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재도예연구소 고상순 명장의 녹빛 인생
소박하면서도 품격 있고, 투박하면서도 정감 넘치는 그릇 녹청자. 인천 서구에는 녹청자도요지 인근에서 40여 년 동안 흙을 빚으며 그릇에 인생을 담아온 이가 있다. 녹청자 그릇과 함께한 벽재 고상순 선생(72)이 그 주인공이다. 질박한 녹빛 도자기와 함께 살아온 그의 40년 인생에 귀를 기울여 본다.
세월, 정성 담아 그릇을 빚다
벽재도예연구소 소장, 인천 공예명장 제1호(2014), 녹청자 보존회 부회장……. 벽재선생에 대한 수식어는 열손가락으로도 모자란다. 그만큼 한 길만을 오롯이 달려온 결과이다. 그가 도예의 길에 들어선 건 군대를 막 제대하던 22살 무렵이다. 친구의 권유로 한국도자기연구소에 입사한 그는 그곳에서 10년 동안 화공으로 일했다. 이후 1985년 녹청자도요지 인근에 벽재도예연구소 문을 열고 본격적인 도예의 길로 들어섰다.
▲벽재도예연구소 고상순 명장
“처음엔 우리나라 백자를 주로 만들었죠. 하지만 지역 색이 묻어 있는 녹청자를 다시 살려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혼자서 연구하려니 잘 되지 않더라고요. 좀 더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어 명지대학원 도자기기술학과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녹청자 재현에도 성공했죠.”
그의 집념 덕분에 인천에서는 녹청자에 관한 공학석사논문 제1호(2009년)가 탄생됐다. 그는 녹청자의 옛 모습 그대로를 재현해 놓은데 이어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녹청자 그릇을 만들어 널리 알리고 있다.
▲청화백자
연구소 곳곳에는 작품들이 즐비하다. 벽재선생의 트레이드마크라 불리는 당초문양은 청화백자에 담겨 빛을 발한다. 갖가지 빛깔과 모양의 녹청자 그릇에는 그가 일군 정성과 시간의 깊이가 스며있다.
“그릇을 만드는 일을 하나의 수행과정이라 생각해요. 욕망을 비우고 자연처럼 사심 없는 마음으로 자신을 텅 비워야만 좋은 작품이 나오죠. 우리 삶에 꼭 필요한 좋은 그릇,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그릇을 만드는 것이 제 도예 세계의 잣대입니다.”
서구 경서동 녹청자 이야기
녹청자는 고려시대 초기 서민용으로 사용된 도자기이다. 토기에서 자기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유약의 빛깔이 녹갈색과 암록색으로 불투명하고 광택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인천의 그릇이라 알려진 녹청자는 1965년 골프장 지표조사 과정에서 녹청빛을 띈 파편이 발견돼 발굴로 이어졌으며 1970년 사적 제211호로 지정되었다.
▲녹청자 생활자기
벽재 선생은 녹청자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경서동에서 녹청자가 발견되고 녹청자도요지 복원이 이루어지기까지 그는 18년 동안 복원에 앞장서 왔다.
“복원이 결정되기까지 어려움이 많았어요. 1990년대 중반 녹청자도요지복원추진위원회가 구성돼 복원에 힘을 쏟았지만 도요지가 사유지안에 자리한 까닭에 뜻을 이루기가 어려웠죠.”
이후 복원결정이 이루어지기까지 녹청자를 지키고자 했던 그의 의지와 숨은 노력은 끊이질 않았다. 녹청자도요지 복원 이후에도 녹청자에 대한 연구는 물론 작품 활동을 이어가며 보급을 위해 힘쓰고 있다.
자산인 태토와 연구소가 보존되길
벽재선생의 녹청자에 대한 연구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벽재도예연구소 인근에는 보물과도 같은 태토가 매장돼 있다. 태토는 수년 전 지인으로부터 받아 심은 복숭아나무가 전부 말라버리면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흙이 점토성분이라 배수가 안 돼 나무가 죽어버렸죠. 흙을 캐 분석해 보니 갈색점토였어요. 인천이 해안가라 가능한 일인 것 같아요. 감사하게도 그 흙이 녹청자를 만들기엔 무척 적합해 현재까지 인천의 흙으로 인천의 그릇을 만들고 있습니다.”
▲녹청자 도예작가
▲녹청자 생활자기
하지만 최근 연구소 인근 마을은 도시개발구역으로 지정돼 개발위기에 처해있다. 개발구역 안에 연구소는 물론 태토가 묻힌 텃밭까지 포함되어 있다.
“녹청자를 만드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태토를 찾는 일이예요. 그만큼 태토를 발견하는 것이 쉽지 않죠. 그런데 연구소와 인접한 텃밭에는 인천의 자산이나 마찬가지인 갈색점토가 매장되어 있어요. 이게 아파트단지에 묻혀 버린다니 무척 애석한 일이죠. 서구 녹청자의 미래가치는 어마어마한데 이런 자산이 없어진다면 너무나 아쉬운 일입니다.”
녹청자를 생활자기로
벽재선생은 녹청자를 지켜나가며 폭넓게 알리길 원한다. 인천의 녹청자를 인천의 브랜드로 만들고 싶다는 바람도 내비쳤다.
“견실한 도자기축제를 벌여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녹청자에 대해 알고 인식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 개인적으로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우리 전통 그릇에 대해 체계적인 교육과 체험이 가능한 도자기박물관을 만들고 싶어요. 더불어 우리나라 모든 가정과 식당에서 녹청자 그릇을 만나는 게 제 희망이죠. 그만큼 폭 넓게 알리고 싶어요.”
▲연구소 앞마당에 재현해 놓은 녹청자도요지 가마
그는 자연과 정성, 따스함이 담긴 녹청자 그릇을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그날을 간절히 꿈꾼다. 그래서 옛것과 현재의 것을 잇고, 끊임없이 연구하며, 그릇의 미를 창조하는 예술가의 길을 굳건히 걷고 있다.
<벽재도예연구소>
- 1일 도예 체험 가능 : 작품당 1만원
- 정규 도예수업 : 주 2회
- 가는 길 : 인천 서구 한들 4로 12-3
- 문의 : 032-562-2900, 010-5322-6594
글 사진 i-View 김지숙 객원기자
