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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문화유삱 답사기]정교한 불교 예술의 극치, 경천사지 십층석탑
글쓴이 문화재방송.한국 등록일 [2021.02.08]

정교한 불교 예술의 극치, 경천사지 십층석탑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은 관람객에게 가장 인상 깊은 관람 경험이 무엇이었는지 물어보면 내외국인을 막론하고 다섯 손가락 안에 손꼽는 문화재는 박물관 1층 ‘역사의 길’에 위치한 경천사지십층석탑(1348년 건립, 국보 제86호)이다. 관람객은 무려 높이 13.5m에 달하는 석탑의 웅장한 모습과 석탑 전체에 빈틈없이 조각된 정교한 부처, 보살, 사천왕과 신중, 나한 등 끝도 없이 이어지는 부처의 세계를 올려다보며 경천사지 십층석탑에 매료된다.

불교 존상을 모은 불교적 판테온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고려 충목왕(忠穆王) 4년(1348) 대리석을 다듬어 만든 석탑으로 1층의 탑신석 상방에는 건립 연대와 발원자 그리고 조성배경을 알려주는 명문이 남아있다. 발원자는 강융, 고룡봉 등 원나라와 가까운 친원 세력이었다. 경천사지 십층석탑에는 목조건축의 모습이 재현되어 있으며 층층이 불보살의 모습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기단부에는 사자, 용, 연꽃, 소설 『서유기』의 장면이, 1~4층에는 부처의 법회 장면이, 그리고 5~10층에는 두 손을 모은 불좌상이 새겨져 있다.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이처럼 석탑 전체에 불, 보살, 사천왕, 나한, 그리고 불교 설화적인 내용이 층층이 가득 조각되어 모든 불교의 존상을 모은 일종의 불교적 판테온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석탑의 기단부와 탑신석 1~3층까지의 평면은 사면이 돌출되어 있는데 이러한 평면은 원대에 유행한 몽골·티베트계 불탑의 기단부나 불상 대좌 형태와 유사하다. 반면 탑신부 4~10층까지의 평면은 정방형으로 전통적인 석탑 형태로 건립하였다.


반출과 동시에 전개된 문화재 반환 여론

경천사지 십층석탑이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로 다가오는 이유는 석탑 자체가 한국 문화재 수난사를 대표한다는 점 때문이다. 경천사(敬天寺)는 개성 근교인 부소산(扶蘇山)에 위찬한 사찰로 개성의 명승지로 잘 알려진 곳이었다. 1902년 세키노 타다시(關野貞)가 조선의 고건축을 조사하고 1904년 『한국건축조사보고(韓國建築調査報告)』를 간행하자 경천사지 십층석탑의 존재는 대외적으로도 알려지게 되었다.


1907년 순종의 결혼 가례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의 궁내대신 다나카 미스야키(田中光顯)가 특사로 오면서 경천사지 십층석탑의 수난사가 시작되었다. 당시 골동품상으로 잘 알려진 곤도 사고로(近藤佐五郞)에게 부탁하여 반출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주민들이 만류하자 결국 헌병들이 말리는 주민들을 총칼로 위협하고, 석탑을 해체하여 거적으로 포장하였다. 이를 알고 군수가 제지했지만 결국 석탑 부재들은 수레에 실려 한밤중에 밀반출된 것으로 전한다.


19세기 말부터 일어난 문화재 약탈 사건과 유사하지만, 문화재 수난사에서 경천사지 십층석탑이 지니는 중요한 의미는 석탑 반출 이후 전개된 문화재 반환 여론의 조성에 있다. 석탑이 반출되자 이 사건은 큰 사회적 문제가 되어 <대한매일신보>에는 10여 차례 이상의 기사와 논설이 게재되었고 석탑의 불법 반출이 널리 알려졌다. 기사를 통해 당시 불법 반출 상황이 알려지자 일본에서도 신문을 통해 논쟁이 일어났는데 한편에서는 불법 반출을 비난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석탑 반출을 정당하게 평가했으며, 석탑 반출 자체를 거짓으로 보는 저팬 메일(Japan Mail)의 가짜뉴스도 등장했다.


석탑 반환을 위한 국제적인 여론 조성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은 월간지 [코리아 리뷰(Korea Review)]의 발행인 미국인 헐버트(Homer B. Hulbert)와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Korea Daily News)]의 발행인인 영국인 베델(Ernest T. Bethell)의 지속적인 기고였다. 특히 헐버트는 일본의 영자 신문 [저팬 크로니클(Japan Chronicle)]과 [뉴욕 포스트(New York Post)]에도 불법 약탈을 알렸으며, [저팬 메일]의 거짓 보도에 현장사진과 기고로 반박했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로 파견되었을 때도 현지 신문에 석탑 밀반출을 폭로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만행에 대한 지속적인 기고는 반환 여론 조성에 큰 역할을 했다. 석탑 반출이 일어난 뒤 이러한 여론은 당시 대한제국에서 빈번했던 문화재 반출 문제의 심각성을 널리 일깨울 수 있었다. 이러한 여론 속에 대한제국이 강제병합된 이후 조선총독부는 일본 동경제실박물관(東京帝室博物館)에 보관된 경천사지 십층석탑에 대한 반환을 추진하면서 다음과 같은 명분을 내세웠다. “…궁내대신 다나카 미쓰야키가 어떤 수속도 밟지 않고 경천사지 석탑을 운반하였고, 본디 다나카의 사유물이 아니며, 조선의 관습에 따라 사찰이 폐사하여 국가의 소유인데, 이 시점에는 국유로서 조선총독부 소관에 속한다.”


01.1902년 기록된 당시의 경천사지 십층석탑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02.경천사지 십층석탑 탑 신부 미타회 부조 ⓒ국립중앙박물관 03.경천사지 십층석탑 탑 신부 부조 ⓒ국립중앙박물관

환수 후 100년 만에 드러낸 석탑의 위용

그 결과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1918년 국내로 반입되었으며 1919년 조선총독부박물관에 귀속되었다. 거적과 상자로 포장된 256개의 화물이 돌아왔는데, 1907년 반출 당시 이미 상당히 훼손되어 1918년에는 거적에 싼 파편만 해도 수백 개였다고 한다.


국내에 반환된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당시 기술로는 재건립이 어려웠기에 1960년까지 경복궁 회랑에 보관되었다. 1960년 국립박물관의 학예관인 임천(林泉) 선생 주도하에 경천사지 십층석탑의 훼손된 부재가 수리되어 경복궁에 세워졌고, 1962년 국보 제86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산성비와 오염으로 인한 석탑의 훼손이 심각하였고 정밀한 보존처리가 요구되었기에 1995년 석탑은 다시 해체되어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약 10여 년에 걸쳐 보존처리 되었다. 이후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 용산 재개관 시 현재의 전시실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이 재건립하여 100여 년 만에야 비로소 석탑이 그 웅장한 위용을 다시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이제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우리에게 굴곡진 근대사를 반추하고 우리 문화재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지표라 할 수 있다.



글. 신소연(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출처:월간 문화재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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