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과 역사에 관심이 많다 보니 해외 도시를 방문하면 아무리 바빠도 잠깐이나마 그 나라를 대표하는 박물관에 들르는 성향이 있다. 제국주의 과거 덕분에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유물들을 누구보다 많이 소장하고 있는 런던 대영박물관과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전 세계 최고 수준의 보물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오랜 공산주의 통치 때문에 제대로 빛을 못 보고 있는 베를린 페르가몬 박물관. 그리고 19세기 강대국이 되며 전 세계에서 수집한 유물들을 자랑하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대표 박물관은 그 나라 국력의 상징이고, 한 국가의 과거와 현재는 그런 박물관을 통해 과시된다. 그런데 역시 문명의 중심은 잠시도 한자리에 머물지 않는 것일까? 강대국 박물관들은 최첨단 시설과 수준 높은 학술적 연구를 자랑하지만, 막상 찬란한 과거 문명들이 탄생한 지역의 뮤지엄들은 대부분 초라하기 짝이 없다. 고대 수메르와 바빌로니아 문명의 중심지였던 이라크 바그다드 국립박물관에서는 2003년 미국과의 전쟁 중 1만5000여 가지가 넘는 유물이 도난당했고, 아카드 제국의 위대한 보물들을 보관하던 이라크 모술 박물관은 수니파 극단주의단체 이슬람국가(IS)에 의해 파괴되었다.
하지만 한 국가의 불행은 가끔 다른 나라들엔 행운이기도 하다. 한때 '중동의 파리'라는 별명을 가졌던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 그리스 헬레니즘과 인도 문명을 융합시킨 고대 박트리아 왕국의 후계국인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수십년간 전쟁과 내전 덕분에 카불 국립박물관의 중요 유물들은 여전히 해 외 박물관을 떠돌며 전시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불행한 현실이 다른 이들에겐 동시에 박트리아 문명을 편하게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사회와 경제가 몰락하면 우리는 자주 조상을 원망하곤 한다.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반대로 아무리 찬란했던 문명도 후손을 잘 못 만나면 무능한 그들을 위해 세상을 떠돌며 '앵벌이'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