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글픈 역사가 담긴 강화와 개성의 고려 왕릉

918년에 건국된 고려는 474년이나 존속했던 나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신라나 조선만큼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주요 정치, 사회, 문화적 사건이 수도 개성을 중심으로 이뤄져 우리가 접근하기 어렵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사실 38선이 그어질 때만 해도 개성은 남한에 속해있었지만 한국전쟁 후 체결된 휴전협정에 따라 북한에 속하게 된 것이니 분단의 시간만큼 우리는 더욱 고려의 역사와 문화로부터 멀어진 셈이다.

하지만 개성이 아니라도 고려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유적이있다. 강화의 고려 왕릉이다. 만월대니 선죽교니 개성 관음굴처럼 눈에 띄는 곳은 아니지만 왕릉은 남과 북이 공통으로 보유하고 있는 고려의 문화유산으로 주목할 만하다. 강화도에 고려 왕릉이 존재하는 것은 잘 알려진 대로 고려가 몽골을 피해 천도를 했기 때문이다.

몽골의 대대적인 침략으로 나라가 황폐해지자 1232년 무인정권의 실권자 최우(崔瑀)는 항전을 결의하고 강화로 천도를 단행했다. 강화도는 개경과 가까우면서 조수간만의 차가 커서 몽골군을 막아내는데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1270년까지 38년간 강화는 강도(江都)라는 이름으로 고려의 수도 역할을 했다. 급하게 천도를 추진한 최우는 성곽을 쌓고, 개경에 못지않은 도성을 만들며 대몽항쟁을 이끄는 기지로 삼았다. 고려 왕릉이 이 시기의 수도 강화에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고려사』에 기록된 왕릉은 87기나 되지만 실제 왕이나 왕비릉으로 그 위치가 추정된 곳은 58기밖에 없다. 왕릉 대부분은 개성 인근에 조성되었고, 강도 시기 사망한 왕과 왕후의 능은 강화에 있다. 강화에는 왕릉급 고분이 여러 기가 있는데 그 가운데 제21대 희종, 제23대 고종의 능을 비롯하여 4기의 고분이 대략적인 피장자와 능호(陵號)가 밝혀졌다. 현재 남아 있는 규모로 미루어 왕실의 무덤으로 여겨지는 곳이 능내리, 인산리, 연리에 있는데 모두 석실분이다. 개성에는 태조의 현릉(顯陵)이 943년 개풍군 해선리에 축조한 것을 비롯해 주로 개풍군과 판문군에 많은 왕과 왕후의 무덤이 분포한다. 북한은 해방 이후 20여 차례 고려 왕릉을 발굴했으며, 2016년에는 덕종의 숙릉(肅陵)과 정종의 안릉(安陵) 역시 개풍군에서 발견했다고 전한다.

능침제도에 기반해 길지에 영면한 고려왕

사실 고려의 왕이 승하했을 때, 장례를 어떻게 치렀는지 예법으로 규정하지도 않았고, 장지를 어떤 기준으로 선정했는지도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특별한 의궤나 도감이 없어서 장례와 능침제도는 『고려사』를 통해 추측할 뿐이다. 『고려사』를 보면 중국의 한(漢)이나 위(魏)나라에 준하여 장례를 치르되, 가장 짧은 기간인 27일에 장례를 마치는 단상제(短喪製)를 택한 것으로 추정된다. 명백하게 규정된 의궤가 없기 때문에 왕실의 장례 기간은 통상 30일에서 40일까지 다양하게 걸렸다. 며칠간 장례를 치르든 왕과 왕비가 승하하면 흰옷과 검은 갓으로 상복을 입는 것은 같았다. 공민왕 때는 국장도감(國葬都監), 빈전도감(殯殿都監)을 두어 왕실의 국장을 관장하게 했다.

장지를 정하는 기준도 명시되지 않았지만 분명 길지(吉地)를 택했을 것이다. 고려 왕실 역시 풍수지리설이나 불교의 비보설(裨補說)에 적합한 길지를 신중하게 골라서 장지로 삼고 능묘를 조성했을 것이다. 강화에 자리한 왕릉 역시 풍수지리에 입각해 선정한 능지로 보인다.

권위와 격식을 갖춘 고려 왕릉

고려 왕릉은 크게 삼단으로 높이를 달리 한 공간으로 능역을 구성하고 각 단마다 흙을 다져 층을 명확히 구획하고 지대석을 쌓았다. 가장 안쪽에는 석실분을 조성하여 망자를 모시고 봉분을 쌓았다. 봉분 둘레에는 병풍석을 쌓아 능의 권위를 과시하는 한편, 흙이 무너지지 않게 하는 효과도 노렸다. 봉분 앞에는 석수와 망주석, 문석인(文石人), 무석인(武石人)을 나란히 세웠고, 정면 중앙에는 혼유석(魂遊石)과 장명등(長明燈)을 두어 격식을 갖췄다. 가장 아래, 즉 능역 입구에는 제사를 모시기 위한 정자각(丁字閣)을 세워 제례를 지냈다.

강화도에 있는 중요한 왕릉은 희종의 석릉(碩陵)이다. 희종은 1204년에 즉위해 최충헌에 의해 1211년 폐위당해 강화로 유배되었고, 그 후에도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귀양살이를 한 불운한 왕이었다. 1237년 붕어하여 석릉에 안치되었다. 석릉 역시 3단의 능역에 봉분과 곡장, 석인상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원래 쌍을 이루어 양쪽에 세워졌을 석인은 1구만 발견되었다. 2001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한 결과, 지하에 설치된 횡구식 석실과 다량의 기와편이 나와서 정자각으로 추정되는 유구가 확인되었다. 석인상은 장승처럼 얼굴만 조각이 남아 있어 무석인인지, 문석인인지 확인되지 않는다. 여느 고려 능묘처럼 청자편 160점이 출토되었다.

그중에는 구연부에 금속 테를 두른 흔적이 남은 청자양각국화당초문대접 파편도 있다. 고려에서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금, 금도금한 은, 순은 등으로 도자기에 금속 테두리를 씌운 금구자기(金釦瓷器)를 썼다는 기록과 그 실물이 있다. 그러므로 석릉에서 발굴된 이 청자대접 파편에 금속은 남아 있지 않지만 원래 금이나 은을 그릇 구연부에 돌린 왕실용 금구자기를 부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용한 금속의 재질은 각 금속의 가치와 사용자의 신분에 따라 종류가 정해졌다. 금이나 은을 입혀 화려하게 만든 도자기의 품격이 사용자의 권위를 높여주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거의 폐허가 되어 봉분도 허물어진 왕릉의 주인 희종의 영화로웠던 어느 때를 기억하게 해주는 청자 파편이다.

고려 왕실문화의 세련미를 표현

제24대 원종의 비인 순경태후(順敬太后) 역시 강화도에 묻혔다. 1235년 14세의 어린 나이에 태자비가 되어 충렬왕과 공주를 낳은 바로 뒤인 1237년 16세에 사망하여 가릉(嘉陵)에 모셔졌고, 아들인 충렬왕이 왕위에 오른 후 태후로 추존되었다. 가릉은 석릉과 달리 지상에 돌을 쌓아 석실을 만들고 할석을 넓게 덮고 그 위에 봉분을 얹은 형태이며 석실 윗면은 8각으로 호석을 둘렀다. 잘 다듬은 장대석을 쌓아 지상에 건축한 석실 내부에는 원래 회칠을 한 것으로 보이지만 잘 남아 있지않다. 떨어져 나간 회벽에 그림을 그린 흔적이 남아 있어서 고려 석실분 내부에 벽화를 그리던 전통을 따랐음을 알려준다.

다만 높이가 1.75미터에 불과해 고구려 무덤 벽화처럼 다채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릉에도 등신대의 석인상 2구와 석수 2구가 남아 있다. 석릉의 석인상보다 상태가 좋아서 신체 부분의 조각선이 살아있다. 얼굴은 제주도의 하루방이나 여타 장승과 다를 바 없으나 손에 홀(笏)을 들고 있어서 애초에 문석인으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발굴 당시 현재 석인상의 하부에서 시멘트가 발견된 반면 석인을 세우기 위한 토대인 적심이 확인되지 않았다. 따라서 1974년에 능역을 정비할 때 가릉과 가까이 있는 능내리 석실분에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되나 확실하지는 않다. 가릉에서도 청자 및 백자 파편이 발굴되었고, 태후의 능답게 여성용 장신구들이 나왔다. 새가 나뭇가지에 앉아있는 모습의 깔끔한 옥장식은 고려 왕실문화의 세련미를 대변한다.

구조와 형태가 유사한 남과 북의 고려 왕릉

강화도의 왕릉이나 개성의 왕릉은 구조와 형태가 유사하다.고려 말기에 조성된 현정릉은 공민왕의 현릉(玄陵)과 노국대장공주의 정릉(正陵)을 합쳐 일컫는 이름이다. 1365년 사랑해 마지않던 노국공주의 죽음에 몹시 슬퍼한 공민왕이 직접 능의 축조를 지휘했다. 그러므로 현정릉의 건축에는 당시까지 발달된 고려의 수학, 천문, 석조건축 기술이 집대성되었고, 기본적인 능의 구조는 같아도 몽골군을 피해 천도한 강도 시기의 왕릉과는 천양지차가 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3단의 층을 두고 가장 안쪽에 병풍석을 두른 봉분을 조성하고, 능 앞 좌우에 석수와 석인을 나란히 마주 세운 점, 능 정면 중앙에 혼유석과 장명등을 두는 축조 방식은 비슷하다.

아마 처음에는 통일신라의 왕릉과 큰 차이가 없었겠지만 점차 공민왕의 현정릉과 같은 방식으로 고려 왕릉의 구성과 석물 배치가 제도화되었을 것이다. 능의 석실 내부에 회칠을 하고 벽화를 그린 것도 유사하다. 다만 강도 시기는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고 왕실 권력이 미약했으므로 정연한 현정릉에 비하면 왕릉들이 소략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화려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고려 왕실의 미의식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청자 파편이나 각종 금속제 파편, 장신구 등이 강화도에서 발굴되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석실을 매장부로 하는 능의 구조상 도굴이 쉬워서 부장품들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것은 개성과 강화, 남과 북 모두 마찬가지다.

19세기 말 이래 시중에 유통되던 고려청자가 대부분 도굴품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많은 청자들이 왕릉급이거나 적어도 권력층의 무덤에서 도굴된 것이라는 점은 비록 도굴이 오랜 세월에 걸쳐 일어난 일이기는 하지만 고려 왕릉의 보존과 보호가 얼마나 시급한지 새삼 깨닫게 한다. 개성과 강화도의 고려 왕릉이 모두 고려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귀중한 유적인 만큼 더 이상 훼손되지 않도록 속히 남북이 손을 맞잡아야 한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다.

글. 강희정(서강대 동아연구소 교수)

출처:월간 문화재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