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미전투 묘사화(사진=런던 내셔널갤러리)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오늘 1792년 9월20일, 이곳, 이날부터 세계사의 새 시대가 열렸다."
독일의 유명한 대문호, 괴테(Goethe)가 이렇게까지 극찬한, 프랑스 대혁명 기간에 벌어진 한 전투가 있었다. 사실 단일 전투가 역사의 주요 분기점이 된 경우는 별로 없지만 이 전투는 너무나 작은 전투임에도 세계사에 엄청난 여파를 끼쳤다. 그것은 몰락 직전까지 몰렸던 프랑스 혁명군이 거둔 첫번째 승리이자 유럽의 운명을 뒤바꾼 전투인 발미(Valmy) 전투였다.
프랑스 대혁명 이전까지 전쟁은 주로 장교들로 구성된 귀족들과 돈받고 전쟁을 하는 전문 용병대들의 무대였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이 터지면서 반 혁명파 귀족들은 대거 살해당하거나 해외로 피신한 상황이었고 유능한 장교들이 빠진 프랑스군은 군율이 엉망일 수밖에 없었다.
주로 용병대로 구성됐던 군율이 엄한 프러시아군 모습(사진=위키피디아)
미국 독립전쟁의 영웅으로 당시 프랑스군 사령관직을 맡고 있던 라파예트(Lafayette)조차 "이 군대는 군대라고 할 수도 없으며 전투에 투입되면 자멸할 것"이라며 혁명정부에 평화협상 진행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나마 이런 뛰어난 사령관들조차 국민공회와의 정치적 분쟁으로 지휘권을 잃고 해외로 탈출하면서 프랑스군의 작전능력은 한없이 떨어진 상황이었다.
그러나 발미에서의 전투는 기존 전투와 좀 달랐다. 프랑스 혁명군은 총성이 울려퍼져도 도망가지 않았고 당시 유럽에서도 강병으로 이름이 높았던 프러시아 기병대의 공격에도 차분히 자리를 지켰다. 프랑스 포병대는 정확히 적군을 포격했다.
발미에 세워진 켈레르만 장군 동상(사진=위키피디아)
혁명군 사령관이었던 켈레르만(Kellermann) 장군은 프러시아 포병대에 포격을 맞아 자신의 말까지 잃었으나 곧바로 보병들과 함께 전열에 서서 프러시아군이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총검으로 무찌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사기를 높이기 위해 최전방에 선 모습을 병사들에게 보여주고자 모자를 벗어 칼끝에 씌워 높이 쳐들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이 모습에 혁명군은 일제히 "Vive la nation (조국 만세)!"이라고 외쳤으며 사기가 크게 올라갔다. 프랑스군이 좀체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자 프러시아군은 슬그머니 후퇴했다. 프랑스 혁명군이 처음으로 방어전에 성공한 것.
이날 전투는 예전과 다른 프랑스 혁명군의 모습과 열정적이지 않았던 프러시아군의 소규모 접전으로 끝났다. 프랑스군은 300명이 사망했고 프러시아군은 180명가량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단히 소규모 전투였으나 2달동안 줄줄이 연패하던 프랑스 혁명군이 첫 승리를 거뒀다는 것은 프랑스 전역에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의용병이 줄을 이었으며 자신감을 얻은 국민공회는 그날 프랑스 제1공화국을 선포했다. 프랑스 혁명이 단순 민중봉기에서 새로운 정부수립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 전투의 승리 덕이었다.
발미전투 당시 프러시아군 사령관이었던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사진=위키피디아)
사실 이 전투의 경과에 대해서는 당대에도 대단히 많은 의문이 제기됐다. 사실 프러시아군이 새로워진 프랑스군의 모습에 갑자기 주눅이 들어서 물러섰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든 일이었고 프러시아군이 그대로 강력한 접전을 펼쳤다면 프랑스 혁명군은 대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랬다면 파리도 그대로 함락되고 혁명정부도 사라졌을 것이며 루이16세도 복위됐을 터였다.
발미전투의 비밀은 이날 프러시아군 지휘를 맡았던 사령관, 브라운슈바이크(Brunswick) 공의 사후에 어느정도 밝혀졌다. 프러시아 장군으로 평생을 보낸 그의 유품에서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보석들이 많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아직도 정확한 퇴각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브라운슈바이크 공이 프랑스 국민공회로부터 뇌물을 받았고 이로 인해 퇴각했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절대권력은 부패로 망한다'는 진리가 세계사를 완전히 뒤바꿔 버린 셈이다.
디지털뉴스본부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