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방송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홈으로 | 즐겨찾기등록 |  +관련사이트 
문화재방송 한국 " Since 2008. 2. 1 "
[공지]왼 쪽 아래의 유튜브 바로가기를 클릭하시면 문화재 관련 동영상을 많이 보실 수 있습니다. [문화재방송 캠페인] 문화재에는 우리 민족의 얼과 혼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은 애국심입니다.' 휴일이면 가족과 함께 각종 문화재와 함께 하여 민족의 숨결을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hudownwbe wojodown nuebfile monjdown yesnkdown lpmedown jneepudw mndownfile bafdownco yabiqedown amehdown fadowntero evnhdown
HOME >
문화재뉴스 >
무형문화재 >
유형문화재 >
기타문화재 >
영상문화 >
역사기행 >
유네스코세계유산 >
문화재연감 >
유튜브 바로가기 >
PageNo : 01
제 목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바이킹의 아메리카 발견, 노르웨이의 한 살인사건에서 시...
글쓴이 tntv 등록일 [2020.05.07]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바이킹의 아메리카 발견, 노르웨이의 한 살인사건에서 시작

됐다

조선일보
  •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입력 2020.05.05 23:07 | 수정 2020.05.06 00:08

[아메리카의 바이킹]
9세기 야다르서 살인범 토르발 추방… 가족과 아이슬란드로
아들 에리크도 살인죄… 추방돼 그린란드로
손자 레이프르 北美 발견, 식민지 시작
- 고고학 발굴로 확인된 '북유럽 영웅이야기'
3년간 추방된 아들 에리크, 그린란드 발견… 사람들 유혹하려 '녹색의 땅' 이름 지어
1002년 이민자와 함께 온 전염병에 사망
- 바이킹과 인디언, 처음엔 우호적이었으나…
탐험 떠난 손자 레이프르,아메리카 상륙… '포도가 나는 땅' 이름 짓고 인디언과 교역
갈등 불거져 전투 시작… 바이킹이 후퇴
- 아메리카 식민지는 왜 존속되지 못했나
뉴펀들랜드 발굴에서 바늘·실패도 나와… 현지 인디언과 광범위한 접촉 유물 확인
바다 流氷 많아져 항해 끊기자 자취 감춰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아메리카 대륙에 처음 발을 디딘 유럽인은 콜럼버스가 아니라 바이킹이었다. 이들은 콜럼버스보다 500년 정도 앞서 북대서양을 건너 뉴펀들랜드나 래브라도, 세인트로렌스강 연안에 상륙한 것으로 보인다. 1만 년 이상 떨어져 살던 두 대륙 사람들이 처음 조우한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거쳐 아메리카로
사실 바이킹의 아메리카 여행에 대해서는 사가(saga·북유럽의 영웅 이야기) 작품들에 이미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이에 따르면 모든 일의 발단은 노르웨이의 야다르(Jadarr)라는 곳에서 일어난 한 살인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범인 토르발(Thorvald)은 민회에서 추방형을 선고받자 가족을 전부 데리고 아이슬란드로 이주했다. 9세기부터 바이킹 항해인들은 서쪽 바다로 멀리 나가 페로 제도나 아이슬란드 같은 섬을 발견하고 거류지를 개척하고 있었다. 아이슬란드('얼음 섬')는 바다에 얼음이 둥둥 떠다니는 모습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아이슬란드 동남부 베스트라혼(Vestrahorn)산 부근의 스톡스네스(Stokksnes) 반도에 복원한 고대 바이킹 마을.
아이슬란드 동남부 베스트라혼(Vestrahorn)산 부근의 스톡스네스(Stokksnes) 반도에 복원한 고대 바이킹 마을. 풀로 덮인 지붕을 가진 전통적 목조 주거지가 특징이다. 바이킹은 9세기에 노르웨이에서 서쪽 바다로 나가 아이슬란드를 발견하고 개척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토르발의 아들 '붉은 머리' 에리크(Eric the Red)는 아이슬란드에서 지방 유지의 딸과 결혼하여 네 아이를 낳고 농장을 운영하며 잘 사는 듯했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격한 성격을 물려받았는지, 그 역시 살인을 저질러 민회에서 3년 추방형을 선고받았다. 모험심 강한 그는 이 기회에 서쪽에 있다고 알려진 섬을 찾아가 보기로 결심했다. 수십 년 전 어떤 사람이 항해 도중 강풍에 밀려 서쪽으로 표류하다가 섬을 보고 왔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던 것이다. 에리크가 서쪽으로 항해해 가니 과연 큰 섬이 나타났다. 그는 섬에 상륙해서 3년 내내 섬 곳곳을 두루 살펴보고 충분히 거주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추방 기간이 지나 아이슬란드로 돌아온 에리크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발견한 섬에 가서 살자고 권유했다. 그는 이 섬이 살기 좋은 곳이라며 사람들을 유혹하기 위해 그린란드('녹색의 땅')라는 멋있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일종의 부동산 과장 광고를 한 셈인데, 다만 당시에는 현재보다 기후가 훨씬 온화해서 실제 여름에는 풀이 자라고 농사도 가능했다. 아이슬란드에서는 이미 자원에 비해 너무 많은 사람이 살던 터라 새 정착지로 가서 살겠다는 사람이 꽤 많았다. 이주 희망자들은 배 25척을 나눠 타고 떠났지만 불행하게도 사고 때문에 14척만 도착했다. 이 사람들은 섬의 두 지역을 개발해서 농장을 만들어갔다. 고고학 발굴 결과 그린란드에는 한때 농장이 수백 곳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아이슬란드에서 계속 사람들이 유입되어 인구가 늘었지만, 1002년에 새 이민자들과 함께 묻어온 전염병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린란드의 왕처럼 군림하던 에리크 또한 이때 사망했다.
바이킹과 인디언의 어색한 만남

SUPER SUV, 트래버스


아메리카의 바이킹

에리크가 죽기 얼마 전 그의 아들 '행운아' 레이프르(Leifr)가 탐험을 떠났다. 10여 년 전에 헤르욜프손이라는 사람이 아버지를 찾으러 아이슬란드에서 그린란드로 항해해 오다가 강풍 때문에 서쪽으로 한참 떠밀려가서 새로운 땅을 보고 온 적이 있었다. 레이프르는 그의 말을 믿고 새 땅을 찾아 나선 것이다. 그린란드를 떠나 해류를 타고 남서쪽으로 항해해 간 그는 차례로 '평평한 돌들이 깔린 땅'(Helluland), '숲으로 덮인 땅'(Markland), '포도가 나는 땅'(Vinland)을 발견했다. 그가 발견한 '겨울에도 자라는 포도'는 야생 베리 종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렇게 하여 레이프르가 드디어 유럽인 최초로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들였다.
곧 새 땅에서 식민 사업이 시작되었다. 레이프르의 처남 칼세프니(Karlsefni)가 160명을 데리고 가서 식민지를 건설했다. 우리가 흔히 '인디언'이라고 부르는 이 땅의 원주민들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이상하게 생긴 사람들을 보고 무척이나 놀랐다. 게다가 바이킹이 들여온 소가 큰 소리로 우는 것을 보고 대경실색했다. 이때 아메리카에는 소가 없었기 때문이다. 바이킹은 인디언을 '스크뢸링가'라고 불렀는데, 아마도 '못생긴 사람' 혹은 '소리 지르는 사람' 같은 뜻이 아닐까 추정한다. 초기에 양측은 우호적으로 교환을 했다. 인디언들은 바이킹의 옷감을 탐내고, 바이킹은 인디언들의 모피를 탐냈다. 그렇지만 곧 갈등이 불거져 양측이 몇 차례 전투를 벌인 끝에 바이킹은 아메리카에서 후퇴했다.
조용히 막 내린 바이킹의 아메리카 상륙
사가에 나오는 이런 내용은 어디까지 사실일까? 실제 사건이 일어나고 200~300년이 지난 때에 문학적 허구를 섞어 지어낸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들이 전적으로 허구가 아니라 사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1960~70년대부터 진행된 고고학적 발굴로 밝혀졌다. 노르웨이의 부부 고고학자 안네와 헬게 잉스타트가 뉴펀들랜드의 랜스메도스(Lance aux Meadows)에서 발견한 바이킹 주거지가 가장 유명한 사례다. 이곳에서는 주택 여러 채와 대장간, 선박 수리 작업장 등이 발견되었다. 돌로 만든 램프, 바늘, 실패 같은 물품도 나왔으니 여성들도 함께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 정황으로 보건대 이곳에 살았던 주민들은 멀리 남쪽으로 여행하여 식량을 구해오고, 동물을 사냥하고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살았다. 그 외 여러 지역에서 나오는 발굴품을 보건대 바이킹은 아메리카 여러 지역에 들어와서 현지인들과 제법 다양하게 접촉한 것으로 보인다.

노르웨이 화가 크리스티안 크로스가 1893년에 그린 '레이프르 에릭손 미국을 발견하다'.
노르웨이 화가 크리스티안 크로스가 1893년에 그린 '레이프르 에릭손 미국을 발견하다'. 바이킹 일행이 콜럼버스보다 500년정도 앞선 1000년경 아메리카 땅을 발견하는 장면이다. /위키피디아

그 후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히 끝나버렸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도착이 세계사 흐름을 크게 변화시킨 것과 달리 바이킹의 아메리카 도착은 유럽이나 아메리카 대륙 양쪽 모두에 거의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랜스메도스의 정착민들도 오래지 않아 거주를 포기하고 떠난 것 같다. 고작 수백 혹은 수천 명 수준의 인구 이동은 흥미로운 에피소드 정도로 끝났다. 역사의 거대한 전환은 약 500년 후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과 같은 강력한 근대국가가 해상 활동을 주도할 때 가서야 일어났다. 이전 시기인 14세기에 기후가 계속 한랭해지자 여름에도 바다에 유빙(流氷)이 생겨서 북대서양 항해가 힘들어졌고, 아메리카 대륙은 점차 기억에서 멀어졌다.

[그린란드 바이킹 1408년 절멸, 왜?]
그린란드의 바이킹 사회를 몰락시킨 주요 요인은 기후 변동이다. 바이킹이 처음 도착한 980년경 그린란드의 기후는 현재보다 훨씬 온화했지만 점차 기온이 내려가 소위 소빙하기가 닥쳐오자 환경 조건이 지극히 나빠졌다. 그렇지만 모든 것을 기후 요인으로만 돌릴 수는 없으며, 사람들의 대응 또한 함께 고려해야 한다.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그린란드야말로 붕괴하는 문명의 특징을 골고루 갖춘 사례라고 설명한다.
그린란드에 정주한 사람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목축과 사냥을 병행하는 삶을 살았다. 초기에 약 1000명이었던 인구는 오래지 않아 4000명으로 늘었다. 이들은 가장 기본적 자원인 나무를 계속 베어냈지만 나무가 다시 자라나게 할 방도가 없었다. 목재가 부족해지니 배를 건조하기 어려웠고, 철을 녹일 연료가 부족했다. 그러자 농기구와 사냥 도구가 부족해졌다. 나무가 없는 땅에서 말, 소, 양, 돼지, 염소를 기르다 보니 토양 침식이 심해져서 농사는 더 힘들어졌다. 겨울이 길어지고 기온이 내려가자 곡물 수확이 크게 줄었다. 유빙 때문에 항해 조건이 나빠지자 이웃 지역과 교역도 끊어졌다. 게다가 이 작은 집단 안에서 계급 갈등도 꽤나 심했다. 소수 부자가 거대한 농장을 소유한 반면 암소 한 마리가 전 재산인 사람도 많았다. 생활이 각박해져서 그런지 사람들 간 잔인하고 격렬한 싸움이 자주 일어났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린란드에 들어온 후 얼마 안 되어 어업을 포기한 것도 식량 사정을 어렵게 만든 요인이다.  능숙한 어부인 이누이트(에스키모)들과 접하면서도 어업을 다시 배우려 하지는 않았다. 바이킹의 후예들은 지난날 그들이 들여온 생활양식에 끈질기게 집착하여 계속 농사와 목축에 매달렸고, 심지어 바뀐 기후에 안 어울리는 의복을 그대로 입은 채 추위에 떨며 살았다. 마지막까지 생존했던 사람들은 결국 굶어 죽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의 기록은 1408년에 끊어졌다.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5/05/2020050503018.html

 


 

주소: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석바위로 53번길 17 | 이메일:tntvkr@nate.com
Copyright(c)tntv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