 코를, ‘비’는 다리나 발뒤꿈치를 자르는 형벌이다. 

‘궁’은 성기를 자르거나(남성) 메우는(여성) 형벌이고, ‘대(大劈)’는 참수를 뜻한다. 그런데 이 5가지 형벌에 해당되는 죄는 무려 3000여 가지에 달했다. 

주나라 때 형법을 제정한 목왕(976~922)은 “경형(묵형)과 의형에 속하는 죄가 각각 1000가지, 비형에 속하는 죄가 500가지, 궁형에 속하는 죄가 300가지, 대벽에 속하는 죄가 200가지이다. 그러니 오형에 속하는 법조항은 모두 3000가지이다.”(<사기> ‘주본기’) 

19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lt;동국여도&gt;에 그려진 도성과 서대문 일대의 모습. 조선시대 사형장은 주로 도성에서 서쪽으로 10리 안팎 떨어진 당고개, 양화, 새남터와 서소문 밖 등에 자리잡고 있었다.|서소문순교성지 전시관 전시 사진

19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동국여도>에 그려진 도성과 서대문 일대의 모습. 조선시대 사형장은 주로 도성에서 서쪽으로 10리 안팎 떨어진 당고개, 양화, 새남터와 서소문 밖 등에 자리잡고 있었다.|서소문순교성지 전시관 전시 사진

■3600회의 칼질로 사형시키다
이 가운데 짐승보다 더 극악한 극형은 능지처참(사)이 아닌가 싶다.

‘능지(凌遲)’란 무엇인가. 그대로 산이나 구릉의 완만한 경사이다. 그러니까 능지처사는 되도록이면 천천히 고통을 극대화하면서 사형에 처하는 극형인 것이다.

능지처사의 역사는 깊다. 역시 3300~3000년 전 상나라 말기의 갑골문에 등장한다.

“폭동을 일으킨 강족(羌族) 한 사람의 사지를 찢어죽였다.(책)” “강족 사람 15명을 찢어 죽일까요.(책)”

사지를 찢어죽이는 형벌, 즉 책형(책刑)은 능지처참의 일종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칼로 차례차례 베어 죽이는 능지처사는 10세기, 요나라 때부터 시작됐다. 이후 송·원·명나라를 거쳐 청나라 말기까지 지속됐다. 능지처사는 그야말로 소름끼치는 극형이었다. 죽을 때까지 칼로 살을 베는 형벌이었기 때문이다. 

1510년 명나라 환관 유근은 반역음모를 꾸민 죄로 무려 3357회의 절개형을 받았다. 1639년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패륜을 저지른 정만이라는 자는 무려 3600회의 절개명령을 받았다.

숨이 끊어질 때까지 물을 뿌려가며 죽을 먹여가며 칼질을 해댔다니 얼마나 끔찍한가. 칼질이 아니더라도 죄인의 팔과 다리를 먼저 자르고 목을 치는 형태로도 이어졌다.

■저잣거리의 칼춤 
중요한 착안점이 있다. 

서소문 밖 형장을 표시해놓은 사진. 서소문밖 형장에서는 이승훈 정약종 황사영 등 천주교 신자들이 줄줄이 참형을 당했고, 홍경래, 김개남 등도 참수형을 당한 뒤 이곳에서 목이 효수되기도 했다. 영조 때 영조를 맹비난했다는 이유로 당고개에서 참형 당한 목호룡도 이곳에서 다시 효수된 뒤 긔의 목과 사지가 전국 8도에 조리돌려졌다.|서소문  순교성지 전시관 전시사진

서소문 밖 형장을 표시해놓은 사진. 서소문밖 형장에서는 이승훈 정약종 황사영 등 천주교 신자들이 줄줄이 참형을 당했고, 홍경래, 김개남 등도 참수형을 당한 뒤 이곳에서 목이 효수되기도 했다. 영조 때 영조를 맹비난했다는 이유로 당고개에서 참형 당한 목호룡도 이곳에서 다시 효수된 뒤 긔의 목과 사지가 전국 8도에 조리돌려졌다.|서소문 순교성지 전시관 전시사진  

참형이나 능지처참 같은 잔인한 형벌이 사람들이 부적대는 저잣거리에서 만 백성이 보는 앞에서 행해졌다는 것이다. 일벌백계, 혹은 ‘시범케이스’라 할까.

예컨대 중국 한나라 때의 사형장은 수도 장안(長安·지금의 시안)의 남문 안에 있는 고가(藁街)였다. 그런데 이곳은 제후국(속국) 사절들이 머무는 만이저(蠻夷邸) 인근에 있었다.

이런 곳에 사형장을 설치한 이유는 명백하다. 한나라의 위엄에 복종하지 않으면 저 사형수와 같은 신세가 될 수 있다는 경고였다.

실제로 한나라는 기원전 47년(한 원제 3년) 한나라를 괴롭혔던 흉노왕 질지 선우의 목을 잘라 만이저의 문에 그 머리를 내걸었다.(<한서> ‘원제기’) 

이후 각종 문헌에 등장하는 ‘고가’는 바로 사형장의 상징어가 됐다. 예를 들어 송나라 충신 호전은 1138년 “(금나라와 화친을 주장한) 왕륜·손근·진회 등 세사람의 목을 베어 고가에 달기를 원한다”는 내용의 상소문을 황제에게 올린 적이 있다. 

또 <동문선>의 ‘조칙·인종사부식약합조(仁宗賜富軾藥合詔)’를 보면 “묘청의 난을 진압, 괴수의 머리를 베어와서 고가에 매달았다”는 표현이 보인다. 

수괴의 머리를 베어 만백성들에게 경계를 삼으려 보였다는 것이다.

■“시신 몸뚱아리를 시장바닥에 전시하라” 
조선시대도 마찬가지였다. 

상나라 시대 갑골문, 목을 자르는 벌형(伐刑)을 내려도 좋을 지를 묻고 있다. 잔인한 형벌의 역사는 이렇게 뿌리깊다.

상나라 시대 갑골문, 목을 자르는 벌형(伐刑)을 내려도 좋을 지를 묻고 있다. 잔인한 형벌의 역사는 이렇게 뿌리깊다. 

예컨대 1407년(태종 6년) 충청도 연산에서 내연남과 짜고 남편을 살해한 뒤 시신을 유기한 남녀가 거열형(車裂刑)을 당했다.

당시 반역죄와 강상죄 등은 능지처참 가운데서도 거열, 즉 팔과 다리를 각각 다른 수레에 매어 죄인을 찢어 죽이는 형벌을 받았던 것이다. 이 때의 <태종실록>을 읽어보라.

“태종이 ‘법에 능지의 조항이 있느냐’고 묻자 황희는 ‘이전에 거열로 능지를 대신했다’고 답했다. 그러자 태종은 ‘시골에서 사형을 집행한들 누가 알겠는가. 본보기를 위해 서울의 저잣거리에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거열하고 사지를 나누어 지방의 각 도에 보내라’고 지시했다.”(<태종실록)

삼강오륜을 해치는 강상죄나 반역죄를 범한 자는 이렇게 공개처형의 방식으로 죽인 것이다.

본보기를 위해 목과 사지가 떨어진 시신을 시장 바닥에 3일 혹은 6일간 내버려두는 ‘기시(棄市)의 형’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예컨대 1728년(영조 4년) 전국적으로 20만 명이 가담한 이인좌의 난이 가까스로 진압됐다. 난을 일으킨 이인좌 등이 결국 붙잡혀 현장에서 참수된다. ‘나머지 무리’도 일망타진됐다.

영조는 숭례문에 올라 이인좌 등의 수급(머리)를 받는 의식을 ‘자랑스럽게’ 거행했다. 백성들이 앞다퉈 그 장면을 구경하려 인산인해를 이뤘다.

영조는 나머지 옥에 갇혀 사형집행을 기다리던 죄수들의 목을 베 그 시신들을 저잣거리에 내다보이는 기시(棄市)의 법으로 처벌했다.(<영조실록>)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도 칼로 부모와 형, 그리고 고을 수령까지 상해를 입힌 자에게 ‘기시’의 형을 내렸다.(1438년)

형조에서 ‘패륜죄지만 범인이 정신병을 앓고 있는 자이니 기시형은 과하다’는 의견을 올렸다. 하지만 세종은 강상죄를 범한 죄가 무겁다고 하여 기시형을 허락하고 말았다.(<세종실록>)

■죽음의 서쪽 
조선시대의 첫번째 공식 처형장은 서소문밖 10리였다. 

“1416년(태종 16년), 예조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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