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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우리나라의 명재상 하면, 시대 순으로 가장 먼저 꼽히는 인물이 고구려의 을파소(乙巴素, 생년미상~203)다. 초야에 묻혀 살던 이름 없는 선비가 일약 고구려의 국상(國相, 재상)으로 발탁되어 역사에 큰 자취를 남기기까지, 그 뒤에는 고국천왕(재위 179~197)의 용인술이 자리하고 있었다.
서기 179년, 보위에 오른 고국천왕은 외척과 귀족들의 전횡에 시달린다. 특히 유력 가문이자 대대로 왕비를 배출한 연나부(椽那部, ‘절노부’라고도 한다)는 왕권을 위협할 정도의 권세가 있었다. 이때에도 왕비의 친척이자 연나부 소속인 어비류와 좌가려 일가가 권력을 휘두르며 백성의 재산을 약탈하는 등 사리사욕을 일삼고 있었는데, 고국천왕이 이들을 제거하려고 하자 다른 귀족들과 연합해 191년 모반을 일으켰다.
한국 역사에서 손꼽히는 명재상
그런데 반란군을 격퇴한 고국천왕은 주범인 어비류와 좌가려 등만 처단했을 뿐 역모를 도모한 다른 귀족들은 용서한다. 왕실의 세력이 아직 미약했기 때문에 귀족들의 협조 없이 나라를 통치하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고려도 있었지만, 분열보다는 화합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국천왕은 “근래에 관직은 총애하는 자에게 주어지고 덕이 없어도 작위를 받으므로 그 해독이 백성에게 미쳤으며 왕실까지 흔들어 놓았다. 이는 모두가 과인이 현명하지 못한 소치이니, 사부(四部, 고구려 5대 가문 중 왕실을 제외한 나머지 4대 귀족)에서는 재야의 현명하고 어진 사람을 천거하라”고 말한다. 외척들의 국정농단이 인사를 어지럽혔고, 인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음으로 해서 국가는 혼란에 빠졌으며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미쳤다. 고국천왕은 이 모두가 군주인 자신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며, 인사부터 바로잡아 새로운 정치를 펼쳐가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이다.
이에 4부에서는 안류(晏留)라는 사람을 천거했다. 고국천왕이 그를 불러 중책을 맡기려고 하자 안류는 정중히 사양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신은 남보다 못나고 어리석어 국정에 참여하기에 진실로 부족하나이다. 서압록곡 좌물촌에 살고 있는 을파소는 성격이 강직하고 지혜와 생각이 깊습니다. 하지만 등용되지 못한 채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으니, 만약 대왕께서 좋은 정치를 펼치고자 하신다면 이 사람이 아니고서는 어려울 것입니다.” 관직 경험이라고는 전혀 없을 뿐 아니라 궁벽한 시골에서 평민처럼 농사를 짓고 사는 선비, 을파소가 추천을 받은 것이다.
안류의 말을 들은 고국천왕은 곧바로 을파소에게 사신을 보내 정중한 예로 그를 초빙했다. 을파소를 만난 왕은 이내 그의 인품과 식견에 감탄하며 간곡히 부탁한다. “과인이 외람되게도 보위를 이어받아 신민(臣民)의 윗자리에 있지만 덕이 없고 재주가 부족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데 어려움이 많소이다. 능력을 감추고 은거한지 오래된 선생께서 이처럼 과인을 저버리지 않고 바로 와주시니, 이는 나 혼자만의 기쁨이 아니라 사직과 만백성의 복이라 할 것입니다. 선생께 가르침을 받고자 하니, 부디 마음을 다해주시길 바랍니다.” 은일한 삶을 사는 을파소가 조정에 나와 준 것에 대한 고마움과 함께 앞으로 자신과 함께 일 해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그러면서 고국천왕은 중외대부(中畏大夫)라는 관직을 내렸는데, 을파소가 보기에 이 직책은 자신의 이상을 펼칠 수 없는 자리였다. 때문에 “저는 재능이 없고 미련하여 감히 지엄한 왕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대왕께서는 현명하고 어진 이를 뽑아 높은 관직을 주시어 큰 성과를 이루시길 바랍니다”라며 거절했다. 말은 사양하는 것이었지만, 자신에게 국정을 맡기고자 한다면 책임을 지고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높은 관직을 달라는 의미였다. 그러자 고국천왕은 을파소의 속마음을 알고 일약 그를 신하들의 우두머리인 국상에 임명한다(이때 을파소의 나이가 80세였다는 설도 있다).
그런데 아무리 조야의 신망을 두루 받고 있던 안류가 추천한 사람이고, 재능이 뛰어나다고 해도 일개 선비를 하루아침에 국상으로 임명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파격 그 자체였을 것이다. 게다가 집안도 세력도 별 볼일이 없는 사람이라면 필시 이를 질시하고 공격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터이다. 실제로 을파소를 헐뜯고 흔드는 사람이 매우 많았는데 고국천왕은 “국상을 따르지 않는 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씨족을 멸하겠다”는 교지를 내리며 을파소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이와 같은 임금의 지우에 감격한 을파소는 “때를 만나지 못하면 은둔하고 때를 만나면 벼슬을 하는 것이 선비의 떳떳한 도리이다. 지금 왕께서 나를 깊은 뜻으로 대우해 주시고 계시니, 어찌 지난날 은둔의 삶을 다시 꿈꿀 수 있겠는가”라며 정성을 다해 국정에 매진했다. [삼국사기]는 을파소가 “정성을 다해 나랏일을 수행하였으며 정치와 교화를 밝히고 상벌을 신중히 하여, 백성들이 편안하였고 온 나라가 무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백성 구휼제도인 진대법(賑貸法,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주고 수확기에 돌려받는 것)도 을파소가 입안하여 실시한 것이다.(「묵재집」)
인재를 천거한 사람도 포상
고국천왕과 을파소의 사례는 사실 매우 이례적인 케이스다. 아무리 탁월하고 훌륭한 인재라도 경력도 없고 공식적으로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사람을 곧바로 고위직에 앉힐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 사례에는 보스와 참모가 관계를 설정하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교훈이 들어 있다. 우선, 능력 위주다. 자질만 충분하다면 학력이나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기꺼이 발탁할 수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 참모가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고국천왕은 을파소가 자신의 포부와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자리를 주었고, 깊이 신뢰했으며 바람막이가 되어주었다.
더욱이 고국천왕은 “만약 그대의 한 마디가 없었더라면 내가 어찌 을파소를 얻어 함께 다스릴 수가 있었겠는가. 지금 여러 공적이 쌓인 것은 그대의 공”이라며 을파소를 추천한 안류에게 대사자(大使者)의 벼슬을 내린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우선, 훌륭한 인재를 추천해 준 사람을 포상함으로써 인재 발굴을 활성화할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은 포상을 받기 위해서라도 나라 안 구석구석, 신분을 가리지 않고 을파소와 같은 인재를 찾아내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을파소에 대한 인정이자 예우를 표시해주는 것이 된다. 나를 추천해 준 사람이, 나를 추천했다는 이유로 임금으로부터 큰 상을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나의 역할과 능력이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추천해준 사람에게도 고마움을 갚는 일이고 말이다.
만약 보스가 참모를 이와 같이 대해준다면 최선을 다하지 않을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을파소는 “선비는 때를 만나면 관직에 나간다”고 했는데, 그 ‘때’가 언제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기준이 있겠지만 자신의 이상과 능력을 알아주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해 줄 보스를 만나게 되었을 ‘때’, 그것만큼 중요한 때도 없을 것이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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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jmagazine.joins.com/economist/view/31489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