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종 때 12세 나이로 입궐… 조선 마지막 3代 임금 모셔 "남의 나라 노예가 될 수 없다" 망국후 장터에서 칼 꺼내 자결 1962년 대한민국건국훈장 받아
국립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2묘역에 반하경(潘夏慶)이라는 인물이 안장돼 있다. 그는 철종부터 고종, 순종까지 조선의 마지막 3대(代) 임금을 모신 내시(內侍)다. 어떤 내시였기에 국립묘지에 묻히게 됐을까. 반하경은 일제의 핍박이 심해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내시를 그만두고 경기도 파주 집으로 내려갔다. 1910년 경술국치로 국권(國權)을 잃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일주일 내내 음식먹기를 거부한 뒤 파주 삽다리 장터에 나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유서를 꺼내고 자결했다. "나라가 망하면 신하도 망하는 것이다. 내가 죽어 민 충정공(민영환), 여러 충신과 함께 지하에서 임금을 섬길 테니 수천만 동포는 혈심(血心)으로 단결하라!" 반하경이 남긴 유서의 내용이다. 그의 시신은 인근에 살던 동료 내시들이 거두었다. 자손없던 그의 행적은 서울 종로구 문화원장을 지낸 반씨 종친회의 반재식(74)씨의 노력으로 세상에 드러났다. 반씨는 파주 내시촌 인근에서 그의 묘와 비석을 확인했다. 비석에는 '1852년 철종 때 12세 나이로 궁에 들어와 50여년 일하면서 내시 중 가장 높은 종1품 숭록대부(崇祿大夫)까지 올라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2묘역에 안장된 반하경 묘에서 종친회의 반재식씨가 비석을 닦고 있다. 반하경은 내시 출신으로 한일합병에 통분해 자결했다. / 신현종 기자 shin69@chosun.com
성품에 대해서는 "청렴해 박봉으로 살림을 꾸려나갔다. 동료라도 임금의 총애를 믿고 제멋대로 하면 발길을 끊었다. 그는 한일합병이 된 지 1주일 뒤 남의 나라 노예가 될 수 없다며 길가에서 칼을 꺼내 자결했다"고 적혀 있다. 이처럼 "남의 나라 노예가 될 수 없다"고 자결한 사연이 담긴 비석을 어떻게 일제 때인 1937년에 당당하게 세울 수 있었을까. 그 비밀은 비석에 쓰여 있었다. "그가 숨진 지 28년째인데도 덕을 기리는 글이 없어 옛 동지들이 그의 큰 충절이 드러나지 않을까 두려워해 세운다." 반하경의 동료 내시 13명이 '충신 내시'를 기억하자며 돈을 모아 일제 탄압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세웠던 것이다. 비석의 글과 글씨를 쓴 이들도 예사롭지 않다. 글은 반하경처럼 한일합병에 반대해 자결한 형조판서 김석진의 아들인 김영한이었다. 현대 명필로 유명한 김충현·응현의 할아버지이다. 글씨는 예조·이조판서를 지낸 당대 명필 윤용구가 썼는데 그는 일제가 남작 작위를 주려고 하자 거부한 우국지사였다. 반하경이 자결한 뒤 전남 장성과 순창에 있던 그의 형제자매들은 요시찰 인물로 꼽혀 가족이 풍비박산났다. 그의 일가인 반재현(88·전남 장성)씨는 "'고추 대감'이 순국하자 일본 경찰이 그의 가족들을 괴롭혀 뿔뿔이 흩어졌다"고 했다. 반하경은 1962년 대한민국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아무도 돌보는 이 없어 황폐해진 반하경의 무덤은 2001년 국립묘지로 이장됐고 그의 비석은 고향 선산인 전남 장성으로 옮겨졌다. 반재식씨는 "족보와 비석에 나오는 이름은 '반학영(潘學榮)'인데 일제 때 '반하경'으로 잘못 기록돼 정부가 그 이름으로 표창했다"며 "이름부터 제대로 찾는 게 시급하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